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68화 (68/150)

# 68

/혈룡전 3권 (68화)

6장 홍혜란 (2)

혈귀곡엔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혈귀가 살고 있다.

혈귀곡 근처에서는 피가 빠져나간 시신들이 발견되곤 했다.

“만일 진운룡이 혈귀곡의 유일한 생존자가 아니라 혈귀 본인이라면!”

홍혜란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운룡이 혈귀? 그러고 보니…….”

남궁린이 이채를 띤 얼굴로 홍혜란을 바라봤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혈신대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요.”

혈귀가 혈신대법을 받은 자라면 말이 된다.

“오 사령의 이야기로는 진운룡이 혈마에 대해서도 물었다고 들었어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혈마 역시 피의 권능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놈이 혈마와 연관된 자일 가능성도 있군!”

남궁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의문점은 왜 소은설을 구해서 함께 세상에 나왔는가예요.”

만일 진운룡이 혈귀라면 곡에 들어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소은설을 살려 줬을까.

하오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소은설은 그저 산동 변두리 분타주의 딸에 불과했다.

하오문에 그다지 영향력이 없었다.

“그 계집에게 무언가 효용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지.”

“흐음……. 어쨌든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를 알아내면 진운룡의 정체 역시 자연히 풀리게 될 거예요.”

“후후, 그렇다면 내가 한 번 그 계집에 대해 알아볼까?”

남궁린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

“오라버니가요?”

“그래. 왠지 재밌을 것 같군.”

“호호호. 그것도 좋겠군요. 오라버니라면 충분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예요.”

옥기린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궁린이 소은설과 가까워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꼭 소은설을 유혹한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편안하고 가까운 사이만 되어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정도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이자 무림맹주의 손자인 남궁린의 손길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럼 진운룡에 대한 일은 일단 접어 두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라버니 말대로 진하게 회포를 풀어 볼까요?”

홍혜란이 교소를 지으며 길고 가느다란 팔로 남궁린의 단단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바라던 바야!”

남궁린이 거칠게 홍혜란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은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와 열기로 가득 찼다.

*   *   *

제갈무진은 무척 화가 났다.

무림맹주 남궁진천이 진운룡에게 직접 고마움을 표시하고, 크게 치하했다는 것만 해도 열이 받는 상황인데, 분위기를 보니 앞으로 진운룡이 맹의 천사교에 대한 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운룡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왜 그를 증오하게 되었는지조차 명확치 않았다.

어떻게 보면 괜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었다.

둘째라는 이유로 별 볼 일 없는 형에게 밀려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세상 모든 천운을 다 타고난 것 같은 진운룡과 비교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 이유야 어찌 됐든 진운룡에 대한 증오는 이제 당연한 감정이 되어 버렸다.

제갈무진을 더욱 열 받게 만드는 것은 바로 모용주란이었다.

그날 이후로 모용주란은 자신을 마치 벌레 보듯 하고 있었다.

물론, 모용주란의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갈무진은 결코 남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자가 아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날 일은 자신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옷을 벗고 달려든 모용주란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내가 모용주란 같은 절세의 미녀가 알몸으로 달려드는데 목석처럼 물리칠 수 있을까.

해서 제갈무진은 나름 모용주란과의 관계를 좋게 풀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모용주란은 애초에 그에게 다가설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제갈무진의 머릿속에는 아직 모용주란의 탐스러운 육체와 그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고, 심장은 달아올랐다.

지금이라면 다시 그녀를 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강제로라도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어!”

인내심이 바닥이 난 제갈무진은 곧장 모용주란의 처소로 향했다.

모용주란의 방은 제갈무진의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방에는 모용세가에서 데려온 시녀 하나가 함께 있을 뿐 특별한 경계는 없었다.

“크흠, 모용 소저, 나 제갈무진이오!”

잠시 심호흡을 한 번 내쉰 제갈무진이 방문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제갈무진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모용주란이 방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데,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안에 있는 것 다 알고 있소! 잠시 이야기 좀 나눕시다!”

제갈무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에게 볼일이 없으니 돌아가세요!”

그제야 모용주란이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흥!”

덜컹!

코웃음을 친 제갈무진이 막무가내로 모용주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신,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요!”

모용주란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 옆에는 열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시녀 하나가 겁먹은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너는 잠시 자리 좀 비키거라!”

제갈무진이 시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아, 아씨…….”

시녀가 안절부절 못하며 모용주란의 눈치를 봤다.

모용주란이 눈가를 파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당장 꺼지거라!”

제갈무진이 살기를 뿜어내자 시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막 나가자는 건가요?”

모용주란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흥! 지금 내 눈에는 어차피 뵈는 게 없소!”

“아악!”

제갈무진이 씩씩대며 시녀의 머리채를 잡아 방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이익…….”

모용주란이 분노에 온몸을 떨었다.

“그러기에 진즉에 날 받아들였으면 이런 수모를 겪을 필요도 없었지! 후후후.”

제갈무진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모용주란에게 다가갈 때였다.

“지금 뭐하는 건가요? 제갈 공자?”

문 밖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제갈무진의 동작을 멈춰 세웠다.

제갈무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모용 동생 얼굴이나 볼까 해서 찾아왔더니 이게 무슨 난장판이죠? 모두 당신 짓인가요?”

방 밖에는 홍혜란이 한기를 풀풀 뿜어내며 서 있었다.

제갈무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이 완전히 어긋나 버린 상황이었다.

홍혜란은 여인이지만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고수.

게다가 그의 조부이자 십이천 중 한 명인 홍무생이 현재 황보세가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그녀와 사건이 생긴다면 자신은 목숨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었다.

제갈무진은 즉시 표정을 부드럽게 바꿨다.

“오, 오해요, 홍 소저! 모용 소저와 담소를 나누려 하는데, 어린 시비가 주제도 모르고 방해를 해서 나도 모르게 화를 낸 것이오!”

급히 변명을 만들어 냈으나, 너무 빤했다.

하지만 어차피 홍혜란이 믿어 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현 상황을 벗어날 수 있기만 하면 되었다.

아직 그는 모용주란에게 아무런 위해도 입히지 않았기에 적당히 둘러대기만 해도 홍혜란이 더 이상 추궁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제갈 공자의 말이 사실이야?”

홍혜란이 모용주란에게 물었다.

모용주란은 속으로 분노를 삼켰다.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밝히고 싶었지만, 그것은 제갈무진뿐만 아니라 그녀도 함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맞아요. 야, 약간의 오해가 있었어요.”

모용주란이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채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홍혜란은 제갈무진에 대한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

얼핏 보아도 모용주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용주란 스스로가 괜찮다는데 그녀가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흠, 흠, 오늘은 분위기도 그렇고 내가 욱하는 마음에 실수를 한 것도 있고 하니 이만 가 보겠소. 모용소저 다시 한 번 사과드리오.”

제갈무진은 모용주란에게 어색한 사과를 한 후 황급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제갈무진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홍혜란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란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저자가 어찌 이토록 무도한 짓을 벌인 거지? 게다가 너는 왜 저자를 감싸 주고?”

모용주란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혜란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런 모용주란을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사연이 있음을 짐작한 것이다.

“네가 말하기 싫다면 더 이상 묻지 않을게.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자가 또 언제 네게 해코지를 할지 몰라. 좀 더 경계를 강화하든지, 아니면 빨리 세가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아직 세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모용주란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대로 세가로 돌아간다면 도망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당한 것은 자신인데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허겁지겁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반드시 제갈무진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에게 그럴 방법과 힘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힘이 닿는 한 최대한 도와줄게.”

홍혜란이 모용주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모용주란은 기어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마워요…….”

한동안 모용주란을 다독인 후 홍혜란은 다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있군. 잘만 이용하면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어.”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   *

“흐읍…….”

소은설이 교성에 가까운 신음을 터뜨렸다.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 피를 뽑히는 그녀였지만, 이 야릇한 느낌만은 결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 끝났다.”

진운룡의 목소리에 소은설이 머쓱한 얼굴로 눈을 떴다.

“어쩐지 즐기는 것 같은데?”

진운룡이 장난스런 얼굴로 말했다.

“무, 무슨 소리예요! 생피가 뽑혀 나가는 걸 즐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흠…….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던데?”

“아! 진짜! 엉뚱한 소리 하지 말아요! 자꾸 그러면 콱, 그냥, 다음부터 계약이고 뭐고, 피 한 방울 구경도 못할 줄 알아요!”

당황한 소은설이 소리를 빽 지른 후 황급히 진운룡의 방을 뛰쳐나왔다.

소은설은 얼굴이 벌게진 채 잰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람이 갈수록 더 이상해진다니까!”

그녀는 달아오른 볼을 감싸며 투덜댔다.

“누가 말입니까?”

“엄마야!”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란 소은설이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갑작스레 나타나 소저께서 놀라신 모양이군요.”

소은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남궁린이 서 있었다.

“나, 남궁 공자?”

뜻밖의 만남에 소은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궁린이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할 이유가 별로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거 대명호 이후로 오랜만에 뵙는군요. 사실 그때는 워낙에 정신이 없었던 터라 서로 인사도 제대로 못했지요.”

대명호에서는 사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하륜이 공격을 해 왔기 때문에 그저 통성명만 한 정도였다.

“사실 진 공자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고 어떤 분이실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아, 네…….”

소은설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신분의 차이가 큰 남궁린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 상황이 왠지 현실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는 자신 때문이 아닌 진운룡 때문임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히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진 공자와 함께 다니시는 것을 보면 두 분이 보통 관계가 아니신 듯합니다?”

그때, 남궁린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무슨 그런 엉큼하고 능구렁이 같은 인간과……. 아,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하여간 절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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