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92화 (92/150)

# 92

/혈룡전 4권 (92화)

5장 개방 총타 (3)/

간곡하다 싶을 정도로 홍무생이 부탁을 하자 개방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들의 최고 어른인 홍무생이 진운룡에게 고개를 숙이다시피 하는 모습이 굴욕적이고 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운룡은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럴 순 없소.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자의 대답을 들어야겠소.”

시간을 끌어 궁위의 정체가 드러난 사실을 천사교에서 알게 되면 교주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거나 숨어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여지를 주지 않으려면 지금 교주의 위치를 알아내고 바로 쳐들어가야 했다.

“태상장로님, 이런 모욕을 받고도 어찌 개방이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라도 저 악도와 맞서겠습니다!”

“옳소!”

개방도들이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용!”

홍무생이 그들을 막았다.

이대로 진운룡과 충돌한다면 무너지는 쪽은 개방이다.

개방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제자들이 크게 다치는 것보다는 잠시 굴욕을 감수하는 편이 나았다.

“대체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무도하게 고집을 피우는 것인가?”

홍무생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천사교주의 거처.”

진운룡의 말에 홍무생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사교주는 교도들조차도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장막에 가려진 존재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방에서도 오랜 시간 교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작은 단서 하나 얻지 못했다.

한데 진운룡이 궁위에게서 천사교주의 위치를 알아내겠다고 하니 홍무생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소리냐! 천사교주의 위치를 왜 내게 묻는단 말이냐!”

궁위가 펄쩍 뛰며 진운룡의 말을 부인했다.

홍무생도 회의적인 얼굴로 말했다.

“궁 장로가 천사교와 연관이 있다 해도 교주의 거처를 알고 있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아니, 만일 알고 있다고 해도 그가 순순히 털어놓겠나?”

“나에겐 알아낼 방법이 있다.”

진운룡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혹시……!’

문득 홍무생의 뇌리에 손녀인 홍혜란을 백치로 만든 진운룡의 괴이한 수법이 생각났다.

아마도 섭혼술의 일종인 듯했는데 진운룡이 그 수법을 쓴 뒤 홍혜란은 혼이 빠져나간 듯 백치가 되어 버렸다.

“혹시 그때 그 수법을 말하는 것이라면……. 궁 장로를 백치로 만들겠다는 말인가? 만일, 궁 장로가 천사교와 관련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

백치라는 말에 궁위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그러나 진운룡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지.”

홍무생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말인가.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말인가?

“그만두게!”

하지만 진운룡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곧장 궁위의 머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 잠깐!”

궁위가 다급히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크하하하하하!”

구석에 있던 젊은 거지 하나가 광소를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진운룡이라 했나? 그대가 나를 만나고 싶다 하였느냐?”

진운룡이 제령안을 거두고 젊은 거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진삼! 뭐하는 짓이냐!”

“저놈이 갑자기 미친 게야?”

놀란 개방도들이 젊은 거지를 향해 소리쳤다.

진삼이라 불린 젊은 거지는 입문한 지 삼 년도 되지 않은 백의개로, 그야말로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자질이나 오성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백의개들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하는 조금은 덜떨어진 제자였다.

“교, 교주시여!”

궁위가 갑자기 진삼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진삼이 궁위를 쓰윽 훑어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궁위는 금제가 가해져 있어 나에 대한 것을 알아도 말하지 못한다.”

진삼이 오체투지 한 궁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천사교주?”

진운룡이 특유의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그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니지. 지금 이 모습은 내가 부리는 인형 중 하나라네. 잠시 몸을 빌렸을 뿐이야.”

진삼의 말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대, 대체!”

“귀, 귀신!”

개방도들은 혼란에 빠졌다.

홍무생 역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사교주가 개방 제자의 몸을 빌려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귀신 놀음이란 말인가. 믿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상황 자체가 너무도 갑작스럽고 기괴했다.

거기다 궁위는 스스로 천사교주임을 자처하는 진삼을 향해 오체투지 했다.

그것은 곧 궁위가 천사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았다.

결국 진운룡의 말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때 진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그대에 대해 제법 관심이 많은 편이니 한 번 꼭 만나고 싶군. 그간 내 일을 방해한 것에 대한 보답도 하고 싶고 말이야.”

진삼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말려 올라갔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음산한 미소를 짓는 진삼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괴했다.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지?”

진운룡이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후후, 너무 서두를 것 없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으나 먼저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지. 나를 만나고 싶다면 보름 후 소림사로 오라.”

순간, 소림사라는 말이 관제묘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쳤다.

“소림사?”

진운룡이 뭐라 물으려는데 갑자기 진삼이 몸을 경련을 일으키더니 입에 거품을 문 채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털썩!

진삼은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진운룡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림사에서 만나자니 천사교와 소림사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고민해 봤자 쓸데없는 일이지…….’

어차피 진운룡의 목적은 천사교주를 만나 혈신대법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다.

천사교주가 한 말을 미루어 볼 때, 만나자는 이야기가 거짓이나 허튼소리가 아님은 분명했다.

단, 진운룡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함정이라 해도 진운룡에게는 반드시 천사교주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천형(天刑)처럼 내려진 피의 저주를 풀 실마리를 천사교주가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네 말이 맞았군.”

그때 홍무생의 목소리가 진운룡을 상념에서 깨웠다.

홍무생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늘 일로 인해 개방은 의와 협을 지향하는 그들의 신조가 또다시 큰 상처를 입었다.

개방 내부도 제대로 단속 못하면서 어찌 밖으로 정의를 행하고 악을 징치하겠는가. 이 일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누가 개방을 믿겠는가.

“흥! 진작…….”

“그만.”

적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려는 것을 진운룡이 막았다.

“저자는 개방에 맡기도록 하지. 난 필요한 것을 얻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다.”

진운룡으로서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홍무생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번에도 진운룡과의 만남은 개방과 그의 명성에 생채기를 남겼다.

개방도들은 이를 드러내며 진운룡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그 앞을 막아서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진운룡과 적산 구학은 당당하게 개방 총단을 빠져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