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혈룡전 4권 (97화)
7장 혈교 (2)/
“혈룡?”
남궁진천의 물음에 홍무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무림인들이 진운룡 그자를 혈룡이라 부른다네.”
“진운룡!”
남궁진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운룡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손자를 죽이고 남궁세가의 이름에 흠집을 낸 자.
그런 자를 가만히 놔둔다면 남궁세가의 위명은 땅에 떨어질 것이고 다른 가문과 문파들이 기어오를 빌미를 주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혈교가 발호하는 바람에 진운룡에 대한 처리를 미루고 있던 터였다.
한데 이곳에서 진운룡의 이름을 듣게 되니 다시 화가 밀려 올라왔던 것이다.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홍무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데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공동파의 고수 진율이 물었다.
그가 알기로 진운룡이라면 홍무생과 당요를 혼자서 상대한 초극의 고수였다.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혈교의 만행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존재가 그였다.
“소문의 근거지가 하오문인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하오문과 진운룡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개방에서 확인한 결과도 진운룡이 개봉을 나서서 숭산을 향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자는 현재 정주에서 움직임을 멈춘 상태입니다.”
구천엽의 말에 진율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잘된 일 아닙니까? 그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자가 혈교를 물리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아무래도 혼자라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이참에 우리도 그자와 호응해서 함께 혈교를 소탕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어허! 진율진인께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겝니까!”
모용가의 가주 모용기중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나섰다.
“그자는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도한 행위를 일삼는 자입니다! 정도의 올바른 법을 따르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개방의 수많은 제자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위태롭다 하나 그런 근본이 없는 자와 어찌 우리 무림맹이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백오십 년 전 혈교가 나타났을 때는 마교와도 손을 잡았는데, 진운룡이라는 자는 아직 정사마가 확실히 가려진 상태도 아니지 않습니까?”
진율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진율진인께서는 정도연합군이 마교의 힘을 빌려야 할 만큼 전력이 보잘것없다는 말입니까?”
모용기중이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허, 왜들 이러는 것이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진정들 하시지요.”
임혁군이 두 사람을 말렸다.
모용기중과 진율은 헛기침을 하며 물러섰다.
그때 종남파의 고수이자 십이천의 일인인 종리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흠, 어쨌든 진운룡 그자가 소림으로 향하는 것은 사실이란 말인데, 우리는 지켜만 보고 있을 것입니까?”
모두의 표정에 난감함이 일었다.
“풍신께서 계시는데 이런 말씀을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아시다시피 그자는 풍신과 독황 두 분을 한꺼번에 꺾은 고수입니다. 만일 그자가 혈교 무리를 물리치고 소림을 되찾는다면…….”
“크흠…….”
대전에 모인 고수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생각도 하기 싫은 최악의 결과였다.
강호인들이 보기엔 무림맹이 혈교가 두려워 무당에서 꼬리를 말고 있는 동안 진운룡이 혼자서 소림을 구해 낸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진운룡은 강호인들의 칭송을 받을 것이고, 무림맹은 강호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래서야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소이까?”
종리벽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것 우리가 그자보다 먼저 혈교를 칩시다!”
모용기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지금 우리 전력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하기야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만으로도 혈교의 잔당들을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지요.”
구천엽이 모용기중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쳐들어가는 것은…….”
무당신검 태허진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혈교의 아가리로 무턱대고 걸어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자칫 놈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더욱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놈들에게 시간을 주면 줄수록 그만큼 대비를 완벽하게 할 것이 아닙니까? 예서 소림까지는 빠르게 움직이면 닷새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원목 스님이 있지 않습니까? 소림과 숭산의 지리에 대해서는 혈교놈들 보다 훨씬 이점이 있소이다.”
모용기중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혈교에서 소림을 접수했다고는 하나, 열흘 만에 소림과 숭산의 모든 지형과 길들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 사찰 내로 들어갈 수 있는 몇 곳의 비밀통로가 있기는 합니다.”
원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조용히 지켜보던 남궁진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소림 금지 중에 은자림이 있는데 그곳에는 예전부터 전대의 고승들이 머물던 곳이지요. 아쉽게도 지금은 머물고 계신 분들이 없습니다만, 그곳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는 아직도 그대로 있습니다. 게다가 진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혈교의 잔당들도 절대 찾지 못할 것입니다.”
소림의 은자림은 강호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예부터 은거한 고승들이 머무는 곳으로 일반인을 물론 소림 제자들도 허락을 받지 못하면 출입할 수 없는 금지였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진이 펼쳐져 있어서 진의 생문을 알지 못하면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한데 왜 은자림에 전대 고승이 한 분도 안 계신 것이오?”
구천엽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은자림이야말로 소림의 참된 힘이었다.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한데 원목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휴…….”
원목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만, 간단히 말하자면 망우 사조께서 모두 끌고 나가셨지요. 은자림에서 편하게 부처놀음이나 하느니 세상에 나가 도탄에 빠진 중생들을 하나라도 더 구하는 것이 낫다며…….”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망우선사께서요?”
“허…… 그런 일이.”
“어찌 보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은자림에 계시던 고승들이 지금 세상 어딘가에 살아 계시다면, 소림을 되살리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겠습니까?”
종리벽의 말에 원목이 조금은 희망이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소림의 살아 있는 역사와도 같으니까요.”
“어쨌든 은자림을 통해서 소림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군요.”
구천엽의 말에 원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은자림과 진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맹주님, 비밀통로를 이용해 소림에 몰래 잠입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모용기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남궁진천은 고민에 빠졌다.
태허 진인의 말대로 무턱대고 혈교가 기다리는 숭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비밀통로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비밀통로를 이용하면 오히려 정도연합군이 혈교를 기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운룡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았다.
‘놈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는 없지!’
진운룡이 먼저 혈교를 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결심이 선 남궁진천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소. 여러분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우리가 먼저 혈교를 치도록 합시다!”
“하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줍시다!”
대전에 모인 고수들이 상기된 얼굴로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은 혈교를 치고 소림을 구해 내는 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바로 출진하도록 할 터이니 모두 그에 맞춰서 미리 준비해 주시오.”
남궁진천은 회의를 파하고 다음 날 출진을 준비하기 위해 제갈휘와 함께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 * *
한편, 진운룡 일행은 정주에 머물고 있었다.
천사교주와 만나기로 한 날이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정주에서 며칠 쉬고 가기로 한 것이다.
“곽지량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인 것이냐?”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호에 떠돌고 있는 ‘혈룡이 혈교를 치러 소림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은 곽지량의 작품이었다.
“공자님, 그게 다 문주님께서 공자님을 위해 일부러 손을 쓰신 것입니다. 공자님을 위하는 저희 사부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지요!”
구학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놈이?!”
적산이 눈을 부릅뜨고 으름장을 놨음에도 구학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에헤, 생각을 해 보십시오. 공자님께서 혈교 놈들을 박살 낼 거라는 사실에는 저도 이의가 없지만, 굳이 그 떼거리 놈들을 모조리 상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요?”
무슨 소리냐는 듯 적산이 구학을 노려봤다.
“거기에 우리 사부님, 아니, 문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요! 이제 공자님이 혈교를 친다고 소문을 냈으니 무림맹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적산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에휴…….”
한숨을 내쉰 구학이 말을 이었다.
“만일 공자님이 숭산으로 가서 혈교 놈들을 싸그리 물리치고 소림을 구해 낸다면 무림맹은 어찌 되겠습니까?”
“뭘 어찌 돼? 어차피 그놈들이야 손가락이나 빨면서 구경이나 하라지!”
“무림맹의 입장이 난처해지겠군요?”
소은설의 말에 구학이 손뼉을 쳤다.
“그렇지! 무림맹이 생긴 목적이 바로 정도무림을 수호하고 강호의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한데 이번 혈교 놈들이 바로 무림맹이 나서야 할 그런 일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공자님께서 해 버리게 되면 강호인들이 무림맹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일단, 공자님이 소림을 구할 동안 무림맹은 무엇을 했냐고 성토할 것이 분명하지요. 그리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중심이 된 현 무림맹에 대해 반감이 있는 자들은 이때다 하고 꼬투리를 잡으려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림맹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이 말입니다.”
“흥! 무림맹의 위신 따위야 떨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적산의 말에 구학이 씨익 웃었다.
“후후, 여기서부터가 재밌는 대목입니다요! 무림맹에서 자신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도록 보고만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먼저 움직이겠군요!”
소은설이 눈을 빛냈다.
“후후, 그렇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공자님보다 먼저 소림을 구해 내야 명목이 서니까 말이야.”
잠시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진운룡을 힐끔거린 구학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게 바로 스승님의 기쁜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무림맹이 먼저 혈교를 치면 그만큼 공자님의 수고도 덜지 않겠습니까? 공자님께서는 기다리시다가 무림맹과 혈교 놈들이 피 터지게 싸울 때 그 교주라는 놈만 잡으시면 되는 것입니다요! 어떻습니까?”
제 딴에는 꽤 그럴듯한 설명이라고 생각한 듯 구학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착한 일을 하고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쓸데없는 일을 벌였군.”
하지만 구학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진운룡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진운룡으로서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싫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될 번거로움 역시 싫었기 때문이다.
“크흠……. 어쨌든 놈들이 함정을 파 놓았다 해도 정도연합군이 먼저 걸려들 테니 그만큼 공자님께서는 편하게 움직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쩝.”
구학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데 혹시라도 무림맹에서 그 교주라는 놈을 죽이면 안 되지 않느냐?”
적산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무림맹이 혈교를 칠 때 공자님께서는 뒤따라가 교주라는 놈만 잡으면 된다고. 그리고 사실 혈교는 정도연합군에게 쉽게 당할 만큼 만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소림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것을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구학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다 문득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움찔했다.
“근데, 네놈이 좀 대가리가 큰 것 같다? 지금 날 보고 혀를 찼느냐?”
어느새 적산이 살벌한 눈으로 구학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저, 적 공자님! 아, 아니, 주인님 제, 제가 잠깐 돌았나 봅니다!”
찔끔한 구학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적산에게 용서를 빌었다.
“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친 적산이 시선을 돌려 진운룡에게로 향했다.
“주군, 그렇다면 우리도 숭산 근처에 미리 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무림맹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틈을 노려 천사교주를 잡으려면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안전했다.
“귀찮게 됐군.”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교주는 피의 저주를 풀 중요한 실마리였다.
진운룡으로서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내일 아침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존명!”
적산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 날 아침 진운룡 일행은 서둘러 숭산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