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혈룡전 3권 (58화)
4장 습격 (1)/
일행이 빌린 배는 돛이 하나 달린 그리 크지 않은 배였다.
열한 명의 일행이 들어서니 꽉 찬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선원도 선장 한 명과 주방장 하나가 다였다.
물론, 그래도 주변에서는 제법 큰 편에 속했다.
선실에서는 주방장이 요리를 만들고 있었고, 선장은 노와 돛을 적절히 움직여 배를 몰았다.
갑판 위쪽으로는 천막이 쳐져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역시 대명호의 풍광은 수려하기 그지없습니다!”
남궁린이 탄성을 토해 냈다.
대명호는 칠십여 개가 넘는 연못들이 합쳐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였다.
예로부터 대명호에는 뱀이 보이지 않고, 개구리가 울지 않고, 비가와도 물이 넘치지 않으며,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했다.
게다가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호수가에는 연꽃이 만발해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하하, 자주 오는 저희도 올 때마다 감탄하고는 합니다.”
황보영천의 말에 남궁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바람이 무척 시원해요!”
호수로 나오니 소은설도 마음이 들떴는지, 탄성을 토해 냈다.
“제녕의 호수와는 또 다르네요.”
제녕에도 수많은 호수들이 있었으나, 도시 한가운데 있는 대명호는 그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거대하면서도 숲을 끼고 숨어 도는 여러 갈래 물줄기들이 모두 색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진운룡도 오랜만에 편안히 정취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소 소저가 마음에 드신다니 이 자리를 마련한 남궁모로서는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이렇게 초대해 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호호, 남궁 오라버니는 소 소저만 보이고 저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에요? 온통 관심이 소 소저에게 쏠리신 것 같군요. 혹여 첫눈에 반하기라도 하신 거예요? 어머, 이를 어쩌나 그리 되면 진 공자랑 연적이 되실 텐데.”
모용주란이 교소를 흘리며 말했다.
어찌 보면 가볍게 던진 농으로 들렸으나, 그녀의 말 속에는 은연중에 남궁린과 진운룡을 이간질 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하하하, 감히 어느 사내가 강호 제일 미녀 중 하나인 주란이 너를 모른 체하겠느냐?”
“그럼 진 공자께서는 사내가 아닌 모양이에요? 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니 말이에요. 물론, 워낙 잘나신 분이니 저 같은 게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모용주란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속에는 누가 보더라도 진운룡에 대한 적대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남궁린은 일전에도 모용주란과 제갈무진이 진운룡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보였던 것을 기억해 냈다.
“으응? 진 공자가? 하하하, 진 공자 참으로 대단하시오. 주란이의 미모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을 정도로 평정심을 가지신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남궁린 보다 공자께서 수련이 깊으신 모양이오.”
남궁린이 호쾌하게 웃으며 모용주란의 도발을 무마했다.
한편으로는 평소 그녀답지 않은 모용주란의 행동에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단지 진 공자의 능력에 대한 질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지나친데?’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적대심을 드러낼 정도라면 무언가 사정이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때였다.
진운룡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모용주란이 자신 때문일 줄 알고 움찔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세 척의 배에 고정되어 있었다.
남궁린도 무언가를 느낀 듯 진운룡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살기?”
세 척의 배로부터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 대상은 바로 일행이 타고 있는 이 배였다.
“무슨 일입니까?”
황보영천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우리를 노리고 있군.”
남궁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세 척의 배는 주변의 다른 배들을 내버려 둔 채 남궁린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배 안에 긴장이 일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노린다는 말입니까?”
“글쎄, 나를 납치했던 무리들이거나, 여기 있는 누군가에게 용건이 있는 자들이겠지.”
“수염이 없는 사내들이라?”
그때, 진운룡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들이 보이시오?”
남궁린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얼핏 잡아도 백 장은 넘는 거리인데,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오십 명 정도고 다섯은 수염이 없는 창백한 피부의 사내들이군.”
“어라? 환관도 아니고 수염이 나지 않은 하얀 얼굴의 사내라니…….”
구석에 있던 구학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환관?”
진운룡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생각날 듯하면서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동창의 총독이 환관 출신 아닌가요?”
그때, 소은설이 무언가 떠오른 듯 급히 말했다.
“동창!”
동창이라는 말에 적산의 눈에서 서늘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동창의 인물들은 총독 외에는 모두 금의위 출신 무사들 아닙니까?”
황보영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동창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환관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있다는 정보를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어요.”
소은설의 말에 일행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그렇다면 천미각의 일로?”
황보영천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동창과 역일 일이라면 천미각의 납치사건뿐이었다.
진운룡과 신웅이 그들의 비행을 들춰내고 납치된 소녀들을 풀어줬으니, 진운룡에게 그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더니 천인공로 할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이들을 징치하겠다고 달려들다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흥! 그렇다면 이 모든 게 결국 진 공자 때문이구려!”
제갈무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운룡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속셈이었다.
“지금 진 공자가 잘못이라도 했다는 거요? 제갈 공자는 그럼 진 공자가 소녀들을 못 본 체했어야 한다는 것이오?”
황보영천이 노한 목소리로 말하자 제갈무진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급히 변명했다.
“아……. 연약한 여인들까지 위험에 빠지게 된 이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내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소.”
“놈들이 거의 다가왔습니다!”
그때, 구학의 외침이 들려와 모두의 시선이 다시 세 척의 배로 향했다.
어느새 배들은 지척까지 다다라 있었다.
이제는 나머지 사람들의 눈에도 적들의 정체가 또렷이 보였다.
환관이라 짐작되는 다섯 사내 외에는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다.
“동창 놈들!”
적산이 이를 갈며 적들을 노려봤다.
분명 자신의 부모가 죽인 자들도 동창 복장을 입었지만, 수염이 없는 환관들이었다.
‘저놈들이었군!’
비록 놈들이 동창의 제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자들일 것이다.
적산에게는 부모를 죽인 원수였다.
“나는 남궁세가의 남궁린이다! 그리고 이 배에는 황보세가와 제갈세가, 모용세가의 자제들이 타고 있다. 오대세가와 정도 무림 전체를 적대시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궁린이 자신과 일행의 신분을 밝히며 상대를 위협했다.
아무리 동창이라 해도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들의 반응은 남궁린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다.
“불화살을 쏴라!”
가운데 배에 타고 있던 하륜이 명을 내림과 동시에 세 척의 배로부터 불화살이 쏘아져 왔다.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는 모양을 보면 애초에 이 배에 탄 모두를 죽일 생각인 듯했다.
“살인멸구를 하려는 모양이군!”
남궁린의 얼굴이 굳었다.
“흥!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으냐!”
황보영천을 비롯 일행이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다.
쉬쉬쉬쉭!
티티팅!
여인들과 구학을 제외한 일행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기에 화살 따위에 상처를 입을 사람은 없었다.
주먹과 검에 맞은 화살들이 튕겨 나갔다.
“엇!”
하지만 문제는 튕겨 나간 불화살 중 일부가 배 위로 떨어진 것이었다.
“이런! 불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에 금세 불이 붙었다.
“젠장! 놈들이 배를 노리고 있소!”
제갈무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배가 없으면 물속에서 놈들과 싸워야 했다.
그렇게 되면 배위에서 공격하는 놈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배로 건너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오십 장의 거리를 두고 놈들은 화살만 날릴 뿐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저런 쳐 죽일 놈들!”
황보영천이 이를 갈며 적의 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무슨 방법이 없는 거요?”
제갈무진이 진운룡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진운룡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얼굴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은설과 진운룡의 주위로는 무슨 막이라도 쳐진 듯 화살이 범접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흥! 자신만 살면 그만인가요?”
모용주란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진운룡을 노려봤다.
진운룡이 적산을 바라봤다.
“상대해 보겠느냐?”
“맡겨만 주십시오,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