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89화 (89/150)

# 89

/혈룡전 4권 (89화)

4장 개봉으로 (3)/

“황제폐하 황사께서 납시었사옵니다!”

내관의 아룀에 가정제(嘉靖帝)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오! 그래? 어서 들라 이르라!”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을 맞이하듯 황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열리고 선풍도골의 도사 하나가 성큼성큼 어전으로 걸어 들어왔다.

도사는 황제 앞임에도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다.

“어서 오게, 황사! 그렇지 않아도 짐이 그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노라!”

황제의 두 눈동자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허허허, 폐하께서 저를 그토록 기다리고 계셨다니 소신은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

도사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내 그대 때문에 요망한 년들의 음모에서 목숨을 건졌느니라! 그대가 준 환단이 아니었다면 짐은 그년들에게 목이 졸려 죽고 말았으리라! 황사의 환단이야말로 불사에 이르는 천하의 영단(靈丹)임에 틀림없다!”

가정제는 입에 침을 튀기며 도사를 치하했다.

그가 이토록 흥분하는 이유는 얼마 전 궁녀들이 일으킨 모반 때문이었다.

십여 명의 궁녀들이 작당을 하고 가정제가 잠이 든 순간 침소에 몰래 들어가 천으로 그의 목을 졸랐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궁녀들이 아무리 목을 졸라도 가정제가 죽지를 않았다.

이렇게 되자 궁녀들은 가정제가 진정 불사의 영약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여기게 되었다.

겁먹은 그녀들 중 하나가 달아나 황후에게 이 사실을 고하게 되고, 결국 그녀들은 모두 잡혀서 능지처참 되고 말았다.

“요망한 것들!”

아직도 그때의 고통과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가정제가 치를 떨었다. 숨이 막히고 목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던 그때, 가정제는 자신이 이제 죽었구나 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한데, 그렇게 오랫동안 목이 졸려 숨을 쉬지 못했음에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황사 도중문이 연단하여 바친 선단(仙丹) 때문이라 확신했다.

“황사 연단은 어찌 되어 가고 있는가?”

가정제가 기대 어린 얼굴로 물었다.

도중문이 이번에는 불로장생뿐이 아니라 꾸준히 복용하면 신선이 될 수 있는 선단을 만들어 바치기로 했기 때문이다.

“흠…… 실은 그것 때문에 폐하를 뵈러 온 것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황제가 조바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 그것이 송구하옵게도 영생단(永生丹)을 만들 재료가 부족하옵니다.”

“무슨 재료가 부족하다? 말씀만 하라! 내 당장 구하도록 명을 내리겠다!”

잠시 뜸을 들이던 도중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실은……. 영생단에 들어갈 피가 부족하옵니다. 폐하…….”

“피라면………. 생리혈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궁녀들에게 하혈약을 먹이면서까지 모으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모자르다?”

도중문이 그간 황제에게 바친 선단에는 혼인을 하지 않은 숫처녀의 생리혈, 수은, 갓 태어난 태아의 입에 물린 핏물 등의 기괴한 재료가 들어갔다.

황제는 재료를 얻기 위해 궁녀들에게 하혈약까지 먹여 가며 생리혈을 채취했다.

사실 궁녀들이 황제를 시해하려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궁녀들이 쇠약해져 하나둘씩 죽어 가자 참다못한 그들이 어차피 죽을 거 폭군 황제랑 동귀어진 하자는 생각으로 거사를 벌인 것이다.

“물론, 생리혈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중문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만들 영생단은 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약입니다. 해서 재료 역시 조금 더 존귀한 것이 필요하지요. 일반 생리혈로는 영생단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일반 생리혈이 아니라면 어떤? 말을 해 보라.”

가정제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영생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녀들의 초경(初經) 생리혈이 필요하옵니다.”

가정제가 조금은 놀란 눈으로 도중문을 봤다.

“초경 생리혈?”

“그렇사옵니다, 폐하.”

“얼마나 필요한가? 내 당장 명을 내려 소녀들을 차출하라 이르리라!”

“아직 초경을 하지 않은 여아들로 일만 명을 모아 주소서. 그리하면 오십 알의 영생단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복용하시면 사 년 후에 폐하께서는 불로불사 하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인세의 신선이 되실 것이옵니다.”

“신선이라……. 크하하하! 짐이 신선이 된다는 말이지!”

“그렇사옵니다!”

가정제의 두 눈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좋다! 내 동창에 명을 내려 당장 오천의 아이들을 모집하라 이르겠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도중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   *   *

열 평 남짓한 객실에 소은설과 진운룡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괜찮겠느냐?”

진운룡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소은설은 어색한 얼굴로 진운룡의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요…….”

두 사람이 이렇게 진운룡의 객실에 마주 앉아 있는 것은 소은설의 피를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피를 흡수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 어느새 진운룡의 육신에 석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진운룡은 좀 더 버티려 했다.

최근 소은설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소은설이 자청해서 나섰다.

진운룡이 자신을 배려해서 일부러 피를 흡수하지 않은 채 참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던 것이다.

“그래, 그럼 시작하지.”

츠읏!

바람이 스쳐 지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소은설의 손목에서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피를 뽑을 때 드는 야릇한 느낌은 그녀를 무척 곤혹스럽게 했다.

피가 흘러 나가며 극도의 쾌감이 그녀의 온몸을 관통했다.

소은설은 입술을 깨물며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운랑…….’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그때의 환상이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

놀란 진운룡이 피를 흡수하는 것을 멈췄다.

피를 흡수하는 것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희열과 쾌감을 가져온다.

한데 갑자기 소은설이 눈물을 흘리니 그 영문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은설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슴의 먹먹함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저…… 물어볼 것이 있어요.”

머뭇거리며 묻는 소은설을 진운룡이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최근 그녀의 상태가 그날의 충격과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묻고 싶은 게 무엇이냐?”

잠시 망설이던 소은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여령이라는 이름을 아시나요?”

그녀는 스스로도 너무 터무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환상 속에서 나온 이름을 진운룡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소은설은 괜한 질문을 했다고 곧장 속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이름을 들은 진운룡의 안색이 급변했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굳은 얼굴로 진운룡이 물었다.

다소 흥분된 목소리였다.

그의 눈빛에는 짙은 의문이 담겨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소은설의 입에서 제갈여령의 이름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 그게…….”

의외의 상황에 소은설은 당황했다.

진운룡의 반응이 이렇게 민감할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그 이름을 들은 것이냐?”

소은설을 바라보는 진운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갈여령의 이름을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소은설에게서 듣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소은설이 몸을 움츠리며 두려운 듯 입을 열었다.

“시, 실은…… 제가 검에 찔렸을 때…….”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진운룡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겪은 환상과 최근 꿈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당신한테 물어본 건데…….”

소은설이 조심스럽게 진운룡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진운룡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엇 때문에 소은설이 그런 환상을 봤으며 그런 꿈을 꾼단 말인가.

제갈여령과 그녀는 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 천령안, 그리고 마성을 희석시키는 피.

어느 하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혈귀곡에서 그를 나오도록 만든 의문이 다시 한 번 그의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진운룡이 소은설의 어깨를 세차게 잡았다.

“넌 도대체 누구냐?”

그의 두 눈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냐?”

어깨를 잡은 진운룡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소은설과 제갈여령의 모습이 겹치며 그의 심장이 크게 방망이질 쳤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두 눈동자가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 아파요. 그, 그만하세요.”

소은설이 두려운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이 죽기 전 제갈여령의 그것과 너무도 똑같았다.

그녀가 지금 너무도 생생하게 진운룡의 눈앞에 서 있었다.

진운룡은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소은설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진운룡의 포옹에 소은설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람이나 거부감 보다는 무언가 아득하고 심장이 쑤시듯 아픔이 밀려와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너무도 애잔한 진운룡의 목소리가 소은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키지 못해 미안하오…….”

소은설은 움직일 수도,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석상처럼 얼어붙은 채 진운룡의 품 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렇듯 슬픈지 그리고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잠시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과는 다른 말이 튀어 나왔다.

“수, 숨이 막혀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운룡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미안하구나……. 너를 잠시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

씁쓸한 얼굴로 진운룡이 말했다.

과거의 기억들이 아직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그 다른 사람이라는 분의 이름이 여령인가요?”

조금은 아쉬운 듯한 얼굴로 소은설이 물었다.

하지만 진운룡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잠시 쓸쓸한 눈빛으로 소은설을 응시하던 진운룡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뭐라 말하려 머뭇거리던 소은설이 포기하고는 천천히 돌아서 진운룡의 숙소를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운룡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저 아이는 대체…….’

소은설이 나간 뒤로도 진운룡의 시선은 한동안 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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