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혈룡전 3권 (67화)
6장 홍혜란 (1)/
수의각을 나선 남궁진천과 풍신 홍무생은 남궁진천의 거처에서 따로 자리를 가졌다.
“자네는 진운룡이라는 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궁진천의 물음에 홍무생이 씨익 웃었다.
“재밌는 놈이야.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어. 건방진 듯하면서도 아주 싸가지가 없는 것은 아니고, 마치 노회한 늙은이처럼 목소리나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어. 자네 손주 녀석도 대단하지만, 진운룡에 비하면 한참 부족할 정도야.”
“자네는 그 나이에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보나?”
남궁린이 의구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하기야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나? 과거 천마신교를 세운 천마라든지 소림의 신승으로 추앙받던 혜공 대사의 경우 스무 살에 화경의 경지를 돌파했지.”
“그것은 전설에 불과하지 않나? 최근 백 년 동안, 아니 이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 아이와 같은 자는 없었어.”
“또 다른 전설이 우리 시대에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혹여 자네는 그 아이에 대해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가?”
“만일 말일세…….”
잠시 뜸을 들이며 망설이던 남궁진천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 아니, 그자가 나이 보다 어려 보이는 것이라면?”
홍무생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하하, 자네 혹시 그 아이가 반로환동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남궁진천이 아무 말 없이 홍무생을 쳐다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로군! 허, 그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반로환동은 그야말로 이야기거리에 불과해. 무림 역사에 실제로 반로환동을 한 고수가 존재하던가? 그 대단하던 천마조차도 사십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어. 한데, 이십대의 외모로 반로환동을 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자네도 환골탈태를 겪어 봐서 알겠지만, 경지를 넘어서서 젊어지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사실이 그러했다.
환골탈태를 겪은 남궁진천이 본래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 봐야 오십대 정도였다.
물론, 이미 그의 나이가 팔십을 훌쩍 넘겼음을 생각한다면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남궁진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너무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다고 여겨졌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 그 녀석을 좀 지켜볼까 하네. 뭔가 재밌는 냄새가 솔솔 나거든? 큭큭큭.”
홍무생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킥킥대며 웃었다.
그는 본래 흥미를 끄는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찰거머리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었다.
이번에는 진운룡이 그의 목표가 된 것이다.
“쯧쯧, 그 버릇이 또 도졌구만…….”
남궁진천은 혀를 차며 속으로 진운룡의 명복을 빌었다.
* * *
남궁진천은 이튿날 진운룡을 따로 찾아 손자 남궁린을 구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후 바로 일행과 함께 무림맹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풍신 홍무생만은 그대로 황보세가에 남았다.
천사교에 대한 조사를 진두지휘한다는 명목이었다.
물론, 그것도 이유이긴 했으나, 홍무생의 진정한 관심사는 바로 진운룡이었다.
한편, 홍혜란은 역시 조부를 따라 황보세가에 남았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남궁린의 처소를 찾았다.
“늦었군. 밤새 네 탐스러운 육체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평상시와 달리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남궁린이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진한 욕정이 담겨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함께 오셨는데 밤에 오라버니를 찾을 수는 없잖아요?”
홍혜란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간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은 듯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태도였다.
“그 말이 맞긴 하군. 어쨌든 이제 어젯밤 못 이룬 회포를 풀어 볼까? 후후.”
남궁린이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천천히 홍혜란에게 다가왔다.
“당분간 자중하라 일렀거늘 자기 자신조차 제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하제일인이 되려는 거죠?”
순간, 홍혜란의 싸늘한 목소리에 남궁린이 움찔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소리야?”
약간 짜증이 밴 얼굴로 남궁린이 물었다.
“피가 빨려 나간 시체들, 오라버니 짓이죠?”
남궁린의 표정이 변했다.
“맞군요.”
당황한 얼굴로 남궁린이 급히 변명을 했다.
“그, 그것은 갈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제남 뒷골목에서 발견된 시체가 남궁린의 짓이라는 이야기다.
홍혜란의 고운 아미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어리석군요! 피를 마신 것은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피의 권능을 얻은 이의 권리니까요. 하지만 흔적을 남긴 것은 오라버니답지 않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에요!”
“휴…….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씁쓸한 얼굴로 남궁린이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실수였다.
아무래도 첫 흡혈이었던 터라 그에게는 너무도 생소하고 이질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머릿속을 온통 뒤집어 놓던 진한 피 냄새.
몸으로 흡수되는 새빨간 선혈(鮮血)들.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여인과 몸을 섞는 것보다 몇 배나 자극적이고 황홀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극한의 흥분과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 이후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섯 구의 시체가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었고, 남궁린의 온몸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사람들이 오는 기척에 정신없이 달아났고, 옷을 훔쳐 갈아입은 후 간신히 세가로 돌아왔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정도 감정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오라버니는 피의 권능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일단은 오라버니 말대로 처음이라 그랬을 것이라 믿을게요. 하지만 결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 돼요.”
“나도 알고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남궁린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남궁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홍혜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저도 오라버니를 믿어요.”
방금 전까지 방 안을 싸늘한 한기로 가득 채우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진운룡이란 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혹시 그동안 그자에 대해 알아낸 것은 있나요?”
“몇 가지 재밌는 이야기들이 있지.”
굳었던 남궁린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오라버니가 그리 말씀하시니 무척 기대되는군요.”
“기대해도 좋아. 제법 놀라운 이야기니까 말이야.”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던 남궁린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진운룡이 강호에 나오기 전 행적에 대해 밝혀진 것이 전혀 없지?”
홍혜란의 두 눈에 이채가 일었다.
“알아냈다는 말인가요?”
남궁린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놀라지 말라고. 놈은 바로 혈귀곡에 있던 자야.”
홍혜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혈귀곡이라면 무림 사대 금지 중 하나인 그 혈귀곡을 말하는 것인가요?”
“맞아.”
자신 있는 어조로 남궁린이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혜란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림 사대 금지가 왜 금지라 불리는가.
그것은 출입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무인들과 양민들이 사대 금지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중에는 사대금지를 자신의 손으로 깨뜨리겠노라 호기롭게 도전한 이름 높은 고수들도 상당수 있었다.
아직까지 사대 금지는 단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을 허용치 않았다.
그러니 진운룡이 혈귀곡에서 나왔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확실한 정보인가요?”
홍혜란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놈과 가까이 지내는 하오문에서 나온 정보이니 거의 확실해.”
홍혜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무림 사대 금지 중 하나인 혈귀곡이 깨졌고, 그 장본인인 진운룡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전 강호가 술렁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사대 금지―무림의 가장 극악한 죄수들을 가둬 놓은 해남의 지옥도는 다른 세 곳과는 성격이 전혀 다름으로 논외로 한다―에는 어마어마한 보물, 혹은 고금 제일의 무공비급과 기물들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자들이 상당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일리가 있는 것이 사대금지는 대부분 인위적인 진법이나 기관, 술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무언가를 지키거나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철통같은 보호를 하는 것인가.
게다가 진운룡의 경의로운 무공 실력은 이런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진운룡이 혈귀곡 안에 숨겨진 비급을 얻었다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사대 금지 중 하나가 깨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온 무림이 들끓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들려온 남궁린의 충격적인 한마디가 지금까지 홍혜란의 생각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더 놀라운 일은 말이지 혈귀곡을 빠져나온 자가 진운룡 하나가 아니라는 거야.”
“무슨!”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져 있었다.
“진운룡이 혈귀곡을 빠져나올 때 한 사람이 함께 나왔거든. 혹시 홍 매는 누구인지 짐작하겠어?”
남궁린은 득의 어린 얼굴로 홍혜란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겼다.
“설마!”
홍혜란은 갑자기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언제나 진운룡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던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대체 그 인물과 진운룡의 연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궁린이 말한 대로 두 사람이 혈귀곡을 함께 빠져나왔다면 모든 것이 말이 된다.
“그래. 그 설마가 정답이야.”
“소은설!”
홍혜란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진운룡과 함께 혈귀곡을 함께 빠져나온 사람이 바로 소은설이었던 것이다.
그간 의문들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왜 진운룡 같은 이가 하오문을 돕는 것인가?
또 소은설처럼 평범한 여인이 어떻게 진운룡과 함께하는 것인가.
모든 것이 설명이 됐다.
“초진도라고 알고 있나?”
남궁린의 목소리에 홍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초가장에서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군요.”
조직이 처음 입은 피해였다.
“아마 그때 소은설이 초진도의 수하들에게 쫓겨 혈귀곡에 빠졌던 모양이야.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그 안에서 진운룡을 만나서 함께 탈출했다고 하는군.”
“혹시 혈귀곡을 빠져나온 다른 생존자들은 없었나요?”
“오직 둘뿐이야. 무척 신기한 일이지.”
무공도 변변치 않은 소은설이 혈귀곡에 갇혀 있던 진운룡을 꺼내 줬다고 보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이니, 초진도의 수하들에게 쫓겨 혈귀곡에 빠진 소은설을 진운룡이 데리고 빠져나왔다고 보는 게 맞았다.
지금 진운룡이 보여 주는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가만!’
그때 홍혜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모든 정황을 볼 때 진운룡은 애초에 혈귀곡에 있었다는 이야기잖아?’
진운룡 같은 강자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혈귀곡에서 나왔다는 것.
두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최소한 상당한 시간 진운룡이 혈귀곡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혈귀곡에 머물러 있던 그자가 왜 이제야 빠져나왔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었다.
첫째, 몇몇 무림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혈귀곡 안에 고금제일의 무공이 숨겨져 있어 그것을 이제 완성했고, 마침 그때 소은설이 혈귀곡에 들어와 함께 빠져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지금 진운룡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아주 어린 시절 혈귀곡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이 존재한다.
무공을 얻기 위해 강호의 수많은 고수들이 혈귀곡에 들어갔으나 그중 성공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한데, 그것을 어린아이가 이루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정은 바로 또 다른 소문에 근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