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혈룡전 4권 (82화)
3장 소은설의 죽음 (1)/
“진운룡!”
홍혜란이 이를 갈며 진운룡을 노려봤다.
그녀의 시선이 진운룡의 옆구리에 걸쳐 있는 홍무생에게로 향했다. 홍무생의 두 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정녕……. 네가 혜란이란 말이냐!”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 피부 밖으로 불거져 나온 핏줄, 저 모습이 어떻게 자신의 사랑스런 손녀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단 말인가.
충격을 받기는 당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궁린, 저 아이까지……….”
정파 제일의 후기지수이며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 추앙받던 남궁린이다. 그가 뭐가 아쉬워 사공을 익히고 음모를 꾸민단 말인가.
진운룡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직접 보고서도 못 믿겠다는 말인가? 아마 둘 다 혈신대법을 받은 모양이군. 결국, 그대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아이들이 나와 같은 괴물이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홍무생과 당요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홍혜란과 남궁린의 모습은 진운룡의 말대로 괴물과 다름 없었다.
진운룡의 말이 사실이라면―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홍혜란과 남궁린이 피를 흡수하는 사공을 익혔다는 것이고, 그 말은 즉, 두 사람이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참사들을 일으킨 암중 세력과 결탁을 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열에 아홉은 그것이 맞을 것이다.
그들이 오늘 일을 꾸몄다는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소은설과 진운룡의 말이 맞다면, 홍혜란과 남궁린은 그녀를 납치하고 제갈무진을 죽여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 된다.
그들이 노린 것은 빤했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홍무생과 당요가 진운룡과 상잔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암중 세력에게 있어서 진운룡은 손톱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였다.
진운룡을 잡기 위해 꾸민 음모에 홍무생과 당요가 놀아난 것이다.
“혜란아…… 대체 무엇 때문에 네가…….”
홍무생이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이 부족하기에 암중 세력과 결탁하고 사공을 익혔단 말인가.
홍혜란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흥! 할아버지는 여인인 제가 강호에서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사내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제 외모뿐이에요. 앞에서는 어지간한 사내보다 낫다는 둥, 풍신의 손녀답게 대단하다는 둥,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지만, 무림맹이나 개방에서 중요한 직책과 역할을 맡는 것은 모두 사내들의 몫이죠. 저는 더 이상 그런 눈요기꺼리 인형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혜, 혜란아…….”
홍무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손녀가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홍혜란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렸다.
“그렇다고 어찌 사공을 익히고 무고한 이들을 해치는 무리와 결탁한단 말이냐! 제갈가의 아이를 죽인 것도 정녕 네 짓이냐?”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이 모든 일의 원흉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홍무생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자신의 손녀가 이처럼 악독하고 교활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결코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부인할 필요는 없겠지요.”
홍무생의 얼굴에 한탄이 어렸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부덕의 소치로구나…….”
힘없는 목소리로 홍무생이 고개를 떨궜다.
손녀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큭큭큭, 정말 못 봐주겠군.”
그때 조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조손 간의 오붓한 대화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워낙 바쁜 몸이라 말이오. 먼저 용무를 좀 해결할 테니 풍신께서 이해 좀 해 주시오, 후후.”
짐짓 무림 선배에게 예의를 차리는 양 조문이 홍무생에게 점잖게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무림을 호령하는 그 대단한 십이천이 결국 자신의 피붙이에게 뒤통수를 맞는 모습을 보니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나저나…….”
조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홍무생과 당요를 허리에 끼고 있는 진운룡에게로 향했다.
“네놈이 바로 그 진운룡인 모양이로구나! 후후후, 이거 오늘 내게 행운이 따라 주는 모양이군! 나를 제남까지 오게 만든 주인공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만나다니 말이야.”
진운룡이야말로 조문의 진정한 원수이자 목표였다.
동창의 일을 방해하고 자신을 이 지경까지 내몬 장본인이 바로 진운룡이었기 때문이다.
진운룡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사실 고마워할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
혈신대법과 관계된 자들이 셋씩이나 나타났으니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그만큼 더 많아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게 좀 많은데 누가 먼저 입을 열겠나?”
진운룡은 당요와 홍무생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무덤덤해서 눈앞에 악귀의 모습으로 버티고 선 홍혜란과 남궁린, 조문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하하하! 이거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접해 보니 제법 마음에 드는군그래. 만일 네놈이 우리 일을 망치고 수하들을 죽이지만 않았다면 당장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홀로 십이천 둘을 제압한 자예요! 혼자 상대하는 것은 무리죠. 어차피 놈은 우리의 공동의 적이니 일단 힘을 합쳐 놈을 먼저 쓰러뜨리도록 하죠.”
홍혜란의 제안에 조문이 시선을 돌렸다.
“십이천 둘을? 그러고 보니…….”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홍무생과 당요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요는 단전에 구멍이 뚫리다시피 큰 상처가 있었고, 홍무생은 오른팔이 어깨부터 잘려 있었다.
이곳에 도착할 당시 진운룡이 두 사람을 허리에 끼고 온 것이나, 그들과의 대화를 살펴볼 때 두 사람을 그리 만든 것이 바로 진운룡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문과 홍혜란이 눈을 마주쳤다.
조문은 결코 자신의 주제를 모르거나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십이천 둘을 혼자서 죽이지도 않고 제압할 정도라면 진운룡의 능력은 그가 보고 받은 것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대명호에서 동창이 노린 것은 진운룡이었고, 남궁린은 그저 휘말린 것뿐이다.
“적의 적은 동지라 했던가? 좋아, 일단 우리 일은 뒤로 미루고 놈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조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의논은 다 끝났나?”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진운룡이 말했다.
“건방진 놈!”
조문이 그대로 진운룡을 향해 돌진했다.
츠츠츠츠!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핏빛 뇌전이 어려 있었다.
“하앗!”
기합과 함께 조문의 양손에서 뇌전 다발이 진운룡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쩌저저저적!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동시에 홍혜란과 남궁린도 움직였다.
홍혜란은 핏빛 촉수를 채찍처럼 길게 뻗어 냈고, 남궁린은 피처럼 붉게 물든 검강을 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진운룡을 중심으로 피의 소용돌이가 치는 것만 같았다.
강력한 세 사람의 공격이 앞에서 진운룡은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해 보였다.
순간 진운룡의 신형이 분열했다.
스스스스!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진운룡이 세 가지 공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잔상이 남아 마치 세 명의 진운룡이 있는 듯 보인 것이다.
콰콰콰콰쾅!
모든 것을 파괴할 것처럼 무섭게 몰아치던 세 사람의 공격이 벽에 막힌 듯 진운룡의 장력에 터져 나갔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조문의 핏빛 번개가 더욱 굵고 선명해졌다.
홍혜란과 남궁린의 공격 역시 더 거세졌다.
빠아아앙!
쩌어어억!
콰콰콰콰쾅!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세 사람의 공격이 이어졌고, 진운룡의 모습은 폭발과 흙먼지에 묻혀 버렸다.
그럼에도 조문과 홍혜란, 남궁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마치 광인처럼 조문은 괴성을 질러 대며 연신 뇌전을 쏘아 댔다.
이 정도로 진운룡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위로 홍혜란이 쏘아 낸 수십 가닥의 촉수가 꽂혔다.
콰콰콰콰콰쾅!
세 사람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반 각 가까이 계속 되었을 때였다.
폭염 속에서 한 가닥 빛줄기가 번뜩였다.
촤아아악!
동시에 공간이 빛줄기를 따라 세로로 갈라졌다.
핏빛 뇌전도 수십 가닥 촉수도, 남궁린이 쏘아 낸 검강도 공간과 함께 잘려 나갔다.
번쩍!
곧이어 세 가닥의 빛줄기가 공간이 잘린 틈을 뚫고 세 사람에게 쏘아져 왔다.
“젠장!”
조문과 홍혜란, 남궁린이 이를 악물고 급히 빛줄기를 막았다.
쾅! 쾅! 쾅!
세 개의 폭음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고, 세 사람은 술 취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세 사람의 시선에는 경악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진운룡이 장검을 빼 든 채 오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강력했던 세 사람의 공격 속에서도 진운룡은 단 한 점의 상처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 괴물이구나!”
조문이 혀를 내둘렀다.
“크윽! 이럴 수가!”
남궁린의 입가에는 핏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그로서는 진운룡의 일격을 막아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홍혜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운룡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이 정도라면 일 사령이 나선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지 않은가.
이 상태로는 진운룡을 없애는 것은커녕 온전히 달아나는 것조차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때 그녀의 눈에 혈도가 점해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은설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홍혜란의 머릿속에 이 위기를 벗어날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다.
‘계집을 인질로 삼으면 놈도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할 거야!’
지금까지의 정보로 볼 때, 소은설이라는 계집은 진운룡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필사적으로 쫓아온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 계집을 인질로 잡으세요!”
홍혜란이 소은설 근처에 주저앉아 있던 남궁린에게 급히 소리쳤다.
홍혜란의 의중을 파악한 남궁린이 즉시 소은설을 덮쳤다.
“어딜!”
홍혜란의 속셈을 눈치챈 진운룡이 번개처럼 검을 휘둘렀다.
번쩍!
은빛 섬광이 공간을 가로질러 남궁린의 등을 향해 쏘아졌다.
방금 전의 위력을 생각했을 때 이대로 직격을 당하게 되면 남궁린의 몸이 그대로 쪼개질 것이 틀림없었다.
콰아아아앙!
“으음!”
하지만 폭음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간 것은 홍혜란이었다.
몸을 날려 진운룡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진운룡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그 틈에 남궁린이 소은설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