# 55
/혈룡전 3권 (55화)
3장 특별한 외출 (1)/
천미각 입구로 방갓을 깊숙이 눌러쓴 다섯 사내가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 하나가 재빨리 달려와 사내들을 맞이했다.
“삼층에 약속이 되어 있다.”
방갓 안에서 마치 여인처럼 가늘고 고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멈칫했던 점원이 금세 미소를 머금고 다섯 사내를 안내했다.
“아, 삼층 예약 손님이시군요! 따라오시지요!”
천미각 삼층은 가운데의 개방된 공간을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방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다섯 사내는 그 중 세 번째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 안에는 열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원탁이 있었고, 세 명의 사내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점원이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물러나자 사내들은 천천히 방갓을 벗었다.
드러난 그들의 외모는 무척 독특했다.
얼굴이 마치 분칠이라도 한 듯 하얗으며, 입술은 여인처럼 붉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당두 오세영이 특무창위께 인사드립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을 했다.
그렇다. 그들이 바로 동창의 숨겨진 힘 특무창위들이었던 것이다.
총독을 제외한 다른 동창의 조직원들이 대부분 금위위에서 차출되는 것과 달리 특무창위들은 총독이 직접 환관들 중에 뽑아서 특별히 훈련시킨 자들이었다.
그들의 외모가 특이한 것은 이런 그들의 출신 배경 때문이었다.
“요란 떨 것 없소. 일단 적들에 대해 보고하시오.”
이질감이 느껴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섯 창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말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벽안(碧眼)의 색목인(色目人)이었다.
다섯 특무창위를 이끌고 있는 이로 하륜이라는 자였다.
“예!”
오세영이 재빨리 품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벽안의 창위에게 건네주었다.
찬찬히 두루마리의 내용을 확인하던 하륜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진운룡? 이곳에 오기 전에는 듣지 못했던 이름이군?”
그가 오세영을 바라봤다.
“저희도 처음에는 신웅이라는 자가 원흉인 줄 알았으나, 그 후로 긴밀히 조사해 본 결과 천향루를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자는 신웅이 아닌 그자였습니다.”
“나이가 겨우 스물 안팎이라고?”
“그렇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으나, 외모는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놈의 무공 실력은 십이천과 견줄 정도로 막강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십이천이라…….”
하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예전부터 십이천이라는 자들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일까 확인하고 싶었지. 놈이 진정 십이천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재밌는 사냥이 되겠군.”
오세영은 순간 목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놈이 황보세가에 머물고 있는 터라 없애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오세영이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에 특무창위가 다섯이나 동원된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나?”
하륜의 눈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어리석은 강호의 무뢰배들에게 감히 조정에 반기를 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만일 놈을 돕는다면 황보세가가 아니라 다른 어디라 해도 모두 쓸어버릴 것이야! 게다가 놈이 계속 황보세가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언젠가는 밖으로 나오겠지…… 우린 그때를 노린다.”
하륜에게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기세에 오세영이 신음을 흘렸다.
“이번 기회에 무인 나부랭이들에게 동창이 왜 공포 그 자체가 되었는지 확실히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독버섯 같은 자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똑똑히 경고할 것이다!”
하륜의 목소리에는 무인들과 강호 무림에 대한 경멸이 가득했다.
* * *
남궁린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제갈무진은 곧장 그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별채로 찾아갔다.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남궁린은 그의 별호처럼 기린(麒麟)과 같은 존재였다.
누가 봐도 남궁린은 앞으로 정파의 핵심인물이 될 것이었고, 다음 세대에 천하제일인이 될 가장 유력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과 친분을 쌓는 것이야말로 세가 내에서나 강호에서 자신의 입지를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니 제갈무진으로서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물론, 일전에도 두세 차례 정도 남궁린을 만난 적은 있었으나,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기에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항상 남궁린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제갈무진은 그 많은 이들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때 얼굴을 보이면 기억에 각인되기가 쉽지!’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힘들 때 위로해 주거나, 도움을 준 이들을 잊지 못하는 법이었다.
아직 다른 이들이 몰려들기 전인 지금이 자신이 남궁린의 마음에 각인될 절호의 기회였다.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갈무진이 별채로 들어섰다.
남궁린의 방 앞에는 네 명의 무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수고들 하시오. 공자께 제갈세가의 둘째 제갈무진이 찾아왔다 전해 주시오.”
제갈무진이 무사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어차피 무사들도 제갈무진이 세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한 번에 알아봤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무사가 안쪽에 기별을 넣었다.
“남궁 공자님. 제갈가의 둘째이신 제갈무진 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십시오.”
다행히도 곧장 대답이 들려오자 제갈무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남궁린이 아직 자신을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서던 제갈무진의 신형이 갑자기 멈췄다.
“엇!”
남궁린의 침상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앞에는 다름 아닌 모용주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모용주란의 탐스러운 육체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어떻게 다시 그녀를 취할까만 궁리하던 제갈무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머리가 차갑게 식자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혹시라도 모용주란이 같이 죽자는 식으로 모든 것을 밝히기라도 하면 자신의 인생은 끝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일부러 그녀를 피해 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갈무진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꽤 오랜만에 뵙는군요?”
모용주란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갈무진을 바라봤다.
“그, 그렇소.”
제갈무진이 급히 당황한 얼굴을 감췄다.
“하하하, 이거 주란이에 제갈 공자까지, 이렇듯 못난 놈을 위해 찾아오시니, 부끄럽고 송구스럽구려.”
제갈무진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남궁린이 모용주란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호칭한 것에 주목했다.
그것은 곧 남궁린과 모용주란이 꽤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기야 무림오화(武林五花) 중 하나인 모용주란이 남궁린과 친분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고 보면 그 무림오화를 내가 꺾었지.’
아름답던 모용주란의 나신을 생각하자 제갈무진은 다시 음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침을 꿀꺽 삼킨 후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제갈무진이 남궁린의 안부를 물었다.
“이제 많이 회복되어서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내일 주란이와 영천 아우와 함께 대명호로 나들이를 갈까 생각합니다만, 제갈 공자께서도 함께하시지요?”
남궁린의 제안에 제갈무진이 모용주란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느낄 수 없었다.
‘젠장, 대체 무슨 꿍꿍이지?’
오히려 모용주란의 반응이 없는 것이 더 불안했다.
‘흥! 어차피 네년도 함부로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는 없을 터!’
조금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제갈무진으로서는 남궁린과 친분을 쌓을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하하, 그런 자리라면 당연히 빠질 수 없지요. 남궁공자의 회복을 축하하는 의미에서라도 꼭 참석하겠습니다.”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제갈무진은 모용주란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자신이 함께하는 것을 막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남궁린에게는 자신보다 그녀의 말이 더 먹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녀는 아무런 거부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잘됐군요. 그럼 내일 정오에 정문에서 만나는 것으로 합시다. 그건 그렇고 두 사람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갑작스런 남궁린의 이야기에 제갈무진은 바짝 긴장했다.
‘서, 설마…….’
남궁린이 혹여 모용주란과 자신 사이에서 이상한 낌새라도 느낀 것은 아닐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몇 차례 어색한 모습을 보였던 것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여긴 것이다.
이렇게 되니, 처음부터 침착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제갈무진은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 것인지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진 공자는 어떤 사람이오?”
하지만 다행히도 남궁린이 물은 것은 진운룡에 대한 것이었다.
제갈무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진운룡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그의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졌다.
‘놈!’
분노, 증오, 질투, 굴욕.
진운룡에게는 좋은 감정이라곤 그야말로 손톱만큼도 없었다.
“흥! 그자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방진 잡니다.”
자기도 모르게 진운룡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