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혈룡전 4권 (96화)
7장 혈교 (1)/
소림의 참사는 강호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
봉문도 아닌 사실상 멸문이었다.
소림을 지키던 승려들이 단 한 명을 빼고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한 명은 혈교가 자신들의 뜻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놓아 준 어린 무승이었다.
물론 외부에 있었던 승려들과 속가제자들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무승들과 고수들이 이번 사태로 사라졌기에 수많은 절기들과 전통을 다시 복구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무림을 더욱 경악하도록 만든 일은 바로 소림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바로 혈교라는 사실이었다.
혈교는 소림을 접수한 후 곧장 무림에 자신들이 돌아왔음을 공표했다.
또한 소림을 멸망시킨 것은 무림제패의 첫걸음에 불과함을 알렸다. 혈교는 무림을 제패하고 나아가 세상을 혈교의 천하로 만들 것임을 천명했다.
무림은 공포에 잠겼다.
혈교라는 이름은 곧 혈마와 연결된다.
백오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혈마와 혈교가 일으킨 혈사에 대한 공포는 잊히지 않고 있었다.
강호의 절반에 가까운 무림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문파와 세가들이 멸문했다.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본래의 전력를 회복하지 못한 문파들도 있었다.
그러한 혈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세가와 문파들은 혈교의 다음 표적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에 떨었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일컬어지는 소림마저 속절없이 무너졌는데, 누가 혈교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백오십 년 전의 참사가 다시 벌어지도록 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무림맹을 움직였다.
* * *
무림맹 의사청에는 각파의 장문인, 세가의 가주들이 모여 있었다.
남궁진천이 무거운 얼굴로 대전에 모인 이들을 바라봤다.
“공지대사께서 혈교 무리에게 당하셨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화산의 장문이자 화산제일검인 임혁군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소. 방장이신 공지 대사님을 비롯해 소림의 제자들이 어린 무승 하나를 빼고 모두 놈들에게 목숨을 잃었소이다.”
소림의 장로인 원목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고통이자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남아 있는 소림의 제자들을 규합해 다시 소림을 되살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기에 마음을 간신히 붙잡으며 버티고 있었다.
“소림의 참사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각문파와 세가의 수장들이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림을 걱정했다.
혈교가 다시 발현한 이상 소림의 일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도 언제 소림의 꼴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허허, 공지대사께서 당하시다니 대체 놈들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십이천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공지였다.
그런 공지가 패했다는 것은 상대가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들 소식을 들으셨듯이 놈들의 전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공지대사를 상대한 자는 무려 일 장에 이르는 핏빛 도강을 시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천사교주는 움직이지도 않고 공지대사와 소림의 나한진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무림맹 군사 제갈휘의 말에 대전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혈교의 발호는 무림에게 있어서 큰 위기입니다. 해서 이번 혈교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온 무림이 힘을 합해야 합니다.”
제갈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를 상대하기 위해 정도연합군을 결성하려 하오. 각 문파와 세가에서는 정예고수들을 선별해서 참가해 주시오. 당분간 맹과 정도무림의 모든 역량을 혈교와 맞서는 데 집중할 것이오.”
남궁진천이 입을 열었다.
정도연합군은 어차피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놈들의 전력이 여유를 둘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을 다들 명심하고, 이번 정도연합군이 최고의 전력을 갖출 수 있도록 모두 신경 써 주기 바라오.”
자신들의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참여하는 문파나 세가들도 많았기에 남궁진천이 그것에 대해 미리 경고한 것이다.
“제반 사항에 대해서는 제갈 군사가 설명할 것이오.”
남궁진천이 제갈휘를 바라보자 그가 앞으로 나섰다.
“일단 연합군은 무당에서 모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소림과 가깝기도 하고, 놈들이 호북이나 섬서로 넘어오려면 무당을 무시하고 지나칠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북과 섬서에는 무당, 화산, 제갈세가, 종남, 공동파까지 무림의 내로라하는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혈교의 행보가 이어질 곳이 섬서나 호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였다.
그중 소림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무당이었다.
물론 제갈세가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무당보다는 그 무게감이 떨어졌다.
무당은 소림과 더불어 정도무림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곳으로 도문의 수장과도 같은 곳이다.
최근 들어 화산이나 종남파의 성세가 만만치 않기는 하였으나, 아직은 무당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혈교가 그런 무당을 놔둘 리 만무했다.
“거리가 가까운 문파들부터 서둘러 고수들을 보내 주십시오. 무당마저 뚫리게 되면 자칫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으니 반드시 놈들을 무당에서 막아 내야 합니다.”
제갈휘가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흥! 놈들에게 정도무림의 저력을 보여 줍시다! 우리 개방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이번 정도연합군을 도울 것이오!”
개방 방주 구천엽이 목소리를 높였다.
“화산 역시 내가 직접 고수들을 이끌고 참여하겠소!”
화산제일검이자 십이천의 한 명인 임혁군이 나서자 모두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설마 장문인이 직접 나설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 눈치를 살피던 다른 문파들도 잔머리를 굴릴 수 없게 되었다.
곧이어 종남, 공동 역시 각 문파의 최고 고수들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모두들 고맙소. 그대들이야말로 우리 정도무림을 지키는 기둥들이오! 그대들이 함께하는 이상 결코 백오십 년 전과 같은 참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오! 모두 힘을 합해 악적들을 처단하여 무림의 평화를 되찾읍시다!”
남궁진천의 말에 모두 함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이렇게 혈교를 상대하기 위한 정도연합군이 결성되었다.
* * *
진운룡 일행은 아직 개봉에 머물고 있었다.
천사교주와 약속했던 시간이 열흘도 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 공자님!”
구학이 호들갑을 떨며 진운룡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달려왔다.
“이놈이?”
적산이 눈을 부라리며 구학을 노려보자 얼른 구학이 몸을 움츠렸다.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이에요?”
소은설이 못마땅한 눈으로 구학을 바라봤다.
마침 세 사람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구학의 호들갑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 그것이…….”
슬쩍 적산의 눈치를 보던 구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 소림이 혈교라는 자들의 손에 멸문했다고 합니다.”
“응?”
무표정하던 진운룡의 두 눈에 빛이 일었다.
“지금 혈교라 했느냐?”
“그, 그렇습니다.”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혈교는 악연으로 얽혀 있었다.
백오십 년 전 혈신대법 때문에 폭주한 진운룡은 혈교 본거지에 있던 이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아무리 악인들이라 하나, 노인과 여인,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 진운룡의 살수를 피할 수 없었다.
진운룡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아마도 그때 외부에서 살아남은 혈교의 잔당들이 백 년이 넘게 은밀히 세력을 키운 것이리라.
어찌 보면 그들에게 진운룡은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천사교가 바로 혈교였던 모양입니다.”
“흥, 역시 놈들이 혈교의 잔당들이었군! 가만……!”
적산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렇다면 그 교주 놈이 주군을 소림사로 오라고 한 이유가…….”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소림사에서 만나자고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던 터였다.
그것도 천사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불교의 본산과도 같은 소림에서 만나자니 당연히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그 이유가 밝혀졌다.
놈들은 애초부터 소림을 칠 계획이었던 것이다.
“만나기로 한 날까지 열하루가 남았는데…….”
소은설이 진운룡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주군, 차라리 이참에 먼저 쳐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소? 시간에 여유를 둔 것을 보면 아마 무슨 함정을 파고 기다리려는 것 같은데, 그 여우같은 놈들이 수를 쓰기 전에 미리 쳐들어가는 편이 우리한테 유리하지 않겠소?”
적산의 말에 구학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출발해도 닷새는 걸린다. 그 시간이면 놈들이 무얼 생각하고 있든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지. 일찍 움직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진운룡의 말에 적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맞는 말이긴 했으나, 혈교 놈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난 함정 따위를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운룡의 말에 적산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크크크, 역시 주군답소! 하기야 그깟 놈들이 함정을 파 봐야 다 때려 부수면 그만이지 않소? 크하하하하!”
매우 통쾌하다는 듯 적산이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소, 소림을 작살낸 놈들인데…….”
구학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진운룡이 강하다고는 해도 상대는 천하의 소림을 괴멸시킨 자들이었다.
게다가 진운룡은 혼자에, 그들은 수많은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감히 지금 네놈이 주군을 의심하는 것이냐?”
적산이 눈을 부라렸다.
“그, 그게 아니라…….”
구학이 얼른 말꼬리를 흐렸다.
“걱정 말거라! 그깟 놈들 아무리 떼로 몰려와도 주군의 옷깃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크하하하!”
적산은 마치 자신이 진운룡이라도 된 듯 가슴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소은설과 구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동창제독 육환과 황사 도중문이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창제독인 육환이 도중문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동창제독이라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이였다.
현 조정에서 황제가 아닌 이상 그 누가 감히 그의 고개를 조아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혈교라고?”
도중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혈교라면 혈마의 잔당들인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놈들은 혈신대법을 받고 피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중문의 두 눈에 이체가 일었다.
“놈들이 혈신대법을?”
“아마도 혈마에게 얻은 것이겠지요.”
도중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지켜보실 것입니까?”
육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중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일단 무림맹의 대응을 지켜보도록 하지…….”
한참이 지나서야 도중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천혈단(天血團)을 준비시키도록 해라.“
육환이 놀란 얼굴로 도중문을 올려다봤다.
“처, 천혈단을 말입니까?”
“어차피 무림이란 족속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전에 모두 쓸어버려야 할 쓰레기들이 아니더냐. 놈들이 서로 물어뜯고 상처를 입으면 그때 모두 정리할 것이다.”
도중문의 두 눈에 서늘한 한기가 일었다.
“존명!”
부복한 채 읍을 하는 육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 * *
무당파 삼청전.
무림맹주 남궁진천을 비롯해, 홍무생, 무당신검 태허진인, 화산파 장문 임혁군, 공동파 제일 고수인 진율, 종남파의 종리벽 등 이름만 들어도 강호가 술렁일 만한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혈교의 발호를 막기 위해 모인 것이다.
“혈교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임혁군의 물음에 개방의 방주 구천엽이 답했다.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날 이후로 계속 놈들은 소림사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지요.”
“대체 놈들의 속셈이 뭔지 모르겠군.”
홍무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림을 무참히 짓밟고 강호를 자신들의 발아래 두겠다고 공표한 그들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으니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놈들이 움직임을 보여야 우리도 그에 대응책을 마련할 것인데……. 이렇게 가만히 지켜만 볼 수도 없고…….”
종남제일검 종리벽이 답답한 얼굴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지금 무당에는 종남, 공동, 화산, 개방,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문파의 전력도 많지만, 지금 전력만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혈교를 상대할 수 있다고 모두 자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도 제일 고수인 남궁진천을 비롯해 십이천만 무려 다섯 명이 있었고, 화경이 넘은 고수의 숫자도 열 명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무리 혈교가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모자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한 가지 묘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구천엽이 무언가 찝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문?”
홍무생이 조금은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당장에 혈교를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시급한 마당에 갑자기 무슨 소문이란 말인가.
“그게…….”
잠시 망설이던 구천엽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혈룡이 혈교를 치러 소림으로 향하고 있다는…….”
구천엽이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