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혈룡전 4권 (86화)
3장 소은설의 죽음 (5)/
“정신이 드느냐?”
진운룡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은설의 시선이 진운룡에게 향했다.
순간, 방금 전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도 생생했던 그 꿈.
마치 언젠가 그녀가 그런 상황을 겪어 본 듯 어쩐지 낯설지 않은 장면들…….
동시에 그녀의 가슴속에서 아련한 슬픔이 밀려왔다.
진운룡의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느껴졌던 것이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소은설의 안색이 좋지 않자 진운룡이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힘없는 목소리로 소은설이 물었다.
“이봐, 소 낭자! 너 지금 죽었다 살아났다고!”
적산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주, 죽어?”
소은설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면 심장이 꿰뚫린 자신의 기억이 사실이었다는 이야기다.
한데 다시 살아나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주군께서 널 살리셨어, 자신의 피로. 주군은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해! 신! 그래, 분명 신이 지상으로 강림한 거야!”
그제야 소은설의 눈에 진운룡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진운룡의 오른손 손목에는 피가 흥건했다.
“피…… 피를? 다, 당신이?”
진운룡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적산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진운룡의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고 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피로 죽은 사람을 살리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심장이 뚫리고도 이렇게 살아 있는 자신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
“마, 말도 안 돼……. 저, 정말로 그녀를 살리다니…….”
한편, 홍혜란은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인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 믿음이 부서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주인만이 펼칠 수 있다 여긴 권능을 진운룡이 너무도 쉽게 시전 한 것이다.
더군다나 대법도 없이 그저 피만으로 소은설을 살려 내다니……. 그리고 진운룡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피를 통해 살아난 자는 생강시와 같이 이지가 있으되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소은설에게서는 그러한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진운룡의 시선이 홍혜란에게 향했다.
“야, 약속대로 나를 살려 줄 거죠?”
홍혜란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진운룡의 두 눈에 살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글세, 네가 방법을 이야기 해 준 것은 맞지만, 그 방법대로 하지 않았으니 약속이 반만 성립하는 셈이군. 그렇다면 나도 약속을 반만 지키도록 하지.”
순간, 진운룡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홍혜란 바로 앞에 나타났다.
“허억!”
놀란 홍혜란이 급히 뒤로 달아나려 했지만, 진운룡의 손이 그녀의 목 붙잡는 것이 훨씬 빨랐다
“아악!”
진운룡이 거칠게 홍혜란의 목을 잡아챘다.
“이제 걸릴 것이 없으니 너에게 궁금한 것을 알아내도록 하지.”
진운룡의 두 눈동자가 노랗게 빛났다.
제령안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아까는 혹시라도 금제가 걸려 있을 경우 소은설을 살릴 방법을 알아내기 전에 홍혜란의 머리가 터져 버릴까 하여 사용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소은설이 살아난 이상 더는 걸릴 것이 없었다.
우우우우웅!
“끄으으윽!”
제령안이 홍혜란의 뇌를 파고들었다.
홍혜란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뒤집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진운룡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다행이라 할 수 있게 홍혜란에게는 금제가 걸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남……. 천사교…….”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의식 조각들이 하나둘씩 진운룡의 뇌리로 옮겨졌다.
“끄으으…….”
홍혜란의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거의 반 각에 걸쳐 제령안을 펼친 진운룡은 홍혜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알고 있는 것이 많군.”
홍혜란은 이미 이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제령안이 그녀의 정신을 파괴해 백치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혜, 혜란아…….”
홍무생이 안타까운 얼굴로 홍혜란을 바라봤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해도 그에게는 친혈육이었다.
손녀의 처참한 모습에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진운룡은 홍혜란에게서 얻은 정보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제령안을 통해 얻은 정보들은 완전한 내용이 아닌 단편적인 조각들이었다. 조각들을 취합하고 연계해서 원하는 정보를 유추해 내야 했다.
‘일단 개봉에 이자들의 주요 거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고, 천사교가 연관이 있다는 것도 확실하군.’
놀랍게도 홍혜란이 주인이라고 칭하던 자는 천사교의 교주였다.
확실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홍혜란의 기억 속에서 천사교 교주가 개봉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처를 수시로 옮기기 때문에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으나 개봉 내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홍혜란과 그 패거리들에게 혈신대법을 펼친 장본인이었다.
그자라면 혈신대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주군, 소 낭자의 아버지는 어찌하오?”
그때 적산이 난감한 얼굴로 진운룡에게 물었다.
진운룡의 시선이 소진태에게로 향했다.
소진태는 두려운 얼굴로 진운룡의 눈치를 살폈다.
홍혜란의 기억 속에도 소진태의 상태를 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들이 한 세뇌는 영구적인 것이었다. 이제는 본래의 소진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버지…….”
소은설이 슬픈 얼굴로 소진태의 손을 잡았다.
“너, 너는 어찌 저런 무시무시한 악적과 한패가 된 것이냐!”
소진태는 소은설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진운룡은 착잡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는 이제 네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다.”
진운룡의 냉정한 말에 소은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렇게 살아 있는데 무슨 소리예요! 저는 아버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우리와 함께 움직일 수도 없다.”
앞으로 천사교 교주와 그 세력을 상대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위험하고 조심해야 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혹덩이를 달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세뇌가 된 상태지만 소은설의 아버지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마디로 처리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진운룡의 시선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홍혜란을 바라보고 있는 홍무생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봐, 거지 영감.”
진운룡의 부름에 홍무생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개방이나, 무림맹에 말해서 저 아이의 아비를 당분간 보호해 줬으면 좋겠군.”
진운룡의 말투는 어느새 평대로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감추거나 다른 이들과의 충돌을 애써 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십이천 둘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안긴 그였다.
무림맹이나 이들이 소속된 문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엔 틀린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진운룡은 이제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맘이 가는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대 손녀가 저지른 일이니, 혈육인 그대가 수습을 해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홍무생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혜란이가 저리 된 것은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내 잘못도 있으니, 그 아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나도 어느 정도 져야 하겠지……. 일단은 황보세가로 돌아가서 오늘 일을 정리한 후 그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네.”
“어떠냐, 이렇게 하면 너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지?”
소은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아버지가 안전하다는 사실은 안심이 되었으나, 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기약이 없었기에 답답하고 가슴이 아팠다.
백치가 된 홍혜란과 소진태를 데리고 일행은 황보세가로 향했다.
* * *
진운룡은 홍무생과 당요에게 자신이 소은설을 살린 일에 대해 함구하도록 했다.
아무래도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행이 황보세가에 도착하자 세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모용주란과 당요의 손녀 당소혜가 돌아와 진운룡이 제갈무진을 죽였고, 홍무생, 당요와 대치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터였다.
한데 진운룡이 당요와 홍무생과 함께 돌아온 뒤로 밝혀진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홍혜란과 남궁린이 암중 세력의 앞잡이였다는 사실도 경악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진운룡이 십이천 둘을 제압하고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당요는 단전이 파괴되어 더는 본래의 실력을 되찾을 길이 없었고, 홍무생 역시 오른팔이 잘려 나가 특유의 강맹한 장법을 다시 펼칠 수 있을 것인지 불분명했다.
어찌 보면 황보세가만이 아니라 전 무림이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게다가 남궁린의 죽음 역시 만만치 않은 파장을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그는 현 무림맹주의 손자이자 남궁세가의 후계자였다.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죽음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편, 진운룡은 곧장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혔다.
끓어오른 마기를 다스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은설의 피를 흡수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방금 죽었다 살아난 이에게 피를 달라 할 수는 없었다.
진운룡이 돌아온 후에 모용주란은 도망치듯 황보세가를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홍혜란과 남궁린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에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홍무생과 당요는 사흘 뒤 몸을 채 추스르지도 않은 채 황보세가를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황보세가에서는 진운룡과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십이천이라는 명성조차 땅에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사건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황보세가에 남아 있는 것은 그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제남에서 벌이진 이 경천동지할 사건에 대한 소식은 금방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혈룡이 등장했다!
무려 두 명의 십이천을 동시에 상대해 제압했다는 사실은 강호인들에게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게다가 이제 갓 스무 살 정도의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젊은 고수의 등장은 잠잠했던 무림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물론, 암암리에 구대문파나 세가의 수뇌부들은 진운룡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일반 무인들에게는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터였다.
어떤 이들은 신성의 등장에 환호했고, 또 다른 이들은 진운룡의 강력한 능력을 경계하고 시기했다.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운룡은 강호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