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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57화 (57/150)

# 57

/혈룡전 3권 (57화)

3장 특별한 외출 (3)/

씨익!

그때 적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오, 주군!”

그러지 않아도 구학이 못마땅했던 적산이었다.

“들었겠지? 네놈은 앞으로 내 종이다.”

“아, 아니 이 무슨…….”

구학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운룡도 아니고 그의 수하로 보이는 자의 종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게다가 산발한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하며 얼핏 봐도 적산은 괴팍함이 풀풀 넘치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구학의 앞날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암담했다.

순간, 그의 눈에 소은설의 모습이 잡혔다.

‘맞아! 은설이라면 진 공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야!’

구학의 눈동자가 빛났다.

진운룡이 대명호 연회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돌린 것도 소은설 때문이 아니던가.

“으, 은설아! 네가 좀 잘 이야기 좀 해 줘 봐!”

구학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는 소은설에게 애원했다.

바로 그때였다.

퍼억!

“종놈 주제에 말이 좀 짧구나?”

어느새 다가온 적산이 구학을 냅다 걷어찼다.

“아이고!”

구학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명색이 하오문 문주의 수제자인 구학이었지만, 수련을 게을리 하고 놀기 바쁘던 그의 실력으로 적산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아 낼 리가 없었다.

“네놈이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몸이 먼저 느끼면 정신은 따라오는 법! 후후후.”

적산이 음산한 미소를 머금은 채 구학에게 다가갔다.

“왜, 왜 이러시오!”

퍼억!

대답 대신 적산의 주먹이 날아왔다.

“컥!”

동시에 적산의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꾸에엑! 사, 사람 살려! 진 공자 충실한 종이 될 테니 제발 말려 주십시오!”

하지만 진운룡은 원망스럽게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퍼퍽! 퍽!

적산이 인정사정없이 구학을 두들겨 패는 모습을 소은설은 고소하다는 듯 바라봤다.

구학이 오뉴월 더위 먹은 개 마냥 축 늘어지고 나서야 길었던 적산의 구타가 멈췄다.

“나는 적산이라 한다. 오늘부터 네가 모실 주인님이시지! 알겠느냐?”

구학이 아픔도 있고 벌떡 일어났다.

“추, 충심을 다해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래, 이제야 좀 쓸 만해 보이는구나. 후후후.”

적산의 비릿한 미소를 보며 구학은 자신의 앞날이 결코 평온치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   *   *

다음 날.

황보영천의 안내로 진운룡과 소은설 적산, 그리고 시종으로 따라나선 구학까지 네 명은 남궁린 일행과 합류했다.

구학은 어제의 일은 벌써 잊었는지 얼굴에 희색이 만발했다.

소은설 역시 조금은 들뜬 표정이었다.

반면 진운룡은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문에 도착하니 남궁린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제갈무진, 모용주란, 그리고 황보영호, 황보영관, 황보인화 남매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형님! 이분이 바로 진운룡 공자십니다.”

황보영천이 진운룡을 소개하자 남궁린이 조금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진운룡의 외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스물 안팎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이런 어린 나이에 십이천에 근접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반갑소이다, 진 공자. 정말 뵙고 싶었소! 공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 이곳에 이렇듯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오. 이 남궁린은 앞으로 그대를 평생 은인으로 모실 것이오!”

남궁린이 놀라움을 감추고 기쁜 얼굴로 진운룡을 맞이했다.

“보답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

진운룡이 담백하게 말했다.

제법 겸손한 언사였으나,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언뜻 그깟 일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하하! 이거 소문과는 달리 출중한 외모만큼이나 겸손하고 담백한 분이구려.”

남궁린이 호탕하게 웃으며 진운룡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이 남궁린도 결코 은혜를 모르는 소인배가 될 수는 없으니 진 공자께 반드시 은혜를 갚도록 하겠소. 하니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괘념치 마시고 꼭 불러 주시오.”

“그리 말한다면 사양하지 않겠소.”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하면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았고, 굳이 도와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궁린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찬찬히 진운룡을 살폈다.

‘도대체 경지를 가늠할 수가 없군…….’

기껏해야 일류 수준의 공력만 느껴졌다.

그것도 많이 봐 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진운룡의 공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될 리는 만무했다.

아마도 자연스럽게 갈무리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리라.

두 사람의 격차가 크지 않은 이상 상대가 갈무리한 공력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최소한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이야기인가?’

남궁린의 눈에 호승심이 일었다.

과연 진운룡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졌다.

“오! 이토록 아름답다니! 소저께서는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하오!”

그때, 모용주란을 발견한 구학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탄성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구학의 등장에 모용주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제갈무진, 진운룡과 함께 해야 하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는데, 구학의 저급하고 유치한 언사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따악!

“어딜 나서는 게냐?”

그때, 적산의 주먹이 구학의 머리에 작렬했다.

“아이구!”

머리를 감싸 쥔 적산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아니, 예쁜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도 못합니까?”

따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적산의 주먹이 다시 한 번 구학의 머리를 때렸다.

“아, 알겠습니다! 조, 조용히 있겠습니다.”

구학이 얼른 입을 닫았다.

“참으로 무례한 자들이로군!”

제갈무진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제야 남궁린의 시선이 진운룡과 함께 온 일행들에게 향했다.

소은설을 지나친 시선이 적산을 보고는 잠시 이채를 뗬다.

적산의 공력이 일 갑자를 훌쩍 넘어갔기 때문이다.

즉, 그가 절정을 넘어선 고수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면 강호십룡에 들어가도 될 실력이었다.

“한데 함께 오신 분들은?”

남궁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형님. 이쪽은 적산 소협입니다. 진 공자의 수하분이지요. 그리고 이쪽은 하오문의 소은설 소저입니다. 사실 형님을 구출하게 된 것도 소 소저의 아버지를 찾다가 우연치 않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남궁린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자가 제남까지 온 이유가 저 여인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소은설을 자세히 살폈다.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기는 했으나, 강호에서 이름난 미인들을 수도 없이 접한 남궁린에게는 비교적 평범하게 느껴지는 외모였다.

게다가 출신 배경도 보잘 것 없는 하오문이다.

한데도 진운룡 같은 고수가 평범해 보이는 그녀를 위해 움직인 이유가 궁금했다.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주고 있는 사이이거나, 아니면 특별한 인연이 있어 진운룡이 그녀를 도와주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그녀에게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진운룡이 필요한 무엇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특출 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경우를 말했다.

어쨌거나 소은설은 진운룡이라는 괴물과 연관되는 순간부터 결코 평범할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

“이거 이제 보니 소 소저야말로 저의 은인이군요. 결국 저는 진 공자가 정인(情人)의 아버지를 구하는 데 덤으로 딸려 나온 셈입니다. 하하하!”

남궁린은 농을 하며 슬쩍 소은설과 진운룡의 관계를 떠봤다.

“오, 오해세요. 절대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소은설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남궁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일단 첫 번째 경우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아, 이런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진 공자 같은 분을 움직이려면 보통 관계로는 어려울 듯해서 지례 짐작하고 말았습니다. 하하.”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남궁린이 진운룡과 소은설의 눈치를 살폈다.

소은설의 얼굴에는 홍조가 돌고 있는 반면, 진운룡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소은설의 반응은 또래의 소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진운룡이 관심을 둘 만한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했으나, 그가 만난 여인들에 비하면 너무 평범했다.

반면 진운룡은 그 속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도를 닦은 도사 같은 자로군.’

“안녕하십니까? 남궁 공자! 저는 적산 소협의 시종 하오문의 수제자 구학이라 합니다!”

그때, 뒤쪽에 물러서 있던 구학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촐싹거리며 나섰다.

“이놈 봐라?”

적산이 눈을 부라리자 찔끔한 구학이 얼른 다시 뒤로 물러섰다.

“하오문?”

남궁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소은설도 하오문이라 했다.

“진 공자께서는 하오문과 인연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진운룡은 남궁린이 자신을 떠 보려 함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물론, 굳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잠시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런 편이라고 할 수 있소.”

사실 인연이 있는 것은 소은설이었고 하오문은 그녀 때문에 덤으로 얽힌 것에 불과했지만, 관심이 소은설에게 집중되는 것은 그녀에게나 자신에게나 번거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진운룡 같은 특출 난 이들은 항상 적이 많기 마련이었다.

자칫하면 그녀가 적들의 목표가 될 수도 있었기에 되도록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거 진 공자 같은 분과 인연이 있다면 앞으로는 감히 하오문을 무시할 이들이 없겠군요.”

강호에서 개방과 함께 정보를 다루는 양대 산맥인 하오문이었다.

사실 출신에 있어서는 하오문이나 개방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도둑, 기녀들이나 거지나 밑바닥 인생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개방은 구파일방에 들어갈 정도로 강대한 방파인 반면 하오문은 그 영향력에 비해 모두에게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빤했다.

바로 힘의 차이였다.

개방은 수많은 고수들과 그들을 키워 낼 수 있는 상승무공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하오문은 기껏해야 도둑질에 사용되는 은신과 신법, 기녀들의 색공 정도가 내세울 수 있는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운룡과 같은 고수가 하오문을 받쳐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오문도 개방 못지않은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하하, 어쨌든 진 공자와 소 소저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오늘 자리가 비록 누추하지만, 두 분께서 부디 편안하게 즐기셨으면 좋겠소.”

남궁린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다시 진운룡에게 감사를 전했다.

한편,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제갈무진과 모용주란이었다.

그들로서는 진운룡의 우방이 하나둘씩 자꾸 늘어나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린은 진운룡에 대한 관심과 호의를 거두지 않았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도 왔으니 대명호로 갑시다!”

남궁린을 필두로 일행은 대명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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