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혈룡전 3권 (71화)
7장 소은설의 위기 (2)/
“은설아 나다.”
소은설은 아버지 소진태의 목소리에 반갑게 방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웬 일이세요? 별로 부지런하지도 않으신 분이?”
소은설이 조금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허! 이 애비가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새벽에 돌아다녀야 하니 아침잠이 조금 많았을 뿐이야!”
소진태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기야 도둑인 그가 움직이는 시간은 밤이나 새벽이었다.
아침이면 그가 일이 끝나 잠이 드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보세가에서 도둑질을 할 일은 없으니 아침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너 나랑 잠시 하오문 분타에 좀 다녀오자.”
“제녕 분타요?”
소은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문주께서 부르시는구나.”
“문주께서요?”
소은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혹시 진 공자가 부탁한 정보를 알아낸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부르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진 공자한테도 얼른 외출 준비를 하라고 해야겠네요!”
“진 공자는 제외하고 너와 나만 부르셨다.”
소진태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조용히 말했다.
“네?”
“아마도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야.”
“저희한테요?”
소은설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슨 일로 아버지와 자신을 따로 부르는 것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소진태가 조금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래 문주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이번에 진 공자를 돕기로 한 것도, 구학을 일행에 집어넣은 것도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지. 물론, 그의 야망이라는 것이 결국 하오문을 명문대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드는 것이지만, 어쨌든 오늘 너와 나를 따로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아마도 진 공자나 그와 관계된 모종의 생각이 있는 게지.”
소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라도 하오문주가 곤란한 부탁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진운룡 몰래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다.
자칫 진운룡을 배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진 공자에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아버지와 저의 은인이잖아요.”
“그건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우린 하오문 문도야. 게다가 아직은 짐작일 뿐 실제로 문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용무를 가지고 있는지 확실한 상황도 아니지 않느냐? 만일 진 공자에게 섣불리 이야기했다가 문주가 전혀 관계없는 일로 부른 것이면 괜히 진 공자와 하오문의 관계만 어색하게 만들 뿐이야.”
소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일단은 문주 곽지량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먼저였다.
“알겠어요.”
“그럼 지금 출발할까? 간만에 부녀지간에 마실이나 즐겨 보자꾸나.”
“그럴까요? 호호호.”
소진태와 소은설은 무거운 마음을 애써 지운 채 하오문 제녕분타로 향했다.
* * *
천미각 입구로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로 보이는 노소(老少)가 들어섰다.
두 사람은 들어서자마자 일층 손님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직 열여일곱 쯤 되어 보이는 손녀의 눈에 확 뜨이는 미모도 미모였지만, 노인의 행색이 무척 기괴했기 때문이다.
왜소한 체격의 백발의 노인은 특이하게도 눈썹과 수염이 녹색이었고, 손톱은 검게 반들거렸던 것이다.
게다가 손에 들고 있는 섭선 역시 녹색으로 마치 쇠로 만든 것처럼 번들거렸다.
“할아버지! 여기가 제남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인가요?”
소녀가 앙증맞고 귀여운 입술을 열자 사람들이 탄성을 뱉어 냈다.
소녀의 목소리가 마치 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맑고 청명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곧이어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는 마치 송곳으로 쇠를 긁듯 거칠고 귀를 자극하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렇지! 이 천미각이야말로 제남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니라! 끌끌. 특히 말린 해삼을 불려 대하와 함께 간장 양념을 한 홍소해삼(紅燒海參)은 별미 중에서도 별미 이니라!”
“와! 할아버지 빨리 먹고 싶어요! 어서 자리 잡고 요리를 시켜요!”
소녀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할아버지를 졸랐다.
“어서 오십쇼! 두 분이십니까?”
그때 점원 하나가 싹싹한 미소를 띄운 채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그렇다네. 숙박도 할 것이니, 방 좀 두 개 잡아 주고, 일단은 배가 고프니 식사부터 해야겠네.”
“혹시 따로 원하시는 자리는 있으십니까? 삼층, 사층은 비교적 자리도 넓고 대명호가 바로 내려다보여 아늑하게 식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단 삼십 문의 추가 요금이 붙습니다요!”
점원이 눈가에 실 웃음을 지으며 살살거렸다.
“삼층으로 안내해 주게.”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점원이 신이 나서 두 사람을 계단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노인과 손녀는 점원을 따라 이층으로 사라졌다.
순간, 일층 구석에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방갓을 쓴 사내 하나가 재빨리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모용주란은 제갈무진의 숙소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제갈무진의 방문을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잠깐의 수모를 참아 내면 놈에게 복수할 수 있어!’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모용주란의 입술이 열렸다.
“제갈 공자, 저 모용주란이에요.”
덜컹!
놀란 모습의 제갈무진이 허겁지겁 문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반쯤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용주란을 바라봤다.
아마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 하는 듯했다.
“모용 소저?”
워낙 의외의 방문인지라 제갈무진은 정신이 멍한 상황이었다.
“맞아요.”
모용주란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제갈무진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갔다.
대체 모용주란이 왜 자신을 직접 찾아온 것일까.
평상시 벌레 보듯 자신을 피하던 그녀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고민들은 눈앞에 있는 모용주란의 미모와 그날 밤 뜨겁고 부드럽던 그녀의 알몸이 떠오르자 곧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당장 눈앞에 그토록 원했던 모용주란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당장 날 잡아먹으라는 듯 혼자서 말이다.
제갈무진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 모용주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번엔 당신이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당황했어요.”
제갈무진이 눈가에 이채를 띠었다.
모용주란의 목소리가 평상시와는 달리 너무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번 일에 대해 화를 내고 있지도 않았다.
제갈무진으로서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그가 들은 이야기에 받은 충격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 저도 그날 밤의 첫 경험이 아직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요. 상황이 어떻게 됐든 저에게는 당신이 첫 남자였거든요…….”
모용주란이 살짝 눈썹을 떨며 말했다.
제갈무진은 이것이 과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모용주란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머리와는 다르게 심장은 쿵쾅거리고 온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속셈이야?”
당황한 제갈무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믿기 어렵겠죠. 저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더 부정하고 당신을 밀어냈어요. 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수도 없이 되뇌이면서…….”
모용주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을 본 제갈무진의 마음이 흔들렸다.
‘부, 분명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눈물까지 흘려 가며 스스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실, 모용주란의 눈물은 연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짜 눈물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이유는 제갈무진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런 말들을 내뱉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괴로워서 흘리는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갈무진은 이미 더 이상 의심을 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원하던 여인이 속마음을 고백했다.
자신 혼자만의 일방적인 갈망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 정말 그랬단 말이오?”
제갈무진의 목소리는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맞아요. 밤마다 혼자 몰래 당신을 생각하곤 했어요. 하지만 부끄러워서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어요. 자칫 그 일이 알려지면…….”
“그, 그렇지 소저의 명예에 흠집이 날 수도 있지…….”
이제는 완전히 모용주란에게 넘어가 버린 제갈무진이었다.
모용주란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반면 제갈무진은 그간 참았던 욕정이 솟구쳐 올랐다.
“나도 그날 밤 이후 그대를 잊어 본 적이 없소! 그대의 그 매끈하던 피부, 그리고 탐스러운 가슴……! 아……! 난 그야말로 당장이라도 소저를 안고 싶소이다!”
제갈무진이 모용주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자, 잠깐요. 여기선 안 돼요.”
모용주란이 제갈무진을 밀어내며 말했다.
“무슨 소리요?”
“이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제갈무진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서둘렀음을 깨달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숙소 마당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띠기 쉬운 곳이었다.
이곳에서 방사를 벌일 수야 없지 않은가.
“하하, 이, 이거 내가 너무 기뻐서 서둘렀구려. 그럼 방으로 들어갑시다!”
“황보세가 안은 안 돼요. 언제 사람이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에요. 너무 눈이 많아요.”
“허허, 그럼 어디로 가잔 말이오?”
제갈무진이 애가 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천미각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그곳 사층에는 비밀스러운 밀실이 있잖아요. 그곳이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걱정하지 않고 안심하고 마음껏 즐길 수…….”
부끄러운 듯 모용주란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이 너무 요염해서 하마터면 제갈무진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모용주란을 덮칠 뻔했다.
“그, 그럼 얼른 움직이도록 합시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제갈무진이 앞장서서 천미각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용주란의 눈에서 한기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