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혈룡전 4권 (83화)
3장 소은설의 죽음 (2)/
한편, 소은설은 진운룡이 도착한 이후 남궁린 등의 경계가 허술해지자, 혈도를 풀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홍혜란이 직접 손을 쓴 것이기에 불가능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한데 놀랍게도 그녀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몸 안에 내기를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혈도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아마도 홍혜란이 그녀의 능력을 너무 우습게 보고 대충 점혈해 놓은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진운룡과 홍혜란 등이 격돌하는 사이 소은설의 몸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마침내 손과 발이 조금씩 움직이게 됐다.
‘됐어!’
소은설은 이를 악물고 온몸에 기운을 돌렸다.
홍혜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라버니! 그 계집을 인질로 잡으세요!”
동시에 남궁린이 소은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은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십여 장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이대로라면 남궁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소은설이 있는 곳까지 도착할 것이다.
잠시 멈칫했던 남궁린이 홍혜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곧장 몸을 날렸다.
싸움을 하면서도 계속 소은설을 주시하고 있었던 진운룡이 남궁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번쩍!
방금 전 남궁린을 비롯한 세 사람을 일 수에 물러서게 한 강력한 섬광이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안타깝게도 폭음과 함께 날아간 것은 남궁린이 아닌 홍혜란이었다. 그녀가 온몸을 던져 진운룡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그사이 남궁린은 소은설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남궁린이 소은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소은설은 그야말로 절박한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투둑!
갑자기 그녀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움직임을 가로막던 혈도가 마치 둑이 터지듯 뚫려 버렸다.
그녀는 방향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앞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으아아아아!”
남궁린의 손가락이 그녀의 뒤쪽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엇!”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남궁린이 잠시 멈칫했다.
설마 소은설이 점혈을 풀고 달아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이 소은설에게는 천금과도 같았다.
그녀는 죽자 사자 진운룡이 있는 쪽으로 내달렸다.
현재 이곳에 강기가 날아다니는 살벌한 전쟁터라는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놓치면 안 돼! 잡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홍혜란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소은설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남궁린과,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던 소진태가 급히 소은설을 쫓았다.
“이리로!”
그때, 소은설을 계속 주시하며 틈을 보고 있던 적산이 움직였다.
“젠장!”
남궁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산이나 자신이나 소은설과의 거리는 비슷했다.
하지만, 신법은 그가 앞선다.
문제는 소은설이 적산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은설의 무공 실력은 형편없었으나, 신법은 제법 훌륭했다.
도둑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달아나는 것이니 당연하리라.
이대로라면 적산이 먼저 소은설을 확보할 게 분명했다.
물론, 적산은 남궁린의 상대가 아니었기에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소은설은 진운룡에게 당도하고 말 것이다.
남궁린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고, 적산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바로 그 순간.
푸욱!
그 일은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났다.
허공으로 흩날리는 핏물과 함께 모든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안 돼!”
홍혜란의 얼굴에 절망이 어리고, 진운룡의 두 눈에 분노의 화염이 일었다.
남궁린과 적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동작을 멈추고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소은설이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가슴에는 어느새 한 자루 검이 꽂혀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너무나도 빨간 선혈이 흘러나와 마치 현실이 아닌 듯 느껴졌다.
“이런 멍청한! 대체 왜!”
홍혜란이 경악 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검의 손잡이로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진 곳에는 조문이 오른손을 들어 올린 채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소은설에게 검을 던진 것이다.
* * *
“네, 네놈이 왜?”
홍혜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문을 손가락질 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운룡의 능력이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곳을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은 소은설을 인질로 잡는 것뿐이었다.
한데 어리석게도 조문이 그 여지를 보기 좋게 없애 버린 것이다.
“큭큭큭, 어차피 난 여기서 저 진 가 놈을 없애지 못하면 모든 게 끝이야. 이년을 인질로 잡아서 도망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이지.”
조문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후후, 그리고 나 혼자 상대하기에는 저놈이 좀 버겁거든. 저년을 인질로 삼아서 너희 둘이 달아나면 진 가 놈을 죽일 방법이 없단 말이지. 큭큭큭, 그러니 너희 놈들도 딴생각할 여지를 없애 버린 것이다.”
홍혜란과 남궁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마디로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진운룡과 싸우도록 만들기 위해 소은설을 죽였다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런 개 같은!”
“큭큭큭, 이 상황에서 나와 싸울 만큼 어리석지는 않겠지? 너희도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홍혜란이 입술을 깨물며 화를 삭였다.
조문의 말대로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내 모든 걸 앗아 간, 저 진 가 놈 역시 소중한 것을 잃는 아픔을 겪게 해 주고 싶었거든.”
씨익!
번들거리는 눈으로 조문이 진운룡을 바라봤다.
진운룡은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소은설에게서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떠냐? 네놈도 이제 내 심정을 조금은 알겠지?”
진운룡은 조문을 무시한 채 천천히 소은설에게 다가왔다.
홍혜란과 남궁린 조문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진운룡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공포.
뒤통수로부터 등골을 타고 온몸으로 번지는 저릿한 무언가가 그들을 스스로 움츠러들게 했다.
진운룡의 눈은 여전히 소은설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어떤 것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소은설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맥이 잡히지 않았다.
심장이 관통되었으니 살아 있을 리 만무했다.
진운룡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겹쳐졌다.
품 안에서 제갈여령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그가, 백 년이 지난 후 다시 그녀와 똑같이 닮은 여인을 지켜 내지 못하고 눈앞에서 잃고야 말았다.
소은설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홍빛 피가 진운룡의 두 눈동자를 빨갛게 물들였다.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광기가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드드드드드드드!
숨조차 쉴 수 없는 무겁고 지독한 살기가 진운룡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윽…….”
여기 있는 이들 중 무공이 가장 약하다고는 하나, 이미 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남궁린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릴 정도로 압도적이고 강력한 살기였다.
그 위압감에 홍혜란과 조문조차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 소중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모두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진운룡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과연 그럴까?”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진운룡의 두 눈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로지 이 아이만이…… 나를 막을 수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홍혜란이나 조문처럼 악귀로 변해 있었다.
아니, 그들보다 더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모습. 아수라의 마귀가 세상에 현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가시처럼 사방을 향해 뻗고, 시체처럼 창백하고 하얀 얼굴에 송곳니는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길고 날카롭게 솟아 있었으며, 길게 찢어진 핏빛 두 눈은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이제 이 아이가 죽었으니 너희는 과연 어떻게 나를 감당하겠느냐?”
순간, 홍혜란과 조문, 남궁린 세 사람은 마치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