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혈룡전 3권 (65화)
5장 남궁진천 (3)/
“피를 흡수해서 힘을 증폭시킨다? 군사는 이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때, 남궁진천이 조금은 무거운 목소리로 제갈휘에게 물었다.
“마교나 세외의 세력들 중에는 기이한 술법과 괴공을 사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흡정마공(吸精魔功)이라든지 동남동녀의 정기를 흡수해서 공력을 쌓는다든지 하는 것이지요. 또한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백여 년 전에 활동하던 밀교나 배교, 그리고 혈교가 인간의 피를 이용해 공력을 쌓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교나 세외 세력의 짓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긴가?”
“그렇진 않습니다.”
“어째서인가?”
“마교의 경우 흡정마공을 이미 금지마공으로 지정한 지 오래입니다. 사실 그들조차도 마공의 위험성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 흡정마공을 익힌 마인들은 그 마성을 이겨 내지 못해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피에 미쳐 날뛰었지요. 결국 더 큰 피해를 본 것은 마교였습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스스로를 다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런 것을 하우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에 와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다시 시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세외세력은 현재 그들끼리 영역 다툼을 하느라 중원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기야 세외는 지금 제 놈들끼리 피 튀기게 세력다툼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니 이런 일을 버릴 여유가 없겠지. 마교 역시 우리 애들이 계속 지켜보고 있지만 별 움직임은 없고 말이야.”
풍신 홍무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개방 태상장로의 말이다.
개방의 정보는 양도 양이지만 그 신뢰도, 즉, 정확성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당연히 누구도 반론이나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 사교의 잔당들이 음지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인가?”
남궁진천이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들의 유산을 발견한 다른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그 정도가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사교라……. 사실 우리 개방에서도 요즘 그쪽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긴 한데, 놈들이 워낙에 쥐새끼처럼 은밀해서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한 군데 의심이 가는 곳은 있지.”
홍무생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천사교 말이네. 자네들도 들어는 봤겠지? 요즘 사이비 종교가 백성들을 선동하고 민란을 일으킨다는 소문 말이야.”
“최근 우리 역시 그들에 대해 조사하던 차였소이다.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오.”
황보혁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터라 아무리 교도들을 잡고 족쳐도 대체 놈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심지어는 천사가 누구인지조차 아직 알아내지 못했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도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재밌지 않은가?”
홍무생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교주는 곧 그 종교의 얼굴이다.
종교에서 교주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종교는 신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신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지를 못한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교주와 성직자다.
그들은 신의 대리인이며, 현세에 강림한 신의 사자다.
신을 대신하여 교도들이 직접 보고 믿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한데, 교도들조차 교주의 정체를 모른다니 상식과는 전혀 어긋나는 일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일반 백성들도 천사교에 들어가면 천사의 은총으로 순식간에 무림고수가 된다고 하오. 실제로 민란을 일으킨 무리 중 얼마 전까지 농사만 짓던 이들이 갑자기 이류 이상의 무인으로 탈바꿈한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되었소.”
황보혁군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을 단 몇 달 만에 이류 무사로 둔갑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번 사건에 나타난 적들이 피를 흡수해서 무공을 갑자기 늘렸다는 것을 보면 천사교가 그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겠구려.”
화산 장로 조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번 대명호에서 린이를 습격한 자들의 수괴(首魁)도 피를 흡수하는 괴술법을 사용했다 하지 않았소?”
남궁진천의 물음에 황보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하지만 놈은 동창이라 들었는데? 그렇다면 천사교와 동창이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군.”
남궁진천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린이 네가 직접 겪어 봤으니 잘 알겠구나? 어떠하더냐?”
“둘 다 피를 흡수하는 마공을 사용하긴 했으나, 무공은 전혀 달랐습니다. 게다가 대명호를 습격한 자들의 태도로 보아 방염과는 서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흠……. 사교의 무리와 동창이라…….”
두 세력이 연관이 있을 경우든, 그렇지 않을 경우든 어쨌든 그들의 움직임이 강호에 위협이 되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교라…….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예전에 오지랖 넓던 사부께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혹시 혈마라고 들어 봤나?”
홍무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혈마? 백 년도 훨씬 전에 강호를 피로 물들였다는 그 대마두 말인가?”
남궁진천이 이채를 띤 얼굴로 물었다.
혈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었다.
당시 무림이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명문대파들 중 몇몇은 아직도 그때의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곳도 있었다.
“그래, 그 혈마 말이야.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자를 추종하던 마인들이 흡혈마공을 사용했다고 하더군.”
“그러고 보니…….”
남궁진천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설마 놈들이 혈마를 추종하던 세력의 후예들일 가능성도 있단 말입니까?”
황보혁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혈마를 따르던 혈교의 무리가 다시 세상에 나오려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자칫 백삼십여 년 전 혈사가 되풀이 되기라도 한다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행여 또 다른 혈마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무림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도 혈마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면 전 무림은 피에 잠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혈마의 능력은 가공스러웠고,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설마 혈마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홍무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사라진 이후로 혈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생사가 확인된 것도 아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동안 잠적해 있던 혈마가 다시 세상에 나오려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물론, 당시 혈마의 나이가 오십이 넘었고, 이미 백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이면 이백 살에 가까운 나이일 것임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실 그때 혈마에 대한 이야기는 의문점들이 많습니다.”
제갈휘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시 벌어졌던 사건의 규모에 비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얼마 되지 않지요. 각 문파의 수장들이 함구하기로 결의를 했기 때문인데, 아마도 자신들의 굴욕스러운 역사를 숨기고 싶었던 이유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해도 혈마에 대한 정보는 너무 적습니다. 게다가 강호를 뒤흔들다시피 했던 대마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혈교의 추종세력 역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기록이 없지요. 마치 누군가 아니 무림 전체가 혈마와 혈교가 존재했다는 흔적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남궁진천과 홍무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혈마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서만 전해질 뿐, 그 외에 혈마나 혈교의 행적이나 그 정체에 대해서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그저 마인들이었고 흡혈마공을 사용했다는 정도가 알려진 전부였던 것이다.
혈마가 죽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사라졌다.
즉,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미리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혈마의 종적을 추적하는데 전 강호가 총력을 다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한데, 오히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은폐하고 혈마라는 존재를 이미 없는 사람인 것 마냥 취급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응이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혈마가 죽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종 세력 역시 마찬가지지요.”
“맞아. 이 늙은이도 그래서 이번 사건을 듣고 흡혈마공을 떠올린 것이야.”
홍무생이 제갈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혈마라…….”
남궁진천의 미간에 주름이 일었다.
그때였다.
“진 공자를 모셔 왔습니다.”
황보영천이 진운룡을 데리고 수의각으로 들어왔다.
수의각 안의 모든 시선이 순식간에 진운룡에게로 집중되었다.
진운룡의 이름은 각 문파의 수뇌부들 사이에 최근 들어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암중 세력의 정체가 드러난 것 역시 진운룡 때문이었고, 남궁린을 비롯 납치된 무인들과 소녀들을 구한 것도 그였다.
진운룡을 바라보는 황보세가 무사들의 눈빛에는 경외감마저 담겨 있었다.
“허……. 이거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어리지 않은가? 게다가 무인이라기보다는 기생오라비 같은 저 이쁘장한 외모하며…….”
홍무생이 흥미로운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평상시에도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그답게 표정에 진한 호기심이 담겨져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운룡이라 합니다.”
진운룡은 비교적 공손하게 남궁진천과 일행에게 인사했다.
이왕 협력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굳이 분란을 만들 이유는 없었기에 일단은 적당히 예의를 차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화산파 장로 조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남궁진천은 깊이 침잠한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대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남궁진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놀랍군. 나로서도 그대의 경지를 파악할 수 없다니…….”
충격적인 이야기에 대전이 술렁거렸다.
“허…… 천하의 남궁진천이 경지를 파악할 수 없다?”
홍무생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남궁진천의 자타가 공인하는 정파 제일의 고수.
이미 현경을 넘어선 그가 경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진운룡이 무언가 특수한 수단으로 자신의 경지를 감추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남궁진천과 동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소리에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아마도 첫 번째 경우일 것이라 짐작했다.
진운룡이 특수한 방법으로 자신의 경지를 숨기고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남궁진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제가 익힌 무공이 좀 특수해서 일반적인 기운과는 다른 터라 그럴 것입니다.”
굳이 실력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진운룡이 대충 둘러 댔다.
예전 경험으로 인해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드러낸 신위만 해도 모두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십이천이나 각 문파의 은거 기인들이라면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는 능력들이었다.
하지만 진운룡의 진정한 실력이 드러난다면 상황은 변할 것이다.
‘두려워서 잡아먹으려 들 테지.’
오랜 기억이 떠오른 진운룡이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