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혈룡전 3권 (72화)
7장 소은설의 위기 (3)/
“진 공자님!”
구학이 다급한 목소리로 진운룡의 처소를 찾았다.
명상을 하던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방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구학이 안절부절 못하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진운룡의 물음에 구학이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서찰을 가리켰다.
“고, 공자님! 이 서찰이…….”
진운룡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서찰을 받아 들었다.
서찰의 내용을 살피던 진운룡의 표정이 갑자기 차갑게 굳었다.
“누가 준 것이냐?”
진운룡이 한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어, 어떤 꼬마 아이가 제게 전하고 갔습니다.”
구학은 진운룡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적산!”
진운룡이 공력이 실린 목소리로 적산을 찾았다.
“주군! 부르셨소!”
근처에 있었는지 바람처럼 달려온 적산이 진운룡 앞에 부복했다.
“소은설은 지금 어디 있느냐?”
“그, 그것이 아침에 아버지와 함께 나갔습니다.”
“이런!”
진운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적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운룡이 적산에게 서찰을 넘겼다.
서찰을 살핀 적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은설을 데리고 있다.
그녀의 목숨을 살리고 싶거든 천미각으로 와서 내게 무릎을 꿇어라.
만일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이 새어 나가도 소은설은 죽게 될 것이다.
―제갈무진
“이런 쳐 죽일 놈! 주군! 내가 당장 가서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소!”
손을 들어 적산을 제지한 진운룡이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는 것이 먼저였다.
서찰을 확인한 순간부터 소은설의 모습이 머릿속을 자꾸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를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가?’
진운룡은 스스로의 감정에 조금 놀랐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은설에게서 제갈여령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탓이 컸다.
서찰을 받은 순간 제갈여령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결국 지켜 내지 못했던 제갈여령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소은설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기엔 스스로도 이해 못할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후후, 이미 이백 년을 넘게 살아온 내가 우스운 꼴이로군.’
진운룡은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동심(不動心)을 되찾았다.
일단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첫 번째 의문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
‘제갈무진이 왜?’
놈이 자신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모한 일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었단 말인가?
대체 이 일로 인해 제갈무진이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무릎을 꿇리기 위해서 이런 큰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은설의 목숨을 담보로 진운룡을 어찌해 보겠다는 것인데, 진운룡이 목숨이라도 내놓기를 바라는 것일까?
소은설을 납치한다 해서 진운룡 같은 고수를 그것도 오만하고 다른 사람을 전혀 상관치 않는 그를 과연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본 것인가?
이미 진운룡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제갈무진이 그런 생각을 했을 리 없었다.
그나마 가망성이 있는 것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경우인데, 제갈무진의 능력과 인맥으로 진운룡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함정을 판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배후가 따로 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진운룡을 노릴 배후 세력이라면 금방 생각나는 곳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동창과 방염 장원에서 만난 놈들.’
어찌 됐든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소은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아직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소은설이 외출한 시기에 공교롭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서찰이 왔다는 것은…… 그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 사실이건 아니건의 여부를 떠나 일단은 소은설을 찾아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제갈무진은 이 정도 일을 벌일 만큼 배포가 크지 않지. 분명 무언가 배후가 있다.”
진운룡의 혼잣말에 적산이 놀란 눈을 했다.
“배후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은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겠지.”
“그, 그렇다면 서찰대로 따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구학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어찌 됐든 소은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해. 가만히 앉아 무슨 일이 생기길 기다릴 수는 없지. 그리고……!”
순간, 진운룡의 눈동자가 노랗게 변했다.
우우우우웅!
동시에 그로부터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걸어 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 주의거든. 게다가 제 놈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준다는데, 나야 고마울 따름이지.”
진운룡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먼저 도발을 해 왔다.
그것도 직접 덤비지 않고 주변을 공격했다.
아마도 소은설이 그의 약점이라 여겼을 것이다.
‘감히!’
억눌렀던 마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놈들이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해 주지!”
진운룡의 눈에서 혈광이 일었다.
그는 놈들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못 판단했는지 톡톡히 깨닫게 해 줄 것이라 다짐했다.
“크크크! 맞소! 놈들에게 진정한 공포를 보여 줍시다!”
적산까지 덩달아 살기를 피워 내자 구학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흐응~! 흥~!”
천미각으로 향하는 제갈무진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볍고 경쾌했다.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들떠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천미각에 도착하자마자 제갈무진은 점원을 불렀다.
“당장 사층 방으로 안내하거라! 특실로!”
“아! 마침 최고급 매화실이 비어 있습니다요! 그리로 모실깝쇼, 손님?”
“하하하, 좋다! 당장 안내하도록!”
너무 기쁜 나머지 제갈무진은 모용주란과 점원이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점원과는 홍혜란이 준비한 방으로 안내하기로 미리 입을 맞춰 놓은 상태였다.
모용주란은 혹시라도 제갈무진이 눈치를 챌까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점원을 따라 사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입니다, 손님.”
매화실(梅花室)이라 쓰여진 편액이 붙어 있는 방 앞에서 점원이 멈췄다.
“들어갑시다, 소저.”
딴에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다고 신경 쓴 제갈무진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공자께서 먼저 들어가세요. 뒤따를게요.”
“그럴까요? 하하하.”
호기롭게 매화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제갈무진의 신형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이게 대체…….”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저들이 왜? 그리고 홍혜란 당신은 왜?”
매화실에는 홍혜란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닥에는 정신을 잃은 소은설과 소진태가 쓰러져 있었다.
드르륵!
그때, 매실의 미닫이문이 닫혔다.
“안녕하신가, 제갈 공자?”
뒤통수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제갈무진이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어느새 남궁린이 문을 막아선 채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오? 당신들이 여기 왜?”
“호호호, 어리석기는 당연히 네놈을 기다리고 있었지. 아니면 남궁 오라버니와 내가 밀회라도 즐기러 왔겠느냐?”
홍혜란의 비웃음에 제갈무진은 그제야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모용주란이 자신을 속인 것이다.
“모용주란!”
제갈무진이 분노한 얼굴로 모용주란을 찾았다.
하지만 모용주란은 어느새 홍혜란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녀는 살기가 묻어나는 눈으로 제갈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 분명했다
‘한데 왜 홍혜란과 남궁린까지 나섰지?’
모용주란이 자신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한데 홍혜란과 남궁린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꾸민 것인가?
그들은 자신과 특별히 원한을 산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용주란이 스스로의 치부를 그들에게 털어놓았을 리 없었다.
게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은설과 소진태는 또 뭐란 말인가?
“대체 날 어쩌려는 거요? 여기서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제갈세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요!”
제갈무진이 긴장 된 얼굴로 소리쳤다.
“쯧쯧, 이 상황에서 가문을 들먹이다니, 네놈에게 내세울 거라곤 그 잘난 제갈세가밖에 없는 것이냐?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병신임을 스스로 인증하는구나!”
남궁린이 조소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마, 말씀이 심하시오! 남궁 공자!”
“퉤! 더러운 놈! 네놈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오늘 네놈이 누구 손에 죽게 될지나 아느냐? 바로 네놈이 그토록 싫어하는 진운룡이다! 진운룡!”
모용주란이 제갈무진을 향해 침을 뱉었다.
“뭐, 뭐라고? 그자도 네 녀석들과 함께 일을 꾸몄단 말이냐!”
제갈무진은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어찌 자기 하나 때문에 홍혜란, 남궁린을 비롯 진운룡까지 나선단 말인가.
‘가만!’
그때, 제갈무진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소은설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 설마!”
대충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