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혈룡전 4권 (87화)
4장 개봉으로 (1)/
소은설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죽음…… 그리고 부활.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감정이었다.
심장이 뚫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겪었던, 마치 현실 같던 괴이한 환영이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휘저어 놓고 있었다.
그 이후로 계속 그 상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잠을 잘 때도 기억이 꿈에 나타날 지경이었다.
그보다 심한 문제는 그날 이후로 진운룡을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 한구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쓰리다는 것이다.
‘내가 미쳐 가는 건가?’
소은설은 자신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진운룡을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워 한동안 방에서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꿈은 무얼까?’
꿈 속에서 진운룡은 자신을 여령이라고 불렀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는데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 장소는 분명 혈귀곡이었어…….’
모옥과 소나무 숲,
그녀가 혈귀곡에서 봤던 풍경과 거의 비슷했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한쪽에 있던 무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그때 소은설은 분명 심장이 꿰뚫려 죽은 상태였다.
한데 혼백이 저승으로 올라가지 않고 그런 꿈을 꾼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의 몸에 들어간 듯한―아니, 그 누군가 역시 분명 자신이었다―그 경험이 그녀를 계속 혼란스럽게 했다.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그 꿈은 지금 소은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소은설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이미 밖은 삼경이 넘어 캄캄한 밤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그녀의 콧속을 상쾌하게 했다.
하지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시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점점 깊어만 갔다.
* * *
“그 아이는 어떻게 죽었나?”
남궁진천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홍무생은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자가 감히 그 아이를…….”
남궁진천의 두 볼이 분노에 꿈틀거렸다.
남궁린이 누구던가.
남궁세가의 후계자이자 모든 후기지수들의 우상이며, 정도 무림의 기둥이 될 아이였다. 한데 그런 아이가 너무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린이 그 아이의 잘못이네. 흡혈을 하는 놈들과 한패였어. 게다가 제갈가의 자재를 죽이고 여인을 납치하기까지 했네. 자네나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야……. 진운룡 그자를 탓할 수는 없는 상황이네.”
씁쓸한 얼굴로 홍무생이 말했다.
남궁진천의 눈썹이 위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아이가 어떤 잘못을 했든, 진운룡 그자가 세가의 후계자를 죽인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이유야 어쨌든 이번 일은 분명 남궁세가, 그리고 나, 남궁진천을 향한 도전이야!”
홍무생이 착잡한 얼굴로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오랜 시간 친우로 지내 왔기에 그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 이였다.
“놈이 사대금지 중 하나인 혈귀곡에서 나왔다고 했지? 게다가 놈 역시 피를 흡수한다고 하지 않았나?”
남궁진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렇다면 진운룡 그놈 역시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홍무생은 남궁진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운룡을 징치할 명분을 얻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홍무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참사는 자신이 손녀인 홍혜란의 말만 믿고 진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도 컸다.
무림에서 정보를 다루는 최고의 단체인 개방, 그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그답지 않게 미심쩍어 보이는 요소들이 있음에도 무시해 버렸다.
사실상 진운룡은 음모의 피해자였고, 남궁린과 홍혜란은 홍무생과 당요를 이용해 진운룡을 제거하려 했던 가해자였다.
게다가 진운룡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직접 겪은 그다.
그를 적으로 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이 일로 인해 무림맹과 진운룡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강호에 거대한 폭풍을 불러 올 것이다.
“나는 자네처럼 도덕군자가 아니네……. 받은 것이 있으면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갚아야 하는 사람일세. 그게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만들었고, 세가가 지금의 성세를 누리게 된 방식일세.”
남궁진천의 표정에는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이제 와 홍무생이 무슨 말을 해도 그의 결심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강호에 풍운이 일겠구나…….’
홍무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여파가 최소한으로 가라앉기를 기원하는 것 밖에 없었다.
* * *
하남성의 성도 개봉(開封).
낙양, 서안과 함께 삼대 고도(古都)로 꼽히는 유서 깊고 번화한 도시다.
또한 물자 유통의 중심지로 상업이 발달하여 중원 각지에서 온 상인들은 물론, 서역인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무림에서 개봉은 또 다른 의미로 유명했는데, 바로 이곳이 무림 최대의 문파이자 강호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개방의 총단이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개봉 시내 한복판을 젊은 남녀 네 명이 바삐 걷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일행의 면모가 무척 특이했기 때문이다.
가장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는 사내는 외모가 그야말로 조각처럼 아름다웠는데, 마치 전설에 나오는 송옥과 반안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했다.
게다가 또 다른 사내는 머리카락이 온통 붉은색에 산발을 했고, 호리호리한 세 번째 사내는 건들거리는 것이 한량처럼 보였다.
유일하게 평범해 보이는 홍일점 여인은 무엇 때문인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헤, 개봉이라면 바로 제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입죠. 일단 저 앞에 좌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청빈각이라는 개봉 제일의 식당이 있고요. 이리로 쭉 가시다 보면 한일객잔이라는 객잔이 깔끔하고 음식 맛도 괜찮아 며칠 묶기에는 제격입니다. 에…… 또…….”
구학이 침을 튀겨 가며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 개봉 시내 곳곳을 설명했다.
그들은 바로 황보세가를 떠난 지 이레 만에 개봉에 도착한 진운룡 일행이었던 것이다.
진운룡 일행은 소은설을 구해 낸 후 황보세가에서 보름을 더 머문 뒤에 개봉으로 출발했다.
소은설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한데다가 자신의 아버지는 악적들에게 세뇌를 당했다. 게다가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때문에 그녀를 배려해서 한동안 황보세가에 머물렀던 것이다.
소은설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표정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소은설을 바라보던 진운룡이 구학에게 말했다.
“일단 하오문 분타부터 들리자.”
홍혜란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천사교와 그 교주를 찾기 위해서는 하오문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 마침 문주께서도 개봉에 계신다는 연락이 왔으니, 잘되었군요! 그럼 따라오시지요!”
구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쯧쯧, 발정난 개새끼처럼 방정맞기는…….”
구학의 경망스러운 모습에 적산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하오문 개봉 분타는 시내가 아닌 외곽 쪽에 위치해 있었다.
아무래도 개봉은 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이다 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하하! 오랜만이오, 진 공자! 이거 우리 인연이 꽤 깊은 모양이외다. 가는 곳마다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구려.”
곽지량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일행을 맞이했다.
진운룡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곽지량이 개봉에 있는 것이 그저 우연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운룡이 개봉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능글맞은 행동과 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진운룡에게 도움을 주는 이였기에 일단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래, 구학 네놈은 진 공자께 폐를 끼치지는 않았겠지?”
“아이고, 사부님.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그동안 진 공자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성심성의껏 모시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십니까?”
구학이 앓는 소리를 했다.
곽지량이 못마땅한 듯 한차례 혀를 차고는 시선을 소은설에게로 향했다.
“한데 은설이 너는 좀 괜찮으냐?”
곽지량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소진태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진운룡의 엄포로 인해 구학도 입을 다물었기에 그도 모르고 있었다.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소은설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이토록 어두운 이유는 소진태와, 죽었다 살아난 충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현재 그녀의 머릿속은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녀가 되살아나기 전 꾸었던 현실 같던 꿈 때문이었다.
그 꿈을 꾼 이후로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과 기억들이 불쑥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진운룡을 볼 때마다 마음이 크게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련한 그리움 같은 감정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혼재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잠이 들면 그때 겪었던 꿈을 다시 반복해서 꿨다.
심지어는 가끔 깨어 있을 때조차 자신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그 느낌이 무척 기이해서 그 사람의 감정과 떠오르는 기억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분명 그녀가 경험했던 일이 아님에도 실제로 일어났던 일처럼 선명하고 익숙했던 것이다.
‘내가 미쳐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은설은 덜컥 겁이 났다.
죽었다 살아난 것 때문에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혹시 최근 크게 다친 일이라도 있느냐?”
곽지량의 목소리에 소은설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물음에 소은설이 당황했다.
물론 크게 다친 일이 있다.
심장이 검에 뚫려 죽었다 살아났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곽지량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어째 안색이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