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혈룡전 4권 (84화)
3장 소은설의 죽음 (3)/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공포가 모두를 덮쳤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곳을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육신은 그들의 의지를 배신했고, 혼백마저도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으……… 으아아아아아! 어, 어차피 네놈을 없애지 못하면 나, 나는 죽은 목숨이다! 어, 어디 한 번 해보자!”
턱을 더덕거리며 조문이 검을 겨눴다.
그의 눈에도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미친!”
홍혜란이 이를 갈며 붉은 기운을 끌어 올렸다.
어차피 지금 진운룡의 기세를 볼 때, 달아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로지 하나!
남궁린도 입술 사이로 핏물을 흘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진운룡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 그들을 향한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마치 거대한 산이 버티고 있는 듯했다.
구구구구구구구구!
진운룡이 발산해 내는 살기로 인해 대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
광소성과 함께 어마어마한 기파가 주변을 덮쳤다.
콰콰콰콰콰콰쾅!
“크윽!”
“이익!”
홍혜란을 비롯한 세 사람은 기파에 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지, 진을 펼쳐라!”
조문이 동창의 위사들에게 명했다.
동시에 열세 명의 위사가 진운룡을 둘러쌌다.
그들은 진운룡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살기를 받아 내면서도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남궁린보다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크으윽! 그, 그들은 실혼인(失魂人)들이다! 혈신대법을 받았으나, 동시에 강시대법도 받은 자들이지.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되 아무런 고통도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오, 오로지 내 명령만 따르지!”
그제야 조운에게 스스로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쳤던 모습과 진운룡의 살기에도 비교적 잘 버틴 이유가 이해됐다.
의지가 없고 오로지 조문의 명에만 따르는 인간의 육신을 가진 강시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어, 어디 실혼인들이 펼치는 파혼멸쇄진(破魂滅碎陳)도 막아 낼 수 있는지 보자!”
쿠우우우웅!
동시에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어마어마한 압력이 진운룡을 내리눌렀다.
파혼멸쇄진은 동창이 무림의 초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비장의 진법으로 황실비고에 있는 수많은 무공 서적과 기문진법들의 정수를 취합한 결과물이기에 소림의 나한진이나 개방의 타구진과 비교해도 그 위력을 자신할 만큼 강력한 진법이었다.
진법이 발동하면 그 중심에 있는 이는 온몸을 수천 근의 쇳덩이가 내리누르는 듯한 거대한 압력을 느낀다.
조문은 파혼멸쇄진 안에서라면 제아무리 진운룡이라 해도 운신이 쉽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 진운룡의 신형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엇!”
깜짝 놀란 조문과 홍혜란이 진운룡의 종적을 찾기 위해 재빨리 사방을 훑었다.
콰드득!
진운룡이 나타난 곳은 진의 우측에 있던 실혼인 바로 앞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실혼인의 머리통을 수박을 으깨듯 간단히 부숴 버렸다.
실혼인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뇌수와 피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너무도 쉽게 실혼인 하나를 해치운 진운룡의 신형이 다시 한 번 사라졌다.
진운룡은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또 다른 실혼인 앞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퍼억! 콰득!
이번에는 두 명의 실혼인이 진운룡에게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의 잔인한 손속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진운룡은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실혼인들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다.
진운룡의 움직임은 너무도 빨라서 홍혜란과 조문이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였다. 파혼멸쇄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있었다.
“이, 이놈!”
비장의 수였던 파혼멸쇄진이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리자 조문이 그대로 진운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의 수족이자 남아 있는 전력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실혼인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더는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씨익!
순간, 진운룡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콰르르르릉!
동시에 천둥소리와 함께 진운룡을 중심으로 거대한 핏빛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우읍!”
소용돌이로 인한 강력한 인력에 조문이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엉거주춤 서 있던 홍혜란과 남궁린도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급히 공력을 끌어 올려 버텼다.
지름이 십 장이 넘는 거대한 소용돌이는 단숨에 남아 있던 실혼인은 물론,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까지 집어삼켰다.
살아남은 실혼인들은 소용돌이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소용돌이의 강력한 흡인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콰드드드득!
퍼억!
촤아아아아아!
곧이어 놀랍게도 핏빛 소용돌이 안에 빨려 든 실혼인들과 그 시신들이 허공에서 뒤틀리더니 어느 순간 터져 나가며 피안개로 화했다.
조문과 홍혜란은 얼이 반쯤 빠진 모습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열세 명의 실혼인이 순식간에 피안개로 화하는 모습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를 건드렸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진운룡의 두 눈에 광기가 어렸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던 피안개가 길게 나선을 그리며 진운룡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슈아아아아악!
온통 핏빛으로 물든 소용돌이 속에서 두 개의 혈광만이 번득거렸다.
피 안개가 모두 진운룡에게 흡수되기까지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홍혜란과 남궁린은 이미 싸울 의지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멀리서 지켜보던 홍무생과 당요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몸을 떨었다.
“마치……. 피, 피에 굶주린 한 마리 혈룡 같구나…….”
잠시 동안 눈을 감은 채 피의 잔향을 음미하던 진운룡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너희들 차례구나…….”
다음 순간 진운룡이 조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속도가 너무도 빨라 조문이 진운룡의 움직임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의 지척에 도달한 뒤였다.
“이익!”
조문이 이를 악물며 급히 붉은 뇌전을 쏘아 냈다.
쩌저적!
하지만 붉은 뇌전은 진운룡의 몸에 닿지도 못한 채 마치 벽에라도 막힌 듯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콰악!
동시에 진운룡의 오른손이 조문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커헉!”
피할 틈도 없이 조문은 너무도 쉽게 진운룡에게 자신의 목줄기를 내줬다. 그 순간 조문은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푸욱!
진운룡의 왼손이 조문의 왼쪽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마치 두부처럼 아무런 막힘 없이 그대로 틀어박혔다.
“크아악!”
조문이 피를 토해 내며 비명을 질렀다.
“네놈이 저 아이의 심장에 구멍을 뚫었으니, 나도 네놈의 심장을 취해야겠다.”
으드득!
다음 순간, 진운룡의 왼손이 심장과 함께 조문의 왼쪽 가슴에서 뽑혀 나왔다.
“커허억!”
동시에 왼쪽 가슴의 구멍으로부터 핏줄기가 진운룡에게 빨려 들어왔다.
슈슈슈슈슈!
몸이 쪼그라듦과 함께 조문의 두 눈에서 서서히 초점이 사라졌다.
진운룡의 손에 들린 조문의 심장 역시 차츰 말라 가더니 결국에는 먼지처럼 부서져 버렸다.
푸스스!
곧이어 진운룡의 시선이 남궁린에게로 향했다.
“나, 나는 그, 그녀를 주, 죽일 생각이 없었소!”
남궁린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진운룡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변명이었다.
“허억!”
어느새 진운룡은 남궁린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퍼억!
남궁린의 왼쪽 가슴에도 구멍이 뚫렸다.
스스스스스!
“끄으으으…….”
진운룡은 그대로 남궁린의 피도 흡수했다.
“후후, 악마와 손을 잡았으니, 악마에게 죽는 것 또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퍼석!
남궁린의 심장이 타다 남은 숯처럼 부서졌고, 목내이로 변한 육신은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 네년만 남았구나…….”
진운룡의 시선이 홍혜란에게 향했다.
그녀야말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네년은 이들처럼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진운룡이 천천히 홍혜란을 향해 걸어갔다.
홍혜란은 혼백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녀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궁린과 조문은 죽었고, 할아버지 홍무생도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아 버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포가 그녀의 의식을 잠식할 때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 잠깐!”
홍혜란이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진운룡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 잠깐! 그녀를 살릴 방법이 있어요!”
진운룡의 양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죽은 사람을 살리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홍혜란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한다 여겼다. 진운룡의 오른손이 홍혜란의 목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