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혈룡전 4권 (80화)
2장 조문 (1)/
제남 시내로 동창 관복을 갖춰 입은 일단의 무리가 들어섰다.
특이하게도 그 선두에는 백발에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가 앞장서고 있었고, 나머지 위사들은 깊숙이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다.
“첩형!”
어디서 달려왔는지 관부의 관원들이 사내 앞에 부복을 했다.
“내가 알아보라는 것은 어찌 되었나?”
사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진운룡이라는 자가 태산(泰山)쪽으로 향했다는 목격자들이 있습니다.”
“태산?”
사내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감히 동창의 일을 방해하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만든 대가를 똑똑히 치르도록 해 주마……. 가자!”
사내와 죽립의 위사들은 유령처럼 태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홍혜란과 남궁린은 서둘러 숲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최대한 빨리 달리고 싶지만, 소진태와 소은설을 데리고 움직여야 해서 무리할 수는 없었다.
소은설은 어느새 아혈과 마혈이 점해진 채 남궁린이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홍 매,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
“일단은 이 계집을 먼저 처리해야겠어요. 진운룡이 따라붙기 전에 빼돌려야 놈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테니까요.”
홍혜란의 머릿속에 진운룡의 괴물 같던 무공이 떠올랐다.
십이천 둘을 상대로 오히려 우위를 점하는 자가 존재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두려운 자였다.
“하기야 소은설 그 계집이 우리 손아귀에 있는 한, 놈이 우리를 어쩌지는 못하겠지.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괴물 같은 녀석이야.”
남궁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황보세가나 무림맹 쪽으로 가는 것은 안 되겠군?”
홍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세가나 무림맹으로 피신하였을 경우 진운룡을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소은설을 그들 뜻대로 처리할 수도 없게 된다.
반면 소은설을 미리 빼돌려 진운룡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는다면 진운룡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염의 장원이 그리 되었으니 제남에 이 계집을 숨길 곳이 마땅하지 않잖아?”
방염은 그들의 제남 지부를 맡고 있는 자였다.
한데 진운룡에 의해 그들의 지부가 박살이 났으니 제남에는 현재 그들의 근거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을 대비한 안가가 이곳 봉황산에 있어요. 그곳은 기감이 뛰어난 무인들이라 해도 감지할 수 없는 교묘한 진으로 보호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면 찾기가 힘들 거예요. 게다가 놈은 이 계집이 우리와 함께 있다 여길 테니 우리 꽁무니를 쫓아올 테죠.”
남궁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일었다.
“그렇다면 먼저 뒤에 붙은 쥐새끼를 처리해야겠군, 후후.”
쇄애애애액!
동시에 남궁린의 검에서 한 줄기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콰아앙!
“이크! 이거 하마터면 젊은 나이에 세상과 작별할 뻔했군.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제법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구나, 크크크.”
그들 뒤쪽 숲에서 어깨에 비스듬히 검를 걸친 적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린의 입가에 비웃음이 일었다.
“주제를 모르는 놈이로구나.”
기껏해야 초절정 초입 정도의 공력을 가진 적산이 이미 화경을 넘어선 남궁린에게 상대가 될 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운룡처럼 공력을 갈무리 하거나 숨길 수도 있었지만, 적산에게서 노골적으로 풍겨져 나오는 기세를 보면 결코 그런 수준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피의 권능을 사용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적산이 본 실력을 숨겼다고 해도 그의 상대는 아닌 것이다.
적산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큭큭큭,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지.”
그의 눈에는 호승심이 가득했다.
“오라버니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세요.”
“걱정 마. 나도 길게 끌 생각은 없으니까.”
우우우웅!
남궁린은 처음부터 검강을 생성했다.
“천미각에서부터 네놈이 거슬렸다!”
파파파팟!
남궁린의 몸이 적산을 향해 주욱 늘어났다.
동시에 그의 검이 십여 갈래로 분열했다.
십여 개의 검이 적산의 온몸 급소를 노렸다.
좌우상하 어디 한 군데 피할 곳이 보이지 않는 공격이었다.
그렇다면 막는 수밖에 없었는데, 검강이 서린 남궁린의 검과 정면으로 부딪힌다면 적산의 검은 그대로 썰려 나갈 것이다.
“죽어라!”
승리를 예감한 남궁린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한데 그의 검이 막 적산의 몸에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엇!”
남궁린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갑자기 적산의 몸이 기형적으로 꺾이며 남궁린의 검초를 절묘하게 피한 것이다.
허리가 마치 부러진 듯 기억자로 뒤로 꺾이고, 무릎은 반대로 꺾였다. 게다가 팔과 어깨는 남의 것인 듯 따로 놀고 있었다.
도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자세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파앗!
남궁린이 경악한 사이 어느새 적산이 검을 뻗어 왔다.
“헛!”
깜짝 놀란 남궁린이 급히 검을 휘둘러 적산의 검을 쳐 냈다.
스악!
하지만 적산은 남궁린의 검을 교묘하게 피하며 그의 손목을 노렸다.
기겁한 남궁린이 급히 뒤로 훌쩍 물러섰다.
“뭐, 뭐냐!”
남궁린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적산을 바라봤다.
그의 움직임은 그 어떤 형식이나 규칙이 전혀 없었다.
마치 바람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이리 불었다 저리 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류검보의 위력이었다.
본디 적산 자체가 타고난 무재(武才)로 일반인과는 다른 육신과 오성을 가지고 있는데다 초식을 초월하는 무공 무류검보까지 익혔으니 그 위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공력은 보잘 것 없는데!’
남궁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적산을 바라봤다.
의외의 상황에 홍혜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후,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이제 시작인데 말이야.”
적산이 건들거리며 남궁린에게 검을 겨눴다.
“남궁 오라버니 그래 봐야 저자는 오라버니 상대가 안 돼요. 힘으로 눌러 버리세요! 첫 번째 공격도 완전히 피하지 못했어요.”
홍혜란의 말에 남궁린이 정신을 차렸다.
자세히 보니 적산의 팔과 다리에 붉은 혈선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는 피했지만, 남궁린의 공격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놈! 허세였구나!”
남궁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일었다.
“글쎄! 확인해 보든가!”
적산이 물러서지 않고 전의를 불태웠다.
“가소로운 놈!”
기껏해야 초절정 정도의 경지에 불과한 적산이었다.
초절정과 화경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다만 처음 예상치 못한 적산의 움직임에 잠시 당황했을 뿐이다.
남궁린은 홍혜란의 말대로 힘의 차이를 이용해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어디 이것도 받아 보거라!”
콰콰콰콰콰!
남궁린이 연달아 서슬 퍼런 검강을 두른 검을 휘둘렀다.
사실 적산의 입장에서는 남감한 일이었다.
맞부딪히면 자신의 검이 녹아내리거나 잘릴 것이고, 피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타고난 싸움꾼인 적산이라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퍼퍼퍼퍼퍽!
콰아아앙!
결국 적산은 남궁린의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크윽!”
폭음과 함께 적산의 신형이 오 장이 넘는 거리를 튕겨 나갔다.
두 사람의 수준차가 워낙에 컸기에 재능만으로는 메꿀 수 없던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이제 그만 끝내자!”
남궁린이 득의에 찬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누구냐!”
그때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홍혜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남궁린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게 누구신가?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는 남궁린 공자가 아니신가? 그러지 않아도 찾아가려 하던 중인데, 스스로 눈앞에 나타나다니 오늘 내 운세가 제법 괜찮은 모양이군.”
입가를 실룩거리며 홍혜란과 남궁린 앞에 나타난 이는 특이하게도 백발에 피처럼 붉은 입술과 분칠을 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뒤로 죽립을 깊게 눌러쓴 십여 명의 무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남궁린은 상대에 대해 기억해 내려 애섰으나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분위기로 보아 결코 호의를 가지고 접근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와 그대들은 안면이 없는 듯하니, 따로 볼일이 없다면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오.”
남궁린이 공력이 실린 목소리로 상대를 위협했다.
하지만 백발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섭섭하군그래. 대명호에서 우리 아이들이 제법 큰 신세를 졌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설마 벌써 잊은 것인가?”
순간 남궁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창!”
그렇다 백발 사내는 바로 동창의 첩형관 조문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기회를 받은 조문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진운룡과 남궁린 등을 처리하기 위해 곧장 제남으로 달려온 것이다.
일단 제남의 상황을 살핀 후 움직이려 봉황산에 대기하고 있던 중에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와 보니 이렇게 그가 찾던 사람 중 하나인 남궁린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호위들도 거느리지 않은 채 말이다.
“하하하, 이제야 기억이 나는 모양이군그래. 이거 수고를 덜어 줬으니 일단 감사해야겠군. 그리고 자네 목숨은 고맙게 받아 가도록 하지.”
의외의 상황에 남궁린과 홍혜란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모자란데, 동창 무사들에게 발목까지 잡히게 됐으니 그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 봤던 하륜이라는 자보다 위다!’
남궁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문의 경지는 얼핏 봐도 특무창위를 이끌던 하륜이란 자보다 윗줄이었다.
그 하륜조차도 남궁린이 감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조문 역시 피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피의 권능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남궁린이 맞서기엔 벅찬 상대였다.
“동창이 이제는 이렇게 대놓고 무림인들을 핍박하는 것인가요? 그대들이 비록 조정과 백성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지 몰라도 이토록 노골적으로 무림을 도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모르는가요?”
홍혜란이 매서운 눈초리로 조문을 노려봤다.
“후후, 그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 나도 이런 조잡한 방식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야.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말이지.”
조문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가 제독 육환에게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궁린과 진운룡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가 없었다.
홍혜란이 이를 악물었다.
뒤에선 진운룡이 쫓아오고 앞은 조문이 막고 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결국엔 피의 권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남궁린의 정체는 숨기면서 진운룡을 함정에 빠뜨리고 소은설을 빼돌리기 위해 공들여 진행해 온 모든 계획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짜증과 분노가 동시에 그녀의 머리를 채웠다.
“하나만 묻죠. 동창이 어떻게 피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홍혜란의 물음에 조문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년이 어찌 피의 권능을 알고 있단 말이냐?”
그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홍혜란도 지지 않고 살기를 흘렸다.
“흥! 어차피 네 년놈들을 모두 제압하고 물어보면 될 일.”
드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조문의 창백한 피부 위로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