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혈룡전 4권 (94화)
6장 소림의 위기 (2)/
남궁진천의 의견은 어찌 보면 제법 합리적이고 진운룡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오라 가라 한다고 진운룡이 눈 하나 꿈쩍할 리가 없었다. 그저 명목상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꼼수였다.
“호오, 그거 좋은 생각이시구려! 이렇게 기회를 주는데도 그자가 거부한다면 스스로 마인임을 인정하는 꼴입니다.”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왕규와 모용기중은 쌍수를 들고 남궁진천의 의견을 환영했다.
의사청에 모인 이들 중 그 누구도 부당하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소. 그럼 근 시일 안에 진운룡 그자를 맹으로 직접 불러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하겠소. 군사는 그자에게 이 사실을 통보를 하도록 하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차피 여기 모인 이들이 바로 정도 무림의 법이자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운룡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도 무림을 위협하는 인물로 낙인찍혔다.
* * *
숭산 소림사.
산문 앞을 지키는 수행승들의 시선이 길 아래쪽을 향했다.
이제 열여섯 쯤 되었을까 싶은 작고 귀여운 소녀가 산문을 향해 하늘하늘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여시주께서는 걸음을 멈추시오.”
소녀를 막아서는 젊은 수행승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일었다.
소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젊은 승려를 바라봤다.
“허험, 소림에서는 정해진 참배객을 받는 날이 아니면 여시주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으니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젊은 승려가 정중하게 말했다.
소림사는 정해진 날 이외에는 여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어머, 이걸 어쩌지? 소림사를 구경하려고 멀리서 왔는데…….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요?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소녀가 슬픈 눈으로 울먹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수행승들이 미안한 얼굴로 소녀를 달랬다.
“아미타불. 여시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림의 법도가 워낙에 지엄하니 저희도 어쩔 수 없군요.”
무언가 못마땅한 듯 소녀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일었다.
“하지만 안에서 만나기로 한 분이 있어서 꼭 들어가 봐야 해요. 그분은 약속을 안 지키는 걸 무척 싫어하거든요.”
젊은 승려의 표정이 변했다.
지금은 참배객을 받지 않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누군가 만나기로 약속했다면 소림의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혹시라도 윗분들이 특별히 초청한 것이라면 소녀의 출입을 허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와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안에 연통을 넣을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소녀가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면 안 되는데…….”
“말씀을 하셔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소녀가 승려를 향해 손짓을 했다.
“좋아요. 그럼 말할 테니 귀 좀 대 볼래요?”
“귀, 귀를 말입니까?”
승려가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소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만날 사람은…….”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를 지옥으로 인도할 분이지.”
“무, 무슨!”
깜짝 놀란 승려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다른 승려들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분리되어 피를 뿌리는 모습이었다.
슈슈슈슉!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실선들이 허공을 가득 매움과 동시에 승려들의 육신은 조각나 버렸다.
“중들의 피 맛은 역시 별로야.”
소녀가 손가락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카락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주인을 뵈러 가 볼까?”
소녀의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침입자다!”
“적이다!”
삼경이 훌쩍 넘어간 한밤에 소림의 경내가 시끄러워졌다.
“크악!”
“아악!”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사방에 붉은 무복을 입은 자들이 소림사의 승려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이놈들! 멈추거라!”
그때 한 무리의 승려들이 바람처럼 날아왔다.
“호오, 이제야 좀 쓸 만한 자들이 나선 것인가?”
머리에 화려한 금관을 쓴 중년인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네놈들은 누구인데 감히 소림에 함부로 침입한 것이냐!”
키가 칠 척은 되어 보이는 거구의 승려가 호목(虎目)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 뒤로 열여덟 명의 단단한 체구의 승려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 커다란 덩치와 손에 쥔 철봉을 보니 그대가 나한당의 수좌인 원공인가? 그렇다면 그 뒤에 있는 자들은 십팔 나한이겠군? 역시 소림이랄까? 제법 인재들이 많군그래. 안 그런가, 일 사령?”
“교주님의 영명하신 안목을 누가 감히 따르겠사옵니까?”
중년인 옆에 있던 은색 도깨비 가면을 쓴 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들은 바로 천사교주와 그 무리들이었던 것이다.
“소림의 실력을 한번 구경해 보고 싶구나.”
“크크크, 소신이 나서서 교주님의 눈을 즐겁게 해 드리겠습니다.”
한쪽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진 꼽추노인 사 사령 추노가 눈을 빛내며 나한당주를 향해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퍽, 퍼억!
꼽추노인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서 있던 승려들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버렸다.
츠츠츠츳!
동시에 허공으로 솟아오른 핏물이 붉은 실선을 그리며 꼽추노인에게 빨려 들어갔다.
“크크크크!”
피를 흡수한 꼽추노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었고 몸 전체에는 핏빛 가시가 돋아났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만두거라, 이놈!”
나한당주 원공이 분노에 이를 갈며 꼽추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혼자서는 힘들 테니 모두 덤비도록 해라, 큭큭큭.”
“흥!”
원공은 꼽추노인의 조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봉을 내려쳤다.
부우웅!
마치 번개라도 치듯 철봉이 꼽추노인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한당의 수좌답게 웅혼한 공력이 담긴 강력한 일격이었다.
터엉!
하지만 원공의 일격은 너무도 쉽게 막혀 버렸다.
놀랍게도 철봉은 꼽추노인의 교차한 두 팔에 끼어 있었다.
가시로 뒤덮인 꼽추노인의 두 팔이 원공의 철봉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원공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쇳덩이와 부딪힌 듯하구나!’
철봉이 벽에 막힌 듯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크크크, 겨우 이 정도라면 실망이로구나.”
꼽추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원공을 비웃었다.
“어디 이것도 받아 보거라!”
우우우우웅!
공력을 한껏 끌어 올린 원공의 가사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하앗!”
드드드드드!
쩌렁쩌렁한 기합과 함께 철봉의 끝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까가가가가강!
회전하는 철봉과 꼽추노인의 가시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마치 쇠와 쇠가 부딪히는 듯했다.
“우웁!”
원공이 공력을 더욱 끌어 올리자 철봉이 점점 꼽추노인의 양팔을 밀고 들어갔다.
“크흐흐, 제법이구나. 하지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스슥!
순간 꼽추노인의 신형이 밑으로 쑤욱 꺼졌다.
“헛!”
목표를 잃은 철봉이 스스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딸려 나갔다.
어느새 자세를 낮춘 꼽추노인이 무방비로 노출된 원공의 하체와 가슴을 향해 두 팔을 박아 넣고 있었다.
푸욱!
“커헉!”
배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원공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거 너무 싱겁구나! 그래서 한꺼번에 덤비라 하지 않았느냐? 크크크크!”
“이놈!”
“감히! 네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