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혈룡전 3권 (73화)
7장 소은설의 위기 (4)/
“흥! 이제야 짐작이 가느냐?! 네놈은 진운룡의 손에 죽고 죽은 뒤에도 음적으로 남을 것이다!”
모용주란이 득의한 얼굴로 말했다.
“제, 제발…… 이럴 것까진 없잖소?”
제갈무진이 남궁린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물론, 내가 잘못한 것은 맞으나, 모, 목숨을 빼앗는 것은 너무하지 않소? 사, 살려만 주시오. 그럼 내가 모, 모용 소저가 원하는 뭐든 다 하겠소이다!”
간절한 제갈무진의 애원을 남궁린은 피식 웃으며 외면했다.
“아. 비루해서 못 봐 주겠네. 어차피 시간도 되었으니 슬슬 준비해야겠군!”
그때였다. 홍혜란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여 제갈무진의 머리를 잡았다.
제갈무진이 움직임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홍혜란이 그의 머리를 잡고 있었다.
“엇!”
놀란 제갈무진이 급히 몸을 피하려 했으나 마치 온몸이 석상처럼 굳어서 도무지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무,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덜컥 겁이 난 제갈무진이 고함을 질렀다.
혹시라도 밖에서 사람들이 듣고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쯧쯧, 이곳은 이미 내가 기막을 펼쳐 소리와 기척을 모두 차단했다.”
남궁린이 한심하다는 듯 제갈무진을 바라봤다.
“언니! 진운룡 그자가 오기 전에 어서요! 이 계집의 옷은 제가 벗길게요!”
모용주란이 소은설의 옷을 벗기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순간이었다.
“아, 그건 안 되지.”
어느새 그녀 앞을 남궁린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되면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기거든.”
모용주란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남궁린과 홍혜란을 번갈아 바라봤다.
“무, 무슨 소리예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모용주란이 남궁린에게 물었다.
사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홍혜란뿐 아니라 남궁린까지 있다는 사실에 의문과 이질감을 느꼈었다.
두 사람이 친한 것은 알지만, 이번 일은 자신의 명예도 걸린 일인데 사내인 남궁린이 이 일에 대해 안다는 것은 결코 그녀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 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갈무진의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크아아악!”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향한 모용주란의 두 눈에 경악이 어렸다.
“무, 무슨!”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제갈무진의 코와 입, 귀, 눈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홍혜란에게 흡수되고 있었던 것이다.
핏줄기가 마치 실타래처럼 이어져 제갈무진의 머리를 잡은 홍혜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크, 크아아악! 사, 살려…….”
눈을 뒤집어 깐 채 경련하는 제갈무진의 모습에 모용주란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언니. 이게 대체 어찌…….”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앞에서 홍혜란이 제갈무진의 피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제갈무진은 점점 쪼그라들어 목내이처럼 변하고 있었다.
“이 계집도 처리할까?”
남궁린이 비릿하게 웃으며 홍혜란에게 물었다.
“아뇨.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어요.”
제갈무진의 시체를 바닥에 내팽개친 홍혜란이 음산한 눈으로 모용주란을 바라봤다.
“어차피 너는 우리와 한 배를 탔어. 여기서 네가 이 사실을 밝혀 봐야 너에게도 이득될 게 전혀 없음을 잘 알고 있겠지? 제갈무진을 죽이려 했던 것은 바로 너잖아?”
모용주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덜덜 떨었다.
“자 지금부터 두 가지 선택의 기회를 줄께. 첫째, 이대로 제갈무진처럼 목내이가 되든지, 둘째, 우리의 말을 따르든지. 어때? 너무 쉬운 선택이지?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어느새 핏빛으로 변한 홍혜란의 눈동자가 모용주란을 꿰뚫듯 바라봤다.
모용주란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홍혜란의 말대로 제갈무진의 죽음을 원하고 그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은 자신이었다.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그녀를 어쩌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홍혜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만일 홍혜란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도 제갈무진과 같은 꼴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따, 따를게요.”
모용주란이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좋아! 모든 것이 준비되었군요! 이제 오늘의 주인공을 기다려 볼까요?”
* * *
진운룡은 최대한 빨리 속도를 내서 천미각을 향했다.
소은설에게 일이 벌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천미각은 황보세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진운룡에게는 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그의 기억속으로 제갈여령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운랑…… 사랑해요. 그리고 이런 굴레를 씌워서 정말 미안해요…….
진운룡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소은설과 제갈여령의 모습이 겹쳐지며 숨어 있던 마성이 끓어올랐다.
이미 부동심의 경지에 이른 진운룡이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피의 저주 이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처럼 흔들리지는 않았다.
‘혹여 벌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겠지…….’
동창이나, 방염의 장원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세력이나 잔혹한 일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다.
소은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진운룡은 자꾸만 드는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와 관련된 자들을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진운룡의 두 눈에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주군! 천미각입니다!”
적산의 외침과 함께 진운룡이 신형을 멈췄다.
“후우…….”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은 진운룡이 천천히 천미각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 하나가 재빨리 진운룡을 맞이했다.
제갈무진과 모용주란을 안내했던 그 점원이었다.
“제갈무진이 이곳에 있나?”
진운룡은 다짜고짜 점원에게 물었다.
어차피 놈들이 함정을 팠다면 진운룡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점원에게도 미리 언질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 진 공자시군요? 따라오시지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진운룡과 적산은 점원을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 * *
“응?”
홍소해삼을 맛있게 음미하던 노인의 시선이 갑자기 계단을 향했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소녀가 의아한 얼굴로 조부(祖父)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어머!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사내는 처음 봐요!”
소녀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계단에는 조각 같은 미남과 산발한 사내 하나가 점원을 따라 사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바로 진운룡이었다.
“놀랍군!”
진운룡의 뒷모습을 보는 노인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왜요? 잘생겨서요?”
소녀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기운을 읽을 수 없다니. 무슨 특수한 무공이라도 익힌 겐가?”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가 못 읽었다고요? 정말인가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 참으로 재밌는 녀석이군.”
씨익, 웃는 노인의 눈동자에 녹색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할아버지, 궁금증은 나중에 푸시고 일단 음식부터 드세요!”
할아버지의 궁금증이 발동했음을 눈치챈 소녀가 못마땅한 얼굴로 빽 소리쳤다.
“허허, 알았다.”
노인이 소녀의 성화에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