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혈룡전 3권 (63화)
5장 남궁진천 (1)/
피이잉!
퍽!
위혁의 뺨에 긴 혈선을 남기고 벽에 꽂힌 붓 자루가 바르르 떨렸다.
위혁은 미동도 않은 채 상관인 조문의 처분을 기다렸다.
“특무창위를 무려 다섯이나 보냈다. 한데 모두 전멸했다? 그것도 서른도 안 된 애송이들 몇 놈에게?”
조문이 살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그야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넘치도록 충분한 전력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인솔자는 특무창위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실력자인 하륜이었다.
하륜은 이미 화경의 경지를 넘어섰고, 혈신대법을 통해 얻은 힘으로 십이천(十二天)이라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문이 상상치도 못했던 것이었다.
전멸!
물론, 자결을 한 위사들이 많았지만, 결국 적을 이길 수 없었기에 자결을 택한 것이니 전멸이나 마찬가지였다.
“큭큭큭, 하기야 네놈이 무슨 책임이 있겠느냐. 애초에 이런 일을 책임질 만한 깜냥도 못 되는 놈이지!”
영반인 위혁은 하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위치였다.
어차피 명을 내린 것은 조문 자신이고, 사실 그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후후, 이제 제독께 네놈과 내 목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여기까지 와서 누굴 탓하랴. 내가 놈들을 너무 얕잡아 봤어…….”
조문이 씁쓸한 얼굴로 되뇌었다.
애초부터 무림인들을 너무 우습게 보고 전략을 짠 것이 실수였다. 생각보다 무림인들의 저력은 훨씬 뛰어났다.
“진운룡이라고? 대체 어디서 그런 괴물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조문이 탄식을 토해 냈다.
처음 하륜등을 제남에 보낼 때는 신웅과 황보세가만을 적으로 상정하고 전력을 편성했다.
진운룡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보가 조금만 빨랐어도…….”
위혁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그게 바로 네놈의 잘못이야. 파견 전력을 결정하고 명을 내린 것은 나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데 명확한 정보를 제시하지 못한 것은 네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게지.”
동창의 주요업무 중 하나가 바로 첩보와 정보수집이었다.
수많은 대소신료들 황족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뒷조사를 해서 약점과 치부를 확보하고 그것을 이용해 그들을 휘두른다.
뿐만 아니라 중원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진 정보망을 통해 백성들을 감시하고 여론을 조율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위혁은 그런 정보망의 한 줄을 잡고 있는 이였다.
그의 임무는 그 정보망을 관리하고 수집된 정보를 분석해서 조문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잘못된 정보를 조문에게 제공함으로써 작전의 실패에 한몫했다.
“죽여 주십시오!”
쿵!
위혁이 이마를 바닥에 부딪히며 죄를 청했다.
“내가 왜? 어차피 제독께서 다 죽일 텐데, 귀찮게 내가 손을 더럽힐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큭큭큭.”
마치 자포자기를 한 듯 조문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조 첩형관! 제독께서 내리신 명을 받으십시오!”
문 밖에서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 것이 왔군. 들어오시게!”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조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한 명의 나이 든 환관이었다.
현 동창 제독 육환은 궁에서 자신의 밑에 있던 환관들을 동창으로 끌어왔다.
그들은 특별한 직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육환의 가장 측근들이었기에 동창의 누구도 이 환관들을 무시하거나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지금 조문을 찾아온 양위라는 자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조문은 씁쓸한 얼굴로 양위가 내민 서찰을 받아 들어 펼쳤다.
“이것은!”
서찰을 확인한 조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위혁이 무슨 일인가 하여 조문을 바라봤다.
“이것이 제독 각하의 뜻이오?”
“그렇소.”
환관 양위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조문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나 조문. 제독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내려주신 마지막 기회를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성공시키도록 하겠소이다!”
조문의 말을 들은 위혁 역시 얼른 바닥에 오체투지(五體投地) 했다.
육환이 그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자비나 용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육환은 자신의 손으로 죽이느니 한 번 더 써먹는 편이 이익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번에는 조문이 직접 움직여야 하리라.
물론, 그 끝에는 조문 또는 진운룡 둘 중 하나의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
대명호 사건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강호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여러모로 대명호 사건은 충격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정파 후기지수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남궁린이 다시 한 번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도 그렇고, 적의 괴수가 인간의 피를 흡수하여 힘을 증폭시키는 마공(魔功)을 사용한 것도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확실치는 않지만 그 배후에 동창이 있다는 소문마저 돌아 무림인들은 분노케 했다.
개중에는 관이 무림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움켜쥐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와 더불어 무림인들 입에 오르내린 가장 큰 화제 거리는 바로 진운룡에 대한 것이었다.
그동안 명문대파들이나 세가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을 뿐 일반 무인들은 진운룡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한데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당시 싸움을 직접 목격했기에 진운룡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더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궁린조차 한 수 접어야 했던 동창의 괴수를 마치 아이 다루듯 한 자.
겨우 이십 대에 불과한 나이에 등평도수(登萍渡水)와 호신강기를 사용하고, 십이천과 견줄 정도로 경천동지할 무위를 지닌 사내.
진운룡에 대한 소문 하나하나가 강호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항상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갈망하는 젊은 무인들은 물론 중견 고수들에게까지 진운룡이라는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진운룡을 직접 보기 위해 산동으로 향하는 청년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반면 남궁린의 위상은 그만큼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적의 손에 납치되는 굴욕을 겪은데 이어, 또다시 습격을 받아 진운룡이 아니었다면 자칫 적의 괴수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까.
모든 이가 다음 세대의 천하제일인이라 꼽던 그가 연달아 좌절을 겪은 것이다.
사람들은 흠집이 나 버린 보석을 보듯 남궁린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남궁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린의 모습은 전과 다름없었다.
결코, 조급해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명호 사건이 있은 사흘 후 드디어 남궁진천이 황보세가에 도착했다.
* * *
황보세가가 지진이라도 난 듯 들썩였다.
무림맹주이자 현 정도 무림 제일의 고수인 남궁진천 일행이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서른 명 정도의 규모로 단출했으나 그 면면은 대단해서 하나하나가 모두 무림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남궁진천을 비롯해 무림맹의 중추이자 군사인 제갈휘, 맹주를 호위하는 수신십좌(守神十座)의 수장 왕문과 그를 따르는 십좌, 개방의 태상장로이자 무림 십이천(十二天)의 한 명인 풍신(風神) 홍무생, 강호 삼대신의 중 한 사람인 천의(天醫) 곽도명, 화산파의 장로이자 현 화산 장문인 매화진인 임혁군의 사형인 조윤, 무당의 장문제자이자 남궁린과 함께 후기지수 중 제일을 다투던 무당신룡 운현, 그리고 무림오화 중 한 명이자 홍무생의 손녀로 스물하나의 나이로 여중제일권이라 일컬어지는 홍혜란이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맹주 남궁진천과 풍신 홍무생의 존재감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 못지않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끈 이가 있었는데, 바로 홍무생의 손녀인 무봉(武鳳) 홍혜란이었다.
그녀는 육 척이 넘는 큰 키에 탄력 있고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림오화에 들 정도로 미모 또한 출중해서 마치 광휘가 뻗어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같은 무림오화로 꼽히는 모용주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모용주란이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보석과 같다면, 홍혜란은 압도적이면서도 묘하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은 여인이었다.
미모 외에도 그녀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무공이었다.
여중제일권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어린 나이에 이미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그녀였다.
이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옥기린 남궁린, 무당의 운현과 함께 거의 수위를 다투는 실력이었다.
뛰어난 무공처럼 성격 또한 화통해서 어지간한 사내들을 압도하는 여장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