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혈룡전 3권 (62화)
4장 습격 (5)/
그때였다.
수증기를 뚫고 두 개의 손바닥만 한 은빛 구채가 하륜을 향해 쏘아졌다.
그 뒤로 진운룡의 차가운 얼굴을 드러냈다.
“크크크,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자신에게 날아오는 두 개의 광구를 보며 하륜이 혈안을 번들거렸다.
어차피 진운룡이 소문대로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얼음 창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정보가 사실이었군. 후후.’
광구가 아직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저릿할 정도의 위력이 느껴졌다.
진운룡의 경지가 십이천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륜 역시 십이천이 두렵지 않았다.
“네가 막았다면 나도 막아 주마!”
하륜이 두 다리를 벌린 채 양손을 앞으로 힘차게 밀어냈다.
콰르릉!
천둥소리가 울리며 하륜의 손바닥이 빠르게 진동했다.
그러자 수십 개가 넘는 장영(掌影)이 순식간에 하륜의 앞쪽 허공을 뒤덮었다.
빠른 속도로 쏘아져 오던 광구가 하륜이 만들어 낸 장영들과 부딪혔다.
구우웅!
충돌과 동시에 일대는 순간적으로 정적에 빠졌다.
폭발의 처음 수축이 소리마저 빨아들인 것이다.
빠아아앙!
압축되었던 대기와 공간이 터지며 강력한 기파가 반경 삼십 장을 덮쳤다.
얼었던 호수면이 터져 나가며 얼음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그 밑에 잠들어 있던 물줄기는 용틀임하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남궁린 등이 탄 배는 충격파를 견뎌 내지 못하고 결국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복면인과 창위들을 비롯 남궁린과 적산 일행은 호수로 뛰어들거나 나머지 배로 몸을 날렸다.
하륜의 장영들과 두 개의 광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제법이군.”
진운룡이 조금은 의외라는 얼굴로 하륜을 바라봤다.
하륜은 방염의 장원에서 상대했던 오 사령이라는 자보다도 한 단계는 더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하륜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다급히 만들어 내느라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절기들 중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가진 천빙장(千氷掌)이 너무 쉽게 소멸된 것이다.
그럼에도 진운룡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쳐 났다.
그것은 곧 상대가 아직 본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대단하군!”
남궁린 역시 탄성을 터뜨렸다.
진운룡이 그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리고 백여 개의 얼음 창을 정면으로 받아 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륜 같은 고수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한 고수!’
남궁린은 진운룡이 실로 소문처럼 십이천에 버금가는 고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하륜의 표정은 한결 신중해졌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이제는 그도 진운룡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승리는 내 것이다!’
츠아아아악!
수면을 스치며 하륜이 진운룡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치이이이익!
그가 지나치는 수면이 끓어오르며 수증기가 일었다.
“음한기공(陰寒氣功)과 열양기공(熱陽氣功)을 동시에 펼치다니!”
남궁린이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두 가지 상극 된 기운을 한 사람이 펼쳐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운의 충돌을 몸이 버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가지 기운을 섞는 것은 가능했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음과 양이 합하여 하나의 기운이 된다.
그와 달리 하륜은 극음(極陰)과 극양(極陽)의 무공을 동시에 펼치고 있었다.
진운룡의 눈동자가 빛났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그것과 비슷했다.
순간, 하륜의 손이 십여 개의 수영(手影)을 만들어 냈다.
하륜의 또 다른 절기 혈염장(血炎掌)이 펼쳐진 것이다.
피처럼 붉은 손 모양의 불꽃이 진운룡의 온몸을 노리며 쏘아졌다.
막 화염들이 온몸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진운룡으로부터 막강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떠더더덩!
마치 쇳덩이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염의 손들이 벽에라도 막힌 듯 뒤로 튕겨져 나갔다.
진운룡이 호신강기를 펼친 것이다.
하지만 하륜은 그에 개의치 않고 연달아 혈염장을 날렸다.
손바닥을 닮은 불덩어리들이 쉬지 않고 둥근 막을 때리는 장면은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듯 화려했다.
쩌저저저저정!
계속 된 혈염장의 공격에 진운룡을 둘러싼 호신강기가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혈염장의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려 버릴 것만 같았다.
하륜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해도 호신강기만으로 혈염장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후후, 이대로 익혀 주마!”
하륜의 장영이 더욱 붉게 변했다.
열기가 짙어지며 진운룡 주위로 수증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하륜은 진운룡이 발이 묶인 채 한 줌 재로 화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였다.
번쩍!
진운룡으로부터 터져 나온 한 줄기 섬광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횡으로 갈랐다.
섬광은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혈염장을 너무도 쉽게 부수며 곧장 하륜을 향해 쏘아져 왔다.
“엇!”
깜짝 놀란 하륜이 황급히 몸을 숙였다.
쉬이이익!
“크윽!”
빛줄기가 하륜의 등을 할퀴고 지나가며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빛줄기의 속도가 너무 빨라 완벽하게 피해 내지 못한 것이다.
몸을 일으킨 하륜의 등은 어느새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륜이 일그러진 얼굴로 진운룡을 노려봤다.
진운룡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 장검이 들려 있었다.
그 장검이 빛줄기의 근원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단 일 검만으로 혈염장을 부순 것은 물론, 하륜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하륜이 미처 숨 돌릴 틈도 없이 진운룡이 움직였다.
하륜의 눈으로도 쫓지 못할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연기처럼 사라진 진운룡의 신형이 하륜 바로 앞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퍼억!
“커헉!”
어느새 검을 집어넣은 진운룡이 하륜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하륜이 피를 뿌리며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그 뒤를 진운룡이 바짝 뒤쫓으며 연달아 권격(拳擊)을 날렸다.
콰콰콰쾅!
화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하륜의 육신이 들썩였다.
“크악!”
진운룡의 주먹을 막은 하륜의 두 팔은 마치 걸레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하륜이 그대로 호수에 처박혔다.
첨벙!
남궁린을 비롯한 일행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진운룡의 신위를 지켜봤다.
화경 고수이던 남궁린도 어쩌지 못했던 하륜을 마치 어린아이 데리고 놀듯 하는 진운룡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으아아아아!”
하륜이 괴성을 지르며 물속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부서지다시피 한, 두 팔은 축 늘어지고,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으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만이 그의 현 상황을 대변해 주었다.
“크윽! 실력을 숨겼구나!”
고통을 참으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하륜이 말했다.
그제야 상대가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륜은 내심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십이천이 이토록 대단한 존재였단 말인가!’
진운룡이 십이천에 버금가는 고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다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결코 자신이 십이천에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결국 오만에 불과했다.
실제로 상대해 본 진운룡의 능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게다가 황보세가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까지 대비해 준비한 전력은 기껏 애송이 몇 명조차 상대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동창은 무림인들의 능력에 대해 큰 오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전부라면 실망이군?”
그때, 진운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담담해서 마치 두 사람이 한가하게 한담이라도 나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하륜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당장에라도 진운룡이 손을 쓴다면 그로써는 아무런 대응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한데도 진운룡은 선뜻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하륜에게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하륜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무인답게 마지막까지 싸우다 진운룡의 손에 죽음을 당하든지, 아니면 굴욕적이지만 몸을 피한 후 다음을 기약하든지.
하륜은 두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에게는 무인의 긍지나 용기 보다 목숨이 더욱 소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창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할 의무도 있었다.
진운룡은 하륜이 눈을 굴리는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봤다.
상대가 달아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진운룡으로서는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이대로 하륜이 돌아가면 다음에는 더욱 강하고 지위가 높은 이들을 데리고 올 것이고, 그들을 제압하면 더욱 강한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혈신대법을 퍼뜨린 원흉이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크윽! 진운룡이라고 했지? 오늘 이 굴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
이를 악문 하륜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얼마든지.”
진운룡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담담히 답했다.
잠시 진운룡을 노려본 하륜이 그대로 몸을 날려 달아났다.
살아남은 동창의 위사들이 패잔병처럼 그 뒤를 쫓았다.
“어딜 도망치려고!”
“그만!”
적산이 급히 뒤를 쫓으려는 것을 진운룡이 막아섰다.
잔뜩 불만 어린 얼굴로 적산이 씩씩거렸다.
원수들을 눈앞에서 놓아준다는 것이 억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운룡은 적산의 불만을 그대로 무시했다.
진운룡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적산은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크윽! 왜 놈을 그대로 놓아준 것이오!”
그때, 부서진 배 한쪽에 주저앉아 있던 제갈무진이 진운룡에게 따졌다.
하지만 진운룡의 다음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대가 가서 잡든가.”
특무창위들을 상대하느라 온몸에 상당한 상처를 입은 제갈무진이었다.
아무리 심각한 부상을 입은 하륜이라지만 그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남궁린과 나머지 일행도 하륜을 쫓지 못했다.
진운룡이 움직이지 않는데 그들이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진운룡은 굳이 제갈무진과 남궁린 등에게 하륜을 놓아 보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혈신대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륜을 놓아준 진운룡이 소은설 등이 머물고 있는 배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 뒷모습을 남궁린이 뚫어져라 바라봤다.
진운룡은 충분히 오만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무위는 아버지이자 정도무림 제일의 고수인 남궁진천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으리라.
물론, 남궁진천이 남궁린에게 제대로 모든 것을 보여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진운룡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의 능력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혹시 반로환동한 고수란 말인가?’
남궁린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반로환동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경지였기 때문이다.
이제껏 누구도 반로환동을 한 고수를 직접 봤다는 이는 없었다.
‘아니면, 특별한 술법을 사용했든지, 주안술이라도 익힌 것인가?’
오히려 그것이 더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운룡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진운룡이라…….’
진운룡의 뒷모습을 보는 남궁린의 눈동자가 뜨겁게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