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혈룡전 3권 (69화)
6장 홍혜란 (3)
당황한 소은설이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대리석 돌판 모서리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궁린이 재빨리 소은설의 손목을 낚아챘다.
“허억!”
소은설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고, 고마워요, 남궁 공자. 제가 좀 덜렁거리는 편이라. 하하하.”
소은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남궁린을 바라봤다.
한데, 남궁린은 소은설의 손목을 잡은 채 석상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소은설의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은설의 손목에는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상처가 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상처였다.
‘이것은!’
남궁린의 심장이 터질 듯 방망이질 쳤다.
방금 전 소은설의 손목을 잡았을 때, 상처로부터 한 방울의 피가 그에게 빨려 왔다.
순간, 하마터면 그는 그대로 소은설의 피를 모조리 흡수할 뻔했다.
하지만 홍혜련의 경고도 있었고, 흡혈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피에 대한 갈증이 그다지 크지 않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소은설의 피가 남궁린에게 흡수된 순간 그는 온몸에 전율과 함께 무언가 청아한 기운이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첫 흡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남궁린이 소은설의 피를 흡수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던 이유도 사실 그 기운 때문이었다. 그 기운이 남궁린의 정신을 맑게 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흡수한 다섯 명의 피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대체……….’
그의 가슴에서 다시 소은설의 피를 흡수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하지만 그 욕망은 맑은 정신에 의해 곧 제지되었다.
‘뭐지? 두 번째라 다른 것인가?’
남궁린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이미 흡혈을 경험했기에 좀 더 냉정하고 차분하게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해.’
흡혈을 했는데 청아한 느낌이 들다니…… 그것은 홍혜란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흡혈은 항상 광기와 마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가 받은 피의 권능은 반쪽짜리였다.
이대로 흡혈을 계속한다면 광인이 되어 이지를 잃고 만다.
그런데 이토록 명료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궁 공자. 아, 아파요, 이제 그만 놔주세요.”
소은설의 목소리에 남궁린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남궁린은 급히 소은설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사과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공자가 아니었으면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뻔했잖아요. 하하…….”
소은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상황이 어쩐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제가 다시 한 번 진 공자와 모시도록 하지요.”
남궁린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곧장 홍혜란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은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남궁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남궁린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에 도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의아한 일인데,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황급히 떠난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무슨 일이야?”
그때 들려온 구학의 목소리에 소은설이 정신을 차렸다.
구학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남궁 공자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혹시 남궁 공자가 너한테 관심이라도 있데?”
말똥말똥한 눈으로 질문 세례를 퍼붓는 구학을 보며 소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경 꺼요. 확! 그냥, 적 공자한테 한 마디 하기 전에!”
“무, 무슨 소리! 저, 절대 안 돼! 나, 나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저, 절대 그 야차 같은 인간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응? 알았지?”
구학이 도망치듯 횡 하니 모습을 감췄다.
* * *
“홍 매!”
기별도 없이 자신의 숙소로 쳐들어온 남궁린을 보며 홍혜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인 거죠?”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해 있음을 깨달은 남궁린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네게 긴히 물어볼 것이 있어.”
남궁린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홍혜란이 방문을 닫았다.
아무리 흡혈로 인해 감정의 기복이 심한 상태라지만, 남궁린이 이 정도로 흥분한 것에는 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말해 보세요.”
“방금 소은설을 만났는데…….”
홍혜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계획했던 대로 남궁린이 소은설에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한데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무언가는 진운룡이 소은설과 함께하고 있는 이유일 수도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남궁린이 말을 이었다.
“우연히 말이지…… 그녀의 피를 흡수하게 되었는데…….”
“뭐라고요!”
홍혜란이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남궁린을 노려봤다.
소은설의 피를 흡수하다니, 그토록 자제하라고 주의를 줬건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사고를 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은설의 피를 흡수하다니, 대체 오라버니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흥분하지 말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남궁린이 홍혜란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단지 의도치 않게 한 방울의 피가 흡수되었을 뿐이야. 그녀는 아무 탈 없이 무사하니 걱정 하지 마.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니까.”
홍혜란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남궁린의 말은 곧 흡혈을 중간에 그것도 시작하자마자 멈췄다는 이야기였다.
“단지 한 방울만 흡수했다? 그 말을 저 보고 믿으라는 이야기인가요?”
홍혜란이 아직은 의문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피의 권능을 받은 지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남궁린이었다.
지금은 흡혈의 욕구가 그의 정신과 육신을 모두 지배할 때.
아무리 대단한 자라 해도 처음 한 달 동안은 스스로를 통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홍혜란 역시 처음 대법을 받았을 당시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했다.
물론, 다행히도 그녀는 한 달 동안 세상과 격리된 채 체계적으로 욕구를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기에 큰 사고 없이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얼마 전 남궁린이 다섯 명의 피를 흡수하고 골목에 방치한 사건 역시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다.
한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피를 한 방울만 흡수하고 멈춘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물론 믿어지지 않겠지. 사실 나도 그 때문에 너한테 이렇게 달려온 것이니까. 문제는 그녀의 피였어!”
“소은설의 피?”
“그래!”
소은설의 피가 흡수되었던 순간을 떠올리자 남궁린은 다시 묘한 흥분에 빠졌다.
그것은 일반적인 갈증이나 욕망, 중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편안함, 안도감, 아기가 엄마 품을 갈망하듯 소은설의 피를 통해 다시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몽롱해 보이는 남궁린의 모습을 보며 홍혜란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말해 봐요!”
홍혜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남궁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처음 그녀의 손목에서 우연히 핏방울이 내 손에 묻었는데,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는 흡혈의 욕구가 머리를 가득 채웠지. 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것은 마, 마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끈적끈적한 찌꺼기들이 말끔히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어. 갑자기 광기와 욕망이 눈 녹듯이 흩어져 버리고 의식이 너무나도 명료하고 또렷해진 거야!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 뭐랄까……. 온몸이 행복으로 가득 찬 느낌? 처음 흡혈 때 느꼈던 희열과는 전혀 다른 더 강력한 감정이었어.”
남궁린이 환희에 찬 얼굴로 말했다.
홍혜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피를 흡수했는데 오히려 욕망이 사라졌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번이 두 번째라 다른 것은 아니겠지?”
남궁린의 질문을 무시한 채 홍혜란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봐도 소은설의 피가 다른 이들과 다른 것이 분명했다. 그 피가 남궁린의 욕망과 광기를 흩어 버렸거나 소멸시킨 것이다.
“가만!”
그녀의 눈에 빛이 일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이 되는군!”
왜 진운룡이 소은설과 함께 혈귀곡을 나왔는지, 그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을 돕고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 것이다.
“그 피 때문에 진운룡이 소은설을 데리고 다닌다는 건가?”
머리가 나쁘지 않은 남궁린도 소은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들어맞아요. 진운룡이 혈귀라는 사실도 더욱 확실해지고요.”
소은설의 특별한 피가 두 사람이 함께하는 이유라면 결국, 진운룡은 그녀의 피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즉, 진운룡 역시 흡혈을 한다는 이야기다.
혈귀곡에서 머무는 흡혈하는 존재라면 소문의 혈귀와 딱 들어맞았다.
“맞아! 그러고 보니 소은설의 손목에 아주 작은 상처가 있었어! 사실 내가 피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상처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때, 그녀는 진운룡의 숙소 쪽에서 나오고 있었거든!”
남궁린이 손뼉을 치며 탄성을 터뜨렸다.
아마도 손목의 상처는 진운룡이 그녀의 피를 흡수한 흔적임에 틀림없었다.
“후후후, 드디어 놈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되었군!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고작 숨어서 피나 빨던 귀신 나부랭이란 말이지?”
남궁린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쩌면 놈도 피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몰라요.”
“하기야 그렇다면 그 경천동지할 능력이 말이 되지! 놈도 혈신대법을 받은 거야. 그래서 그런 능력들을 갖게 된 거지!”
쾌재를 부르던 남궁린이 갑자기 의문스러운 얼굴로 홍혜란에게 물었다.
“한데 대체 놈이 무슨 수로 혈신대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 주인께서 놈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리는 없고, 놈이 어떻게 대법에 대해 알고 피의 권능을 사용하는 거야?”
“동창 녀석도 피의 권능을 사용했다고 들었어요. 또 다른 자가 존재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요. 당신도 들어서 알겠지만 할아버지 말로는 예전에 혈마라는 대마두 역시 흡혈을 통해 힘을 얻었다고 해요. 무림맹에서는 우리를 혈마의 잔당들이라고 보고 있잖아요? 동창의 그놈들이나, 진운룡 그자야말로 혈마의 잔당일 수 있죠.”
“난 오로지 주인께서만 피의 권능을 내려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순간, 홍혜란이 살기를 뿜어냈다.
“감히 주인을 의심하는 건가요! 죽고 싶은 모양이군요!”
“아, 아니 나는 단지…….”
남궁린이 급히 변명을 했으나 홍혜란의 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피의 권능은 가짜예요. 진정한 혈신대법을 펼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주인뿐이에요! 그분이 내려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믿음과 충성을 바쳐야 해요!”
사실 사령들을 비롯한 이들이 받은 혈신대법은 완전치 않은 것이다.
진정한 혈신대법은 수많은 생명과 피, 그리고 여러 가지 희귀한 재료들이 필요했다.
또한 진정한 혈신대법은 오로지 그들의 주인만이 펼칠 수 있다.
진정한 혈신대법의 위력은 지금 그들이 받은 피의 권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불멸, 불사의 육신이 됨은 물론, 신에 가까운 능력을 얻게 된다.
전설의 혈마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진정한 혈신대법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에게 충성하고 대계(大計)를 이루는 데 공헌한 이들만 주인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
“무,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어. 잠시 내가 실성이라도 한 모양이야. 홍 매도 내가 얼마나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잖아?”
그제야 홍혜란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어찌 되었든 소은설이 진운룡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만은 확실해졌군요. 물론, 그녀는 이제 우리에게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어요.”
소은설의 특이한 피에 대해 주인 관심을 가질 것은 자명했다. 당연히 소은설을 주인에게 데려간다면 홍혜란에 대한 신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소은설을 빼 와야겠군.”
남궁린의 말에 홍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하지만 그 계집은 어차피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어요. 문제는 진운룡이에요. 소은설이 놈의 약점임이 드러난 이상 이 기회를 이용해 놈을 제거해야 해요.”
홍혜란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후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 계집을 이용해 놈을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인가?”
기재 소리를 듣던 남궁린답게 금방 홍혜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소은설을 납치한 후 진운룡을 미리 준비한 함정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맞아요. 우리가 소은설의 목줄을 잡고 있는 한 놈은 알면서도 걸려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먹잇감을 기다리듯 진운룡이라 해도 어쩌지 못하게 만들 함정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 놈을 처리하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거슬렸는데 잘됐군.”
남궁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운룡의 처리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곧 홍혜란과 남궁린 둘이 충분히 진운룡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진운룡의 능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남궁린이기에 그의 이런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를 처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될 거예요. 제 생각대로만 된다면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소은설과 진운룡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될 거예요. 강호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덤이라 할 수 있죠.”
홍혜란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