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혈룡전 4권 (100화)
8장 정도연합군 (3)/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두 존재의 대결에 대기가 터져 나가고, 주변의 모든 기운이 들끓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그저 희미한 잔상만이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수십, 수백 명의 남궁진천과 혈교주가 허공에서 손을 주고받고 있었다.
콰콰콰콰콱!
“크윽!”
어느 순간,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한 사람이 피를 뿌리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이런!”
정도연합군 무인들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뒤로 튕겨 나간 인형은 다름 아닌 남궁진천이었던 것이다.
혈교주의 몸에도 여기저기 핏자국이 보였으나, 그는 허공에 떠서 오연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남궁진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윽!”
남궁진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어깨로부터 가슴까지 길게 그어진 혈선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녹녹치 않은 상처였다.
게다가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아 내상도 적지 않은 듯했다.
남궁진천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그보다 더 컸다.
그가 언제 이토록 심한 패배를 겪어 봤던가.
현경을 넘어선 지가 이미 이십 년이 지났고, 이제는 반신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그였다.
한데 그런 그가 상대에게 무참히 패배한 것이다.
―맹주님! 이대로는 전멸입니다! 분하지만, 퇴각하여 훗날을 기약하셔야 합니다!
그때, 제갈휘의 전음이 들려왔다.
남궁진천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전세는 이미 많이 기울어 있었다.
무당의 태허진인은 피투성이로 간신히 쓰러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고, 화산의 임혁군과 종남의 진율 역시 몸 여기저기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홍무생과 구천엽이 그나마 말짱한 모습이었으나, 그들도 호흡조차 가누지 못한 채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혈교의 전력이 이 정도였다니…….’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후회가 됐다.
모든 문파가 모일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으로도 부족했을 수도 있었다.
‘진율의 말대로 진운룡 그자를 끌어들였어야 했어…….’
지금 혈교의 전력이라면 한 손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진운룡 정도의 고수라면 엄청난 전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군. 하지만 그뿐이야. 내 그대 역시 나의 충실한 종으로 되살려 주지.”
그때, 혈교주의 조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제갈휘가 다급히 전음을 날렸다.
남궁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모두 개죽음이다.’
제갈휘의 말대로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진운룡을 끌어들여 혈교와 맞서도록 해야 했다.
‘어차피 놈을 처리하는 것은 혈교를 없앤 이후라도 상관없지!’
마음을 굳힌 남궁진천이 곧장 정도연합군 무인들에게 후퇴를 명했다.
“모두 퇴각하시오! 최대한 흩어져 몸을 피하시오!”
정도연합 무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날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이미 이 싸움에서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모두는 각 문파와 세가를 이끄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일수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법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아났다.
“크크크크, 버러지 같은 놈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모두 피의 제물로 바쳐라!”
사 사령 추노가 혈교 무사들을 독려하며 정도연합군의 뒤를 쫓았다.
그 뒤로는 추격전이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운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허겁지겁 달아나던 정도연합군의 절반이 혈교의 무사들에게 도륙 당했다.
만일 혈교주가 중간에 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자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혈교주는 무슨 이유인지 중간에 추격을 멈췄다.
“교주님, 어찌 추격을 멈추시는 것입니까? 이대로 놈들을 쫓는다면 씨를 말려 버릴 수 있습니다.”
척진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놓아 두거라. 낚시가 재미있다고 개울의 물고기를 모두 잡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본디 물고기는 적당히 잡고 놓아 줄 줄을 알아야 다음에 다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법이지. 놈들이 살아남아 발악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즐겁지 않겠느냐?”
“소신이 교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사옵니다. 하기야 그 편이 놈들에게는 더욱 지옥 같은 하루하루가 되겠군요.”
혈교주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놈들은 피의 제물이 될 것이다. 단지 그 시간을 조금 늘려 준 것뿐이지.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남궁진천을 놓친 것이로구나. 놈을 나의 종복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말이야.”
혈교주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진운룡이란 놈이 부디 내 아쉬움을 채워 주길 기대해 보지…….”
산 아래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빛났다.
* * *
한편, 진운룡 일행은 등봉현에 여장을 풀고 있었다.
그들이 머무는 객잔은 등봉현에서도 가장 큰 곳이었다.
숭산이나 소림을 들르는 이들이 묶어 가는 곳으로 방도 삼층 모두 합하여 쉰 개나 됐다.
“흠 무림맹이 움직일 때가 됐는데 전혀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 이상하군요.”
구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진운룡 일행이 이곳에 머문 지 사흘째였는데 무림맹은커녕 정도의 무사들조차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이틀 후면 천사교주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이미 그 날짜도 하오문에서 소문으로 퍼뜨린 상태.
무림맹은 무조건 그전에 혈교를 칠 것이 분명했다.
한데, 약속 날짜가 이틀 남은 시점에도 무림맹 무사들의 코빼기도 볼 수 없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흥! 결국 놈들이 혈교 무리에게 겁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주군께서 혈교를 처리해 주길 바라는 것이지. 제 놈들은 가만히 앉아서 목숨을 보전하려는 수작이 분명해.”
적산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에효, 전에 그리 설명 드리지 않았습니까요? 공자님이 소림으로 향하는 것이 강호에 소문난 이상 무림맹은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니까요?”
구학이 답답한 듯 다시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객잔 문이 부서지며 피투성이 중년인이 쓰러지듯 달려 들어왔다.
“크윽!”
그 뒤로 비슷한 몰골의 사내 다섯 명이 객잔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몸은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간신히 몸을 가눌 정도였다.
“노, 놈들이 더 이상 추격하지 않는 듯합니다.”
일행인 듯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사내들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크윽! 일단 상처부터 처치하지 않으면 더 움직이는 것은 무리요.”
그들 중 도사복을 입은 중년 사내의 말에 나머지 다섯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율 진인의 말이 맞습니다. 이대로라면 내상으로 인해 멀리 가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일단 간단하게라도 운기조식을 해 내상을 다스리는 편이 낫습니다.”
영웅건을 머리에 두른 사내가 동의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진운룡 일행에 이르렀다.
“저자들은?”
사내들이 긴장한 눈으로 진운룡 일행을 노려봤다.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던 구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공동의 진율 진인이 아니십니까?”
진율이 굳은 얼굴로 구학을 응시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경계를 풀지 않은 상태였다.
“진율 진인이 맞으시군요? 아, 저는 하오문의 말학인 구학이라 하옵니다.”
구학이 눈을 빛내며 포권을 했다.
하오문이라는 말에 진율을 비롯한 여섯 사내들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구학이 진실을 말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기에 여전히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혈교 때문에 숭산 주변에는 무림인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상태.
그런데 이토록 한가로이 등봉현 객잔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어쩌다가…….”
말을 하던 구학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호, 혹시 정도연합군이 혈교를 친 것입니까?”
구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동시에 무심하게 앉아 있던 진운룡이 고개를 돌렸다.
“정도연합군?”
갑작스런 진운룡의 반응에 사내들의 긴장이 다시 높아졌다.
“그, 그대들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가!”
진율이 비틀거리며 물었다.
얼핏 보기에도 적산의 기세는 상당했고, 진운룡에게서는 별다른 기세를 느낄 수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는 위압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혈교가 웅크리고 있는 코앞에 있다는 것은 셋 중 하나였다. 그들 역시 혈교의 무리이거나, 아니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강호초출 무인, 그도 아니면 혈교를 겁내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고수!
진율이 느끼기에 진운룡은 절대 강호초출의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온몸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것은 수많은 세월을 수련하고 수없는 싸움을 겪은 노고수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었다.
“나는 진운룡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도연합군이 혈교를 쳤나?”
진운룡이라는 이름에 진율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그대가 바로 진운룡!”
진율의 반응만으로도 진운룡은 더 이상 대답을 들을 이유가 없어졌다.
“벌써 움직였군!”
진운룡의 시선이 소은설에게로 향했다.
“나는 지금 소림으로 갈 것이다. 너와 구학은 여기 남아서 기다리도록 해라.”
혈교의 소굴로 소은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혈교 교주는 그동안 상대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일 것이다. 게다가 그 수하들 또한 혈신대법을 받은 자들.
괜한 위험을 자처할 이유가 없었다.
소은설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자신이 따라가 봤자 진운룡에게 방해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다녀오실 동안 제가 은설이를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요!”
소림사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말에 안도한 구학이 신이 나서 말했다.
“쯧쯧, 네놈 몸이나 잘 간수해라!”
적산의 호통에 찔끔한 구학이 얼른 소은설 뒤로 숨었다.
“가자, 적산.”
“후후, 기다렸소! 주군!”
진운룡과 적산이 바람처럼 객잔 밖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