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혈룡전 4권 (95화)
6장 소림의 위기 (3)/
원공의 죽음에 격분한 십팔 나한들이 꼽추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큭큭큭! 그래, 그렇지.”
슈슈슈슈슉!
순간, 꼽추노인의 몸에 돋아나 있던 핏빛 가시들이 십팔 나한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파파파파팍!
“조심해!”
“크윽!”
수십, 수백 개의 가시가 나한들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퍼억, 퍽!
“지율!”
그사이 꼽추노인은 이미 십팔 나한 중 두 명의 머리를 으깨고 있었다.
“손을 멈추시오!”
쩌엉!
그때 폭음과 함께 꼽추노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제법이군, 큭큭큭.”
꼽추노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곳에는 열여덟 명의 노승들이 마치 새처럼 날아 내리고 있었다.
꼽추노인의 시선은 그 가운데에 녹옥불장(綠玉佛杖)을 든 백염의 노승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날린 장력이 꼽추노인을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빈승은 소림의 방장을 맡고 있는 공지라 하오. 그대들은 어찌 청정하고 신성한 불사에 들어와 혈사를 벌이는 것이오?”
공지라는 소리에 천사교주의 두 눈에 이채가 일었다.
“호오, 그대가 바로 불황 공지로군?”
불황 공지.
소림의 방장이자 십이천의 일인으로 생사가 불분명한 망우대사를 제외하면 현 소림 최고의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어머, 이거 내가 조금 늦었네?”
그때 산문 쪽에서 맑은 목소리와 함께 귀여운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하지만 소림의 승려들은 결코 그녀의 모습을 귀엽게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의 온몸이 피로 젖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욱 소림승들을 경악케 한 것은 그녀의 두 손에 들린 지객당 당주와 부당주의 수급 때문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이 사령 심유화였던 것이다.
“아미타불…….”
공지가 안타까운 얼굴로 불호를 외웠다.
사뿐 거리는 걸음으로 천사교주 앞에 다가선 심유화는 그대로 오체투지 했다.
“교주님.”
“수고했다.”
천사교주가 미소를 지으며 심유화를 치하했다.
그녀는 곧장 천사교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모두 모였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소림은 들으라!”
교주의 목소리가 소림사 경내를 가득 채웠다.
어마어마한 공력이 담긴 목소리에 내력이 약한 승려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오늘부로 이곳 소림은 우리가 접수하겠다! 너희는 우리 혈신의 자손들이 강호를 재패하는 첫 재물로 소림을 택한 것을 영광으로 알고 모두 무릎을 꿇어라!”
“혈신의 자손?”
공지가 의문이 담긴 눈으로 교주를 바라봤다.
“너희가 혈마라 이야기하는 분이지.”
“혈마!”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혈교의 잔당들이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혈교는 이미 백 년도 훨씬 전에 정마(正魔) 연합에 의해 전멸했다.
그들이 강호에 일으킨 혈사는 마교와 정파가 손을 잡아야 했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지만, 무림 역사상 가장 많은 피가 흘렀으며 수많은 문파가 사라졌다.
아직도 무림은 그때의 여파를 모두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그 혈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오늘 소림을 강호에서 지울 것이다!”
교주가 손을 들어 올리자 오백이 넘는 혈교의 무사들이 소림 승려들을 향해 돌진했다.
“크크크, 방장은 내가 맡겠다!”
사 사령 추노가 눈을 빛내며 공지에게 달려들었다.
“흥, 재미는 혼자 다 보려 하는군.”
심유화가 콧방귀를 끼며 승려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빠질 수 없다, 우리도!”
“어디 중놈들 피 맛 좀 볼까?”
삼 사령인 세 명의 라마승과 오 사령 백승도 질세라 심유화를 따라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나한진을 펼쳐라!”
공지의 명에 따라 승려들이 한데 모여 방진을 이루었다.
본래 나한진은 공격보다 수비에 중점을 둔 진법이다.
백팔 명의 무승들이 겹겹이 방진을 형성하여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상대의 공격을 분산시키고 막아 낸다.
그 중심에 공지를 비롯한 고승들이 자리해 진의 약화된 부분을 지원한다.
“크크크, 어디 명성만큼 대단한지 보자꾸나!”
슈슈슈슈슉!
추노가 쏘아 낸 가시가 나한진의 외곽을 지키는 무승들을 향해 날아갔다.
한데 놀랍게도 가시가 날아간 곳의 진형이 안쪽으로 쑤욱 들어가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탄력을 이용해 가시를 튕겨 내는 것이 아닌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진은 꿈틀대며 추노가 쏘아 낸 가시들을 남김없이 밖으로 튕겨졌다.
“하압!”
백 명이 넘는 무승들은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꼽추 노인 추노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고기 처먹는 땡중 놈들이 제법이로구나!”
사실 소림의 무승들은 다른 사찰의 승려들과 달리 육식을 허용하고 있었다.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체력이 필요했고, 체식만으로는 강도 높은 수련을 버텨 낼 육신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노는 그것을 비꼰 것이다.
“호호호, 늙은이는 힘이 딸려서 안 된다니까. 어디 내 것도 막아 보시지!”
순간, 수백 가닥의 핏빛 선이 소림의 승려들을 덮쳤다.
촤아아아아악!
대기를 가르며 쏘아진 것은 바로 심유화의 머리카락이었다.
“흡진(吸陳)!”
공지의 고함소리와 함께 진이 다시 한 번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때, 심유화의 머리카락이 쏘아져 오는 속도가 배로 증가했다.
파파파파팍!
“크윽!”
“으윽!”
미처 밀어내기도 전에 심유화의 머리카락이 진을 덮쳤다.
진의 외곽에 위치한 승려들이 목봉을 들어 심유화의 머리카락을 막았으나, 그 충격으로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막아라!”
이 열과 삼 열에 선 승려들이 앞의 승려에게 공력을 보탰다.
“하압!”
밀려 나가던 승려들이 간신히 중심을 잡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쿨럭!”
몇몇 승려가 충격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하고 입에서 피를 토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봉을 들어 올렸다.
“흥, 독한 중놈들이로구나! 어디 또 막아 보거라!”
심유화가 두 눈에서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다시 한 번 머리카락을 쏘아 냈다. 처음보다 빛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어림없다!”
그때, 공지가 훌쩍 날아올라 심유화의 머리카락을 향해 두 손을 펼쳤다.
사람 몸 보다 더 큰 거대한 장영이 심유화의 머리카락과 부딪혔다.
쩌어어엉!
귀가 멍멍한 굉음이 터지며 심유화의 머리카락이 뒤로 튕겨 나갔다.
“저 빌어먹을 늙은 땡중이 감히!”
심유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비켜라!”
심유화 뒤쪽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기운이 덮쳐 왔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심유화와 추노가 재빨리 옆으로 비켰다.
그사이를 관통한 거대한 빛줄기가 공지가 버티고 있는 진을 때렸다.
콰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폭발과 함께 진을 이루던 승려들이 추풍낙엽처럼 뒤로 튕겨 날아갔다.
공지도 무려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서야 몸을 멈출 수 있었다.
빛줄기가 지나간 자리는 폭이 족히 반 장은 되어 보이는 도랑이 깊이 파여 있어 그 위력을 능히 짐작케 했다.
“뭐하는 거야, 일 사령! 우리까지 휘말릴 뻔했잖아!”
심유화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일 사령 척진군이 길이가 오 척이 넘는 거도(巨刀)를 전면을 향해 겨누고 서 있었다.
거도에는 놀랍게도 거의 일 장에 달하는 도강이 일렁이고 있었다.
“교주님께서 직접 행차하셨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일 사령 척진군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동시에 사방에 뿌려진 승려들의 피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척진군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피를 흡수한 척진군의 도강은 붉게 물들었고, 느껴지는 기세 또한 배로 늘어났다.
“으음…….”
공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방금 전 일격만으로도 십이천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조차 속절없이 밀렸을 정도로 강력했다.
한데 지금은 더욱 강력해진 척진군의 도강을 막아야 한다. 게다가 나머지 사령들이 모두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아무리 나한진이라 해도 버텨 낼 리가 없었다.
‘허허, 자칫하면 오늘 소림의 장구한 역사가 끝나겠구나……. 망우 사숙만 계셨어도…….’
공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아 있는 생불이라 불리던 망우는 현재 강호에서는 생사가 불분명하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망우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중생들 사이에서 깨달음을 얻겠다며 소림을 떠난 상태였다.
그가 지금 소림에 있었다면 이렇듯 허무하게 혈교의 잔당들에게 밀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생사가 불분명하여 십이천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망우야 말로 현 천하제일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끝내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으로 날아오른 일 사령 척진군이 거대한 핏빛 도강이 어린 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그에 질세라 나머지 사령들도 한꺼번에 나한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지가 이를 악물고 공력을 끌어 올렸다.
자신이 피하게 되면 진을 이루고 있는 제자들이 척진군의 도강을 감당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후우우우웅!
녹옥불장을 들어 올린 공지의 가사 자락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다.
“하압!”
기합과 함께 척진군의 강력한 일격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크읍!”
폭음과 함께 공지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우려했던 대로 공력을 최대한 끌어 올렸음에도 핏빛 도강에 밀린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척진군의 일격을 막아 내는 사이 나머지 사령들이 진을 이루고 있는 승려들을 덮친 것이다.
“크아악!”
“아악!”
공지가 없는 나한진은 전처럼 단단하지 못했다.
네 명의 사령들에 의해 진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뒤로는 싸움이라기보다는 살육에 가까운 상황이 이어졌다.
사령들은 양떼 사이에 뛰어든 늑대처럼 승려들을 도륙했다. 소림의 앞마당은 삽시간에 승려들의 피로 물들었다.
공지의 눈에 절망이 일었다.
‘사숙, 부디 못난 사질이 지키지 못한 소림을 되살려 주십시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척진군의 도를 보며 공지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소림은 혈교의 첫 번째 제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