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혈룡전 3권 (75화)
8장 함정 (2)/
“무슨 소리냐뇨? 분명 당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야기했잖아요? 본래 할아버지께 이야기하려 했으나, 진 공자가 눈치를 챌까 봐 우리한테 왔다고요.”
“아, 아니에요!”
소은설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진운룡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까 걱정 됐던 것이다.
하지만 진운룡은 약간 눈살을 찌푸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사실 진운룡으로서는 홍혜란이 무얼 믿고 어차피 밝혀질 무리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뜻밖의 반전이 벌어졌다.
“홍 소저의 말이 맞소. 은설이가 계속 말렸지만, 나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소이다. 제갈 공자는 저자가 나를 죽이려는 것을 막다가 결국 저리된 거요. 만일 풍신 어르신이 근처에 계시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저 꼴이 났을 겁니다.”
소진태가 갑자기 홍혜란을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진운룡은 그제야 홍혜란이 믿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진태가 홍혜란과 한패였을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아, 아버지!”
소은설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소진태를 바라봤다.
대체 자신의 아버지가 왜 저런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 들었죠?”
홍혜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홍무생에게 자신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진 공자! 이제 사실을 밝히시오!”
남궁린도 이때다 하며 진운룡을 몰아세웠다.
“흥! 모두 작당을 해서 주군을 모함하려는 거냐!”
적산이 분노에 차 으르렁 거렸다.
“무슨 일인데 이 소란인가?”
그때였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 방 안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문밖에는 한 쌍의 노소가 서 있었다.
바로 삼층에서 홍소해삼을 즐기던 노인과 그 손녀였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홍무생이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대명호의 풍광을 보며 식도락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자네가 나타나 씩씩대며 이리로 올라오길래 궁금해서 따라와 봤지.”
노인은 마치 풍신 홍무생과 친한 지기인 마냥 허물없이 대했다.
“독황(毒皇) 어른!”
남궁린이 얼른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이 기괴한 외모의 노인이 십이천(十二天) 중 한 명 독황 당요였던 것이다.
‘진운룡! 네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과연 십이천 둘을 상대할 수 있을까?’
홍혜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진운룡을 상대할 두 사람이 모두 자리한 것이다.
두 명의 십이천!
정파 제일 고수 남궁진천이라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승부였다.
“한데 대체 무슨 일인가?”
당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차피 모두 들었을 것 아닌가?”
씨익!
홍무생의 말에 독황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를 너무도 잘 아는 홍무생이었다.
홍무생과도 성격이 비슷해 싸움이나 소란이 있으면 두 팔 걷어붙이고 쫓아다니는 이가 바로 당요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미 삼층에서부터 귀를 열어 놓고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손녀의 성화에 바로 올라오지 못하고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 혈귀라…… 후후. 재밌겠군.”
당요가 날카로운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자네는 할 말이 있는가?”
홍무생이 진운룡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모든 정황이 진운룡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단정 짓지 않고 있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단련된 육감이 무언가 찜찜한 느낌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 줄 겁니까?”
진운룡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진운룡과 소은설의 말은 무의미했다.
소진태의 배신이 결정적이었다.
‘납치되었을 때, 놈들에게 세뇌된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초진도나 방염의 머리에 금제를 가한 놈들이라면 세뇌라고 해서 못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쨌든 소진태야말로 홍혜란의 회심의 한 수였던 것이다.
홍무생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진운룡의 말을 들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까? 그것도 시간을 맞춰서, 마치 미리 계획한 듯 말이지요.”
홍무생이 미간을 좁혔다.
천미각 점원이 갑자기 달려와 자신에게 손녀가 공격받고 있다고 알렸고, 깜짝 놀라 다른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정신없이 천미각으로 달려왔다.
점원은 홍혜란이 보낸 것이었다.
아침에 개방 분타에 간다고 손녀에게 이야기했기에 홍무생의 행적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개방분타는 천미각 바로 근처였기에 단숨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너무 딱 맞아 떨어진 느낌이 강했다.
“자네가 결백하다면 이대로 우릴 순순히 따르게. 공정한 조사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릴 것을 약속하지.”
“공정한 조사라…….”
진운룡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홍무생 자신도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누명을 씌운 자들에게 조사를 받으라니 개소리군!”
적산이 적의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홍무생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제갈무진을 살해한 범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자신이 진운룡의 입장이라도 이대로 잡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탁이니 내가 손을 쓰게 만들지 말게.”
홍무생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리 고민하고 있나? 그냥 잡아가면 되지?”
지루한 듯 귀를 파던 당요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
우우우우우웅!
당요의 구부정하던 허리가 순간 반듯이 펴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사위를 누르는 막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군.’
홍혜란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진운룡과 두 십이천의 대결은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
“너희들은 자리를 피하거라!”
홍무생이 홍혜란을 비롯 방 안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 소저도 위험하니 함께 가요.”
홍혜란이 이때다 하며 소은설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진운룡은 이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 기회에 소은설을 데리고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십이천 둘을 이용해 진운룡을 잡고 소은설까지 손에 넣다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책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꾸민 것이 홍혜란인 것을 알고 있는 진운룡이 소은설이 그녀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 아이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구우우우우웅!
진운룡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움과 동시에 홍혜란의 온몸이 그물에라도 걸린 것처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단지 한 줄기 기운만으로 홍혜란의 움직임을 봉쇄해 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홍혜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운룡이 십이천 둘을 상대하면서 자신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있으리라고는 그녀도 미처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진운룡의 능력이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뛰어나다는 말과도 같았다.
‘젠장! 본신의 힘만 쓸 수 있다면…….’
홍혜란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본신의 힘을 발휘한다면 이정도 압력쯤이야 얼마든지 벗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애써 꾸민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일단은 지금 상태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놈! 기어코 피를 보자는 것이냐!”
홍무생이 노기 어린 얼굴로 호통 쳤다.
“말로는 믿질 않으니 두드려 패서 이해시키는 수밖에!”
진운룡이 기세를 끌어 올리며 광오하게 말했다.
“크하하하! 건방진 놈이로구나! 나와 풍신을 앞에 두고 두드려 패서 이해시키겠다고? 크하하하하하!”
독황이 광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진운룡의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었다.
혈룡의 전설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