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혈룡전 4권 (77화)
1장 과거 (2)/
적산의 말에 당요가 노기를 뿜어냈다.
구우우우우웅!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당요의 기운이 거칠게 사방을 때렸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어르신, 저희가 따라가겠습니다.”
그때 남궁린이 나섰다.
“저 하나의 안위보다는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다치는 것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할아버지 저희는 괜찮으니 일단 무공을 모르는 손님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예요.”
홍혜란도 이때다 하며 남궁린에게 맞장구쳤다.
물론, 남궁린과 홍혜란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어차피 진운룡이 두 명의 십이천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에 진운룡은 두 사람에게 제압되든지,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느긋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게다가 동시에 두 고수들에게 좋은 인상까지 심어 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 것이다.
“허허, 기특하구나. 그래, 무인이라면 자고로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고 강한 자에게 굴하지 않아야 하는 법.”
당요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보면 볼수록 기특한 아이들이었다.
그만큼 무림의 미래가 밝다는 말이기도 했다.
반면 진운룡에 대한 적의는 더욱 커졌다.
“이 아이들이 함께 가면 나머지는 놓아줄 테냐?”
“은설도 데려가겠소.”
홍혜란 등과 한패가 더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었다. 그 경우 소은설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은 위험했다.
“이놈! 어찌 내 딸을 데려가려는 것이냐! 네놈이 나를 구해 준 것을 빌미로 은설이에게 대체 무슨 요구를 한 것이냐! 차라리 지금이라도 날 죽이고 내 딸을 그냥 내버려 두거라!”
소진태가 진운룡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소리쳤다.
진운룡과 소은설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치 진운룡이 소진태의 안전을 볼모로 소은설이 꼼짝 못할 어떤 계약이라도 맺은 듯 보였다.
“소 소저는 아버지와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홍무생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전 진 공자를 따라가겠어요!”
소은설이 얼른 나섰다.
“너를 저 악적 놈에게 보낼 수는 없다! 차라리 나도 함께 따라가 너를 지키겠다!”
소진태가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홍무생과 당요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운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어차피 소은설은 진운룡과 한패였다.
소은설을 제외한 모용주란과 당소혜, 그리고 천미각 손님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좋다, 네 녀석의 요구대로 소 소저도 함께 가기로 하지. 단! 네놈에게 보내 줄 수는 없으니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있도록 하겠다.”
진운룡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소은설을 상대편이 데리고 있으면 주저 없이 손을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행여 나중에 홍혜란 등이 그녀를 인질로 잡을 경우에도 귀찮아진다.
‘그래도 일단 내 시야 안에 있으면 놈들이 허튼 짓은 못하겠지.’
구해 내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됐다.
“좋소, 그렇게 하지.”
진운룡과 합의가 끝나자 홍무생이 천천히 매화실 입구를 빠져나갔고, 그 뒤를 독황 당요와 소은설을 데리고 있는 홍혜란, 남궁린이 따랐다.
마지막으로 진운룡이 홍혜란 등의 뒤를 바짝 쫓았다.
홍혜란과 남궁린이 허튼수작을 하지 못하도록 유형의 살기를 거두지 않은 채였다.
당장에 소은설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홍무생과 당요가 걸렸다. 그들과 부딪히는 와중에 행여 소은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놈이야……!’
뒤를 돌아본 남궁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운룡이 쏘아 낸 저릿한 살기가 그의 온몸을 압박했다.
살기의 막은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앞쪽으로만 길을 열어 놓고 있었다.
화경 초입에 도달한 그조차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진운룡의 살기는 사방을 옭아매고 있던 것이다.
물론 억지로 벗어나려 한다면 충분히 가능했으나, 그것을 진운룡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홍혜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히려 무공만으로는 남궁린보다 아래였다.
피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고는 진운룡의 살기를 떨쳐 내는 게 애초에 불가능했다.
결국 두 사람은 별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한 채 홍무생이 고른 인적이 뜸한 전장(戰場)에 도착했다.
숲 한가운데 위치한 사방 십오 장 정도 넓이의 공터였는데, 주변을 제법 큰 잣나무와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탁! 차착!
공터에 도착한 당요가 돌아서자 순간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일변했다.
“네놈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다는 것만은 인정해야겠구나. 예까지 오는 동안 단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다니, 솔직히 조금은 놀랐다고 해야겠구나.”
당요의 서늘한 안광이 당장에라도 진운룡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을 듯했다.
“하지만, 재롱은 여기까지다!”
우우우우우웅!
드드드드드!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압력과 동시에 당요의 몸에서 녹색 광망이 뿜어져 나오며 대기가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모두 물러서라.”
홍무생이 홍혜란 등을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뒷짐까지 진 채 멀찍이 물러선 그는 당요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강호에 이제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청년 고수 하나를 상대하는 데 십이천 두 명이 합공을 한다면 그야말로 천하가 웃을 일이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십이천의 한 명인 당요가 진운룡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과한 일이었다.
그만큼 십이천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어지간한 문파 하나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절대자들이었으며, 행동 하나, 말 하나에 강호가 꿈틀대고 움찔거린다.
한마디로 무림에서는 그들이 곧 신이었다.
“후후, 주군, 늙은이들이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오.”
적산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사실 적산 역시 속으로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진운룡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는 그였으나, 십이천은 이제껏 상대한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적산이 무공 수련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천하를 진동하던 이름이다.
모든 무인들의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 바로 십이천이었다.
그 무모하고 겁 없는 적산조차도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눈앞에 있는 당요와 홍무생의 존재감은 거대했던 것이다.
당요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기운이 숨조차 함부로 쉬기 힘들 정도로 사위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운룡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하게 당요의 압박을 받아 내고 있었다.
“삼 초를 양보할 터이니, 어디 네놈의 대단한 실력 한번 펼쳐 보거라.”
조소를 머금은 당요가 팔짱을 낀 채 진운룡을 도발했다.
사실 당요도 진운룡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십이천인 자신과 홍무생이 경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우선 진운룡의 경지가 두 사람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경우 당연히 상대의 내력을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는 진운룡이 내기를 숨길 수 있는 특수한 무공, 내공심법을 익혔을 경우.
물론 당요는 진운룡이 후자일 것이라 확신했다.
스무 살을 갓 넘은 나이에 십이천과 대등한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그가 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무공을 수련했다 한들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호에는 상리를 벗어난 무공이나 내공심법을 익힌 자들이 제법 존재했다.
특히, 마공을 익힌 마인 중에는 그런 자들이 많았다.
홍혜란의 이야기에 의하면 진운룡이 흡혈을 한다 했으니, 괴공이나 마공을 익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삼 초를 양보하겠다는 당요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피이이이잉!
진운룡에게서 세 가닥의 빛줄기가 섬전처럼 쏘아졌다.
그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사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당요 바로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헛!”
갑작스런 공격에 깜짝 놀란 당요가 헛바람을 켜며 급히 양손을 휘둘렀다.
콰앙! 콰쾅! 쾅!
마치 우뢰와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오며 당요가 연달아 세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이, 이런 개호로 자식아! 이게 무슨 짓이냐!”
당요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함쳤다.
빛줄기를 막아 낸 그의 두 손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진운룡이 공격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기에 낭패스러운 꼴을 보인 것이다.
“뭐가 문제지? 당신 뜻대로 먼저 삼 초를 공격했을 뿐인데? 어차피 친선비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일일이 공격한다고 미리 통보라도 하라는 건가?”
진운룡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명백히 당요를 비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저……!”
당요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진운룡을 노려봤다.
그를 공격한 것은 세 줄기의 지풍이었다.
그것도 미세한 차이를 두고 차례차례 이어진 정확한 삼 초.
갑작스러운 진운룡의 기습에 당요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 이유야 어쨌든 이름 높으신 십이천이 새파란 애송이의 공격에 낭패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당요로서는 당연히 민망하고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진운룡의 이번 공격에 대해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수십 년 동안 강호에서 독황이라 불리며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자신을 세 걸음이나 물러나게 했다.
그것은 곧 진운룡의 지풍이 그만큼 빠르고 위력적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거의 강기 수준의 지풍이야.’
당요는 곧바로 분노를 접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역시 십이천의 자리는 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성격이 불같은 당요였고, 진운룡의 나이가 어리다 하나, 그는 결코 상대를 경시하지 않았다.
지풍만으로도 진운룡이 한낱 애송이가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느새 당요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공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잠시 후 진운룡과 당요 두 사람의 강력한 기운이 맞부딪히며 그 중앙에 기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순간, 당요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출수는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파리라도 쫓듯이 슬쩍 손을 휘저었을 뿐인데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우던 기의 장막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촤아아아악!
동시에 화살과 같은 수십 줄기 무형(無形)의 기파(氣波)가 진운룡을 향해 쏘아졌다.
그의 독문절기 중 하나인 무형시(無形矢)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무형시는 기를 응축해서 마치 암기처럼 쏘아 내는 기술로, 강기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속도가 무척 빠르고 타격 범위가 광범위했기에 당요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쉬아아아악!
수십 가닥이 넘는 기의 화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진운룡의 온몸을 동시에 노리며 날아왔다.
하지만 무형시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진운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너무도 빠른 당요의 무형시에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홍혜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역시 독황이군!’
독황의 무형시를 직접 보는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 엄청난 속도도 속도였지만, 모든 방위를 차단하여 진운룡이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무형시의 진정한 무서움이었다.
홍혜란은 이제 곧 진운룡이 무형시에 의해 벌집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홍혜란의 기대는 다음 순간 너무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터더더더덩!
놀랍게도 진운룡의 한 치 앞에 다다른 당요의 무형시들이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부딪힌 듯 모두 튕겨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