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혈룡전 4권 (76화)
1장 과거 (1)/
“크하하하! 건방진 놈이로구나! 나와 풍신을 앞에 두고 두드려 패서 이해시키겠다고?”
독황 당요가 광소를 터뜨렸다.
진운룡의 두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는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다시 나온 뒤로 그는 되도록 적을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은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다.
‘여령…….’
그의 기억이 백 년을 훌쩍 넘긴 과거를 더듬었다.
* * *
“왜 이런 거요?”
진운룡은 복잡한 표정이 얽힌 얼굴로 제갈여령을 바라봤다.
“미안해요…….”
제갈여령이 슬픈 눈으로 말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대가 원한 일이오?”
진운룡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가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었다.
분명 세가들과 구대문파의 욕심 많고 간악한 자들이 벌인 일일 것이다.
혈마를 죽인 이후 세가와 구대문파, 무림맹은 진운룡을 두려워하고 경원시 했다.
강호를 지배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진운룡이라는 존재는 손에 가시와 같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통제할 수 없는 괴물.
진운룡은 그들이 구축한 질서를 파괴하고 무너뜨릴 위험 요소였다.
진운룡 역시 그들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제갈여령과 둘이 이곳 봉황산에 은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기야 내가 은거한다고 그들이 그냥 놔둘 리는 없지…….’
진운룡의 존재 자체가 그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운룡은 그들이 어찌하기에는 너무도 강했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진운룡의 약점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진운룡이 유일하게 마음을 쓰는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바로 제갈여령.
세가와 구대문파의 수장들은 그녀에게 진운룡을 함정에 빠뜨리도록 강요했다.
고금 제일이라 부를 만큼 신묘한 그녀의 두뇌와 지식을 이용해 진운룡을 가둘 진법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인간의 피를 흡수하지 못하면 진운룡이 약해진다는 사실―석화(石化)에 대한 것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을 알고 있었던 그들이 마련한 계책이었다.
진에 가두고 기다리면 피를 흡수하지 못한 그는 쇠약해질 것이고, 그때 공격한다면 천하의 진운룡이라 해도 그들 모두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온 무림이, 심지어는 제갈세가 사람들마저 제갈여령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그녀의 부모 형제들은 거부하는 그녀를 배신자처럼 바라봤다.
“그들의 욕심은 결코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제갈여령의 목소리가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처연하게 들렸다.
우우우우우웅!
어느새 비조곡(飛鳥谷)은 혼원구궁마라진(混元九宮魔羅陳)이 둘러싸고 있었다.
제갈여령, 그녀가 발동시킨 진.
“이 진으로 나를 가둘 수 있을 것이라 보오?”
진운룡이 안타까운 눈으로 제갈여령을 바라봤다.
세상에 그를 가둘 수 있는 진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나가 이 일을 꾸민 자들을 모두 쳐 죽일 수 있었다.
제갈여령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 세상 무엇도 당신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요……. 하지만 어리석은 그들은 당신해 대해 너무 모르지요.”
진운룡의 눈동자가 깊이 침잠했다.
‘그렇다면 왜?’라며 묻고 있는 얼굴이었다.
제갈여령이 애틋한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난…… 난 당신이 살인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부디…… 제 마지막 부탁이니 이곳을 떠나지 마세요.”
그녀의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혼원구궁마라진은 당신을 위한 제 마지막 선물이에요…….”
진운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갈여령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만든 진은 진운룡을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위협에서 그를 지키기 위한 보호막이었다.
진운룡의 강함이라면 언제든지 벽을 부술 수 있지만, 진운룡 외에 세상 그 누구도 진을 깨고 이곳으로 들어올 수는 없으리라.
“그대는……!”
진운룡은 불현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이라는 그녀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갈여령의 창백한 얼굴이 그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당신을 속이고 배신한 제 죄는 목숨으로 갚을게요……. 쿨럭!”
제갈여령이 한 차례 피를 토해 내곤 균형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령!”
진운룡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제갈여령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부디…… 저와 했던 약속처럼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원래 당신이 있어야 했던 곳에서 더럽고 추악한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 버리세요…….”
“여령! 그, 그만 말하시오!”
우우우웅!
진운룡은 서둘러 진기를 끌어 올려 제갈여령의 몸에 집어넣었다.
“소용 없어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단혼산을 복용했어요……. 이미 오장 육부가 모두 녹아 버린 상태일 거예요…….”
제갈여령의 입에서 연신 핏물이 흘러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대체 왜…….”
목이 메인 진운룡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들에게 약속했듯이 세상과 단절한 채 그저 그녀와 단둘이 은거해 사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가.
“저는 당신을 볼 낯이 없어요. 저들이 당신의 비밀을 알게 된 것도 모두 저 때문이에요…….”
사실 세가들과 구대문파가 진운룡의 약점을 알게 된 것은 제갈여령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주를 풀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세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제갈세가에서 그 사실을 무림맹에 알릴 거라고는 그녀도 짐작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고금 제일의 재녀라고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이 진운룡을 팔아넘기리라곤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다.
“다,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내 가족 역시 버릴 수는 없어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죄인이 될 거예요.”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갈세가와 가족들, 그리고 진운룡 모두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만!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진운룡이 그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그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혈마를 죽이고 강호를 구한 모든 일들이 허무하고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 모든 대가로 진운룡이 얻은 것은 피의 저주와 강호인들의 적대뿐이었다.
게다가 이젠 그가 구했던 세상이 진운룡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가려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으로 부터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발……. 운랑…… 저를 위해 약속해 줘요.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진운룡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눈치챈 제갈여령이 간절한 눈으로 말했다.
제갈여령을 바라보는 진운룡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다, 당신이 살인자가 되는 것은 싫어요……. 제발…….”
진운룡의 두 눈이 가늘게 떨렸다.
제갈여령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목구멍에 무언가 커다란 덩어리가 막고 있는 듯 먹먹했다.
진운룡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속하겠소.”
“고…… 마워요…….”
제갈여령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진운룡의 의식이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제갈여령을 잃어야 했던 이유도 결국 강호와의 마찰 때문이었다.
강호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에겐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그의 모습이 오만하고 못마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세상에 나온 후로는 되도록 다른 이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나름 조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구우우우웅!
진운룡이 공력을 끌어 올리자 방 전체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이에 질세라 당요도 잔뜩 공력을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의 기운이 부딪히며 무시무시한 압력이 사방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둘 다 잠시 진정하게나! 여기서 손을 쓰면 아이들과 다른 손님들이 위험하게 될 것이네!”
홍무생이 다급히 소리쳤다.
멈칫한 당요가 남궁린과 홍혜란 등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십이천이 본격적인 힘을 드러내게 되면 그들 중 견뎌 낼 수 있는 이는 고작해야 남궁린과 홍혜란 정도였다.
소은설이나 모용주란, 당요의 손녀 당소혜의 경우 생사를 보장할 수 없었다.
하물며 천미각의 일반 손님들이 어찌 그것을 버텨 내겠는가.
아이들을 먼저 탈출시키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진운룡을 막고 홍무생이 아이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진운룡과 충돌해야 했다.
그 여파가 천미각과 손님들에게 미칠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젠장! 이놈아! 네놈이 진정 나와 상대할 배짱과 실력이 있다면 이곳에서 다른 이들을 볼모로 잡지 말고 장소를 옮기도록 하자!”
당요의 말에 진운룡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역시 다른 이들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소은설을 홍혜란과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은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홍혜란이 혈신대법을 사용하는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것을 안 이상 이대로 고이 보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오문을 동원해도 찾지 못했던 실마리가 이렇게 눈앞에 스스로 나타났는데 어찌 그냥 놓아준단 말인가.
“장소를 옮기는 것은 좋은데, 당신 손녀와 남궁린은 그냥 보내 줄 수 없소.”
홍무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 소저도 이곳에 있으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야.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안전할 길일세.”
“저, 저는 진 공자와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해요!”
소은설이 다급히 소리쳤다.
홍혜란이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갈무진을 처참하게 죽인 홍혜란이다.
만일 진운룡이 없으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어허! 아무리 사내에게 눈이 뒤집혔다고 자신의 목숨까지 그리 함부로 해서야 되겠느냐! 아무래도 내가 너를 잘못 키운 것 같구나!”
“아, 아버지…… 대체 왜 이러세요…….”
소은설이 당혹스러움과 걱정이 교차된 얼굴로 소진태를 바라봤다.
“본인이 주군과 함께 하겠다는데 왜 막는 것이오! 보아하니 당신들이야말로 주군이 두려워서 소 소저를 볼모로 삼을 생각이군!”
“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