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85화 (85/150)

# 85

/혈룡전 4권 (85화)

3장 소은설의 죽음 (4)/

“사, 사실이에요! 죽은 지 사흘이 지나지 않으면 가능해요! 날 살려 준다면 그 방법을 말해 줄게요.”

홍혜란의 필사적인 외침에 진운룡의 움직임이 멈췄다.

진운룡의 핏빛 눈동자가 홍혜란을 꿰뚫을듯 노려봤다.

그 강렬한 시선 앞에 홍혜란은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저 아이를 살릴 수 있다?”

진운룡의 목소리는 의심이 전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어, 어차피 내 말이 거짓이라면 당신에게 죽을 텐데, 내, 내가 왜 없는 말을 지어내겠어요?”

홍혜란의 표정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진운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홍혜란의 표정을 보아 결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진운룡에게는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낼 방법이 있었다.

바로 제령안이었다.

문제는 홍혜란 역시 다른 놈들처럼 금제가 걸려 있을 경우 원하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고 죽게 될 수도 있었다.

자칫 소은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안전한 방법은 역시 거래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녀를 살려 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소은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만일 홍혜란이 살기 위해 농간을 부린 것이라면 그때 죽여도 됐다.

고민을 끝낸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만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를 살려 주마. 하지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홍혜란을 응시했다.

“거짓이라면 그땐 일찍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지.”

서늘한 진운룡의 목소리에 홍혜란은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 알았어요…….”

“저 아이를 살릴 방법은?”

“그녀를 사흘 안에 주, 주인께 데려가면 살릴 수 있어요!”

진운룡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주인이란 자에게 데려가야 한다?”

진우룡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일었다.

홍혜란의 말은 곧 소은설을 적의 소굴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주인이라면 너희에게 혈신대법을 전해 준 자를 말하나?”

“그, 그래요! 진정한 피의 주인이신 그분께서는 자신의 피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어요. 죽은 자라 해도 그분의 피를 마시면 다시 되살아나게 돼요!“

사실이라기엔 너무도 바보 같은 이야기였다.

늦은 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찌 보면 진운룡 본인이야말로 가장 믿기 힘든 존재 중 하나.

사람의 피를 마셔야 살 수 있고, 사람의 피를 마시는 한 불사의 존재라니…….

불멸이야말로 부활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홍혜란이 말하는 주인이 불사신을 만들어 내는 혈신대법을 퍼뜨린 장본인이라면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이 없었다.

또한 홍혜란이 거짓말을 하려 했다면 이보다는 좀 더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었을 것이다.

“좋아, 널 믿어 보기로 하지. 네 주인에게로 안내해라.”

진운룡이 소은설의 시신을 품에 안은 채 말했다.

그녀의 시신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자, 잠깐! 당신을 데리고 갈 수는 없어요. 주인께는 나와 그녀만 가야 해요!”

홍혜란이 급히 말했다.

자신들의 본거지로 진운룡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홍혜란은 외부인에게 조직의 비밀 거점을 알린 배신자가 된다. 주인에게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진운룡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얼 믿고 소은설을 혼자 적의 소굴로 보낸단 말인가.

“주군, 저 계집의 말은 믿을 수 없소.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분명하오. 소은설 소저가 죽은 것도 결국 저년의 음모 때문이 아니오?”

적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을 데려가면 어차피 나는 죽은 목숨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굳이 살릴 이유가 없잖아요!”

홍혜란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결국 살기 위해서였다.

진운룡의 손에 죽거나, 주인의 손에 죽거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굳이 소은설을 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소은설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날 죽이고 그녀 역시 죽게 놔둘 것인지 둘 중에 택일하세요!”

홍혜란으로서는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흥! 네 주인이란 개잡놈의 피가 사람을 살린다고? 그렇다면 내 피는 사람을 신으로 만들 수 있겠다!”

“감히!”

적산의 비아냥에 홍혜란이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가만…… 내 피를 준다?!”

순간, 진운룡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번득였다.

그것은 조금은 엉뚱한, 아니, 하나의 너무도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었다.

그저 적산의 말에 갑자기 떠오른 그런 뜬금없는 어찌 보면 너무 억지스러운 생각이었다.

‘홍혜란의 주인이라는 자의 피가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혹시 내 피도?’

어떠한 근거나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소은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리라.

진운룡 스스로도 이 생각이 얼마나 엉뚱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진운룡은 즉시 소은설을 바닥에 누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에 스스로 상처를 냈다.

상처로부터 선홍빛 핏물이 흘러내려 소은설의 입술로 떨어졌다.

그제야 진운룡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홍혜란이 조소를 지었다.

“아무 피나 되는 게 아니에요. 오로지 우리 주인의 피만 그녀를 살릴 수 있어요. 게다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피를 먹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주인께서 대법을 시행해야 해요.”

그녀는 주인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것에는 혈신대법에 맞먹는 진과 제물이 필요했다.

한데, 진운룡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의 피를 소은설의 입속에 연신 떨구고 있으니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반 시진 정도를 피를 먹였으나 소은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피부는 점점 더 죽어 갔고, 육신은 식어 갔다.

하지만 진운룡은 피를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소은설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여…… 여기는……. 나는 분명히…….”

그녀는 분명 심장이 검에 뚫려 쓰러졌다.

한데, 그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령……! 대체 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자꾸만 감겨지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누군가 자신을 품에 안고 다급히 외치고 있다.

‘당신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얼굴은 진운룡의 것이었다.

“여령!”

진운룡이 자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미안해요…….”

소은설의 의지와는 다른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대체……….’

소은설은 혼란스러웠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 구석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아팠다.

“운랑…… 당신이 살인자가 되는 건 싫어요……. 제발…… 저를 위해 약속해 줘요.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또다시 그녀의 의지와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쩐지 그 간절함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진운룡의 너무도 슬퍼 보이는 눈빛이 그녀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제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진운룡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약속하겠소…….”

진운룡의 목소리에는 처절한 아픔이 서려 있었다.

소은설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고, 고마워요…….”

순간, 소은설의 의식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그녀는 아득한 현기증에 신음을 터뜨렸다.

암흑의 긴 동굴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던 그녀의 의식이 멀리 보이는 한 줄기 빛을 향해 쏘아졌다.

번쩍!

의식이 빛줄기와 만나는 순간, 강력한 섬광이 터졌다.

“운랑……….”

*   *   *

진운룡은 계속해서 소은설의 입으로 자신의 피를 떨어뜨렸다.

“헛수고예요! 주인께 데려가지 않으면 그녀를 절대 살릴 수 없어요!”

홍혜란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이러다 소은설이 깨어나지 못하게 되면 진운룡에게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군! 저년이 주군을 우롱한 것이 분명하오! 저년을 당장 요절내고 저년의 배후 세력까지 쓸어버려 낭자의 복수를 합시다!”

적산이 흥분된 얼굴로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내 말은 사실이에요! 우리 주인은 분명 그녀를 살릴 수 있어요! 단, 주인께서 대법을 함께 시행해야 해요. 게다가 지금 그녀는 피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 텐데 그렇게 떨어뜨려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요!”

홍혜란의 말에 진운룡이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미 죽은 소은설이 피를 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소은설의 왼쪽 가슴의 상처가 보였다.

심장을 그대로 꿰뚫은 상처였다.

진운룡의 두 눈이 번득였다.

‘심장!’

그는 급히 상처로 자신의 피를 흘려 넣었다.

그저 막연한 기대에 불과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기대가 전부였다.

진운룡의 붉은 피가 소은설의 상처로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똑!

그 핏방울이 상처 속으로 파고들어 구멍 뚫린 심장에 닿았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심장에 있던 소은설의 피와 진운룡의 피가 만나며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두 피가 섞이며 마치 용암처럼 붉게 빛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곧이어 심장에 뚫린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뚫린 구멍은 점차 새로운 살로 매워졌고, 쪼그라들었던 심장 역시 점점 더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두근!

“시, 심장이!”

적산이 동그란 눈으로 놀라 소리쳤다.

소은설의 왼쪽 가슴이 들썩인 것이다.

진운룡의 표정도 변했다.

그는 아직 믿지 못하는 얼굴로 상처를 향해 피를 더 흘려보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진운룡의 동작이 멈췄다.

두근!

분명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소은설!”

진운룡은 즉시 그녀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두근!

분명 느리지만 심장이 움직이고 있었다.

“주군, 소 낭자가!”

적산의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봤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운룡은 얼른 다시 자신의 피를 상처로 흘려보냈다.

효과가 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점점 심장 박동이 힘차고 빠르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저, 저럴 수가!”

홍혜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은설과 진운룡을 바라봤다.

‘어째서…… 저자의 피가…….’

주인이 아닌 다른 이가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대법도 없이 진운룡은 자신의 피로만 소은설을 살려 냈다.

홍혜란으로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으…… 으음…….”

그때, 소은설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진정 소은설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홍혜란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저런 일이!”

홍무생과 당요의 반응도 홍혜란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군, 소 낭자가 살아났소! 하하하하, 역시 주군이 천하제일이요!”

반면 적산은 신이 나서 평소의 그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진운룡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홍혜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피를 소은설에게 주기는 했으나, 실제로 소은설을 살릴 수 있으리라고는 자신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운랑…….”

소은설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진운룡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소은설이 진운룡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제갈여령이 그랬던 것처럼!

진운룡의 가슴은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가 다시 용암처럼 뜨거워졌다가를 몇 번 반복했다.

오래전 제갈여령을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냈을 때 그녀의 목소리와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은설의 목소리는 애초에 제갈여령과 같았다.

그래서 혈귀곡부터 진운룡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마치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간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진운룡의 감각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진운룡의 악귀 같던 모습도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여…… 령…….”

진운룡은 자신도 모르게 제갈여령의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소은설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하던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잡혀 갔다.

“후아아…… 후욱……!”

폐에 공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는지 소은설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저, 정말 살아났어.”

넋이 나간 얼굴로 홍혜란이 말했다.

“소은설!”

진운룡이 조심스럽게 소은설을 일으켰다.

“다, 당신이……?”

소은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진운룡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소은설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궁린과 조문의 시체, 그리고 한쪽에서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홍혜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분명……….”

기억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홍혜란에게 납치되었던 일, 홍혜란과 남궁린이 진운룡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달아난 일, 그러다가 갑자기 날아온 검에 왼쪽 가슴이 관통 당한 일까지…….

‘어떻게…….’

소은설은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검에 뚫린 상처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통증도 상처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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