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64화 (64/150)

# 64

/혈룡전 3권 (64화)

5장 남궁진천 (2)/

가주인 황보혁군을 비롯 많은 이들이 대문 밖까지 나와 남궁진천 일행을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맹주. 풍신께서도 그간 별고 없으셨지요?”

황보혁군이 반가운 얼굴로 남궁진천에게 인사했다.

남궁진천은 이미 팔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외모는 고작해야 오십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반백의 머리. 고집스러운 입술과 깊은 눈매가 사람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반면 풍신 홍무생은 팔 척에 가까운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익살스러운 외모를 가진 노인이었는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여기저기를 연신 살피는 모습이 마치 개구쟁이 아이를 보는 듯 했다.

“우리 린이가 가주께 신세를 많이 졌구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리다.”

황보혁군의 인사에 답례한 남궁진천의 시선이 곧바로 손자에게로 향했다.

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똑똑하고 잘난 손주였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남궁린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죄를 청했다.

“내게 미안해할 것 없느니라. 나는 네가 이렇게 무사한 것만으로 되었다. 널 납치한 간악무도한 무리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하지 못한 것이 분할 따름이야.”

남궁진천이 따뜻한 눈으로 자신의 손주를 바라봤다.

평상시 철의 군주라 불리며 모든 무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에게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얼굴이었다.

“쯧쯧, 강호를 벌벌 떨게 하는 무림맹주라는 자가, 제 새끼 앞에서는 팔불출이 따로 없구만그래. 큭큭.”

홍무생이 눈을 흘기며 남궁진천을 놀렸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두터운 교분을 나눠 온 오랜 친우였다.

“손녀 자랑하는 자네만 할까?”

싫지 않은 얼굴로 남궁진천이 말했다.

“후후, 빼어난 미모면 미모, 성격이면 성격, 게다가 무공까지! 우리 혜란이야말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지! 암! 그렇고말고!”

팔불출 타령을 하며 남궁진천을 놀리던 그도 자신의 손녀 이야기에는 침을 튀겨 가며 열을 올렸다.

“남궁 오라버니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홍혜란이 맑은 목소리로 남궁린에게 인사했다.

두 사람은 조부들의 친분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오누이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고맙다.”

남궁린이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아, 글쎄. 네 녀석이 구출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혜란이 요것이 얼마나 보채던지, 나까지 덩달아 예까지 오게 되지 않았더냐?”

“다른 사람도 아닌 남궁 오라버니 일인데 당연하지요. 제가 아니면 누가 남궁 오라버니를 챙기겠어요?”

홍무생의 놀림에도 홍혜란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호, 홍 매…….”

남궁린이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데 오는 도중에 대명호에서 동창과 사건이 있었다 들었다만? 어떻게 된 일이냐?”

얼굴에 미소를 거둔 남궁진천이 정색하며 물었다.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정의 개가 감히 무림을 그것도 자신의 소중한 손자를 겁도 없이 건드리다니,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를 노린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일전에 소녀들 납치사건에 대한 복수로 진 공자를 노린 듯합니다.”

남궁린의 말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남궁진천이 눈을 크게 떴다.

“진 공자라면 너를 구해 준 진운룡이라는 청년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허허, 이런 정신 좀 보게. 너한테 정신이 팔려서 은인을 잊고 있었구나.”

남궁진천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흠, 흠, 이곳에는 자리하지 않았소이다, 맹주.”

황보혁군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직 한참 어린 진운룡이 무림의 큰 어른이 오는데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실례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괜찮소. 남궁가의 후계자를 구했으니, 가문의 은인일진데 오히려 내가 직접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해야 옳소이다. 지금 그 아이는 어디 있소?”

“크흠, 맹주 아무리 은인이라 하지만 이제 막 강호에 발을 디딘 신출내기에게 정도무림맹의 수장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모양새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화산의 장로 조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늘 맹주께서는 남궁가의 태상가주가 아닌 무림맹주의 자격으로 이곳에 오신 것이지 않습니까?”

군사 제갈휘가 조윤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런, 이거 너무 내 생각만 했군그래.”

남궁진천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오늘 황보세가에 온 용무는 자신의 손주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최근 산동에서 일어난 심상치 않은 사건들에 대해 직접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일단 안으로 드십시다. 수의각에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진 공자에겐 그리로 오라 전갈을 넣으면 되지 않겠소?”

황보혁군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황보가주 말대로 하는 게 좋겠소.”

남궁진천은 일행과 함께 황보혁군을 따랐다.

*   *   *

“무림맹주 남궁진천이 왔다는데 안 나가 봐도 되겠어요?”

“내가 왜?”

소은설의 물음에 진운룡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림맹주라고요! 무림맹주! 게다가 천하제일고수란 말이에요! 남궁 공자 때문에 일부러 방문한 것이니 아마도 그를 구한 진 공자를 만나 보고 싶어 할 거예요. 혹시 알아요? 큰 보상이라도 해 줄지?”

진운룡은 시큰둥한 얼굴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날 만나고 싶다면 직접 찾아오면 될 것 아닌가? 그리고 보상 따위는 어차피 필요도 없고.”

“허…….”

소은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크하하하! 역시 이 적산의 주인답소! 무림맹주에게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니. 크크크크!”

적산이 즐거운 듯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 역시 진 공자님은 화끈하십니다! 그깟 무림맹주가 별거입니까? 하하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아닙니까?”

구학이 이때다 하고 얼른 진운룡의 비위를 맞췄다.

진운룡의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에게는 이제 진운룡은 마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진 공자님!”

그때, 숙소 마당으로 황보영천이 나타났다.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부르러 온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수의각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회의가 있는데 공자께서도 참석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우시고 놈들을 직접 상대한 분이 진 공자가 아닙니까? 진 공자께서 겪으신 경험을 이야기해 주신다면 놈들을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운룡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황보영천이었기에 절대 남궁진천이 부른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황보영천이 이렇게 나오자 진운룡으로서도 억지로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요. 어차피 당신도 놈들을 잡아야 하잖아요? 서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소은설의 말에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운룡의 무공이 강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숨어 있는 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무공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한 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정보를 교환하는 편이 분명 나았다.

“진 공자께서도 놈들을 잡을 생각이십니까? 역시 공자께서는 의를 행하시는 데 앞장서시는 대인이십니다! 진 공자께서 나서 주신다면 놈들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황보영천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진운룡은 결코 강호의 안녕이나 의를 행하기 위해 놈들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혈신대법의 비밀을 밝혀 내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굳이 황보영천에게 그에 대해 설명해 줄 필요성은 없었기에 일단 오해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수의각이 어딘가?”

“아!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제야 자신이 이곳까지 온 목적을 떠올린 황보영천이 앞장서서 수의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황보세가 수의각(豎意閣).

족히 이백여 평은 됨직한 넓은 대전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대전 중앙 용좌에 자리하고 있는 인물 때문이었다.

남궁진천!

현 정도 무림의 일인자.

천산마교의 교주 하우광과 함께 십이천의 꼭대기에 있는 절대고수.

무림맹 맹주로 돌아온 그의 분위기는 자신의 손자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눈빛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절대자의 풍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놈들의 정체에 대해 짐작이 가는 것은 있소?”

남궁진천이 황보혁군에게 물었다.

남궁진천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손자인 남궁린의 안위였으나, 무림맹의 맹주로서 살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건의 배후에 있는 세력의 정체가 무엇인가였다.

제남까지 걸음을 재촉하면서 접한 정보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황포의원 방화로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무림인 납치, 피를 흡수하는 괴공을 사용하는 등 이대로 간과한다면 필시 강호의 근간을 흔들 만큼 위험한 암중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척 용의주도한 놈들이오. 사로잡은 졸개들의 경우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괴상한 금제가 걸려 있어서 이야기하기도 전에 모두 머리가 터져 죽고 말았소. 심지어 장원을 통째로 무너뜨려 증거나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리기까지 했소이다.”

황보혁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게다가 그 피를 흡수하는 기괴한 술법은…….”

단 하나의 진에 어지간한 중소문파 하나 정도는 쉽게 쓸어버릴 수 있는 비천대가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다.

특히 비천대는 은신과 잠입에 특화된 조직이다.

물론, 진운룡에 대한 호승심으로 인해 너무 서둘렀던 것도 있었으나, 그만큼 놈들이 사용한 술법이 무섭고 위력적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라 제가 들은 바로는 최근 제남 뒷골목에는 피가 빠져나간 시신들이 한꺼번에 다섯 구나 발견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놈들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신웅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순간, 홍혜란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누군가 경솔하게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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