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101화 (101/150)

# 101

/혈룡전 5권 (101화)

1장 악마의 재림/

“헉! 헉! 크윽…….”

수풀 속을 정신없이 달리는 개방 방주 구천엽이 연신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는 부상을 당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소림을 벗어났다.

하지만 혈교의 추적이 만만치 않았다.

‘크윽…… 마지막에 꼽추 놈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크군!’

구천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림을 벗어나기 직전, 온몸에 가시가 돋아난 꼽추에게 일장을 허용했는데, 그 상세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장력에 독이 섞여 있었는지 기혈이 끓어오르고 운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구천엽은 연신 뒤를 흘끔거리며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독 때문인지 눈이 점점 혼미해져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방향감각을 잃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크윽…… 젠장!”

구천엽이 욕지기를 토해냈다.

처음 혈교 무리를 치러 나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이러한 궁지에 몰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천하제일인이라 할 수 있는 남궁진천이 직접 나섰고, 정파의 최고 고수들이 모두 참여했다.

혈교 잔당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기에 고전하리라고는 생각했으나, 결코 이렇게 처참하게 패퇴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때였다.

“허억!”

갑자기 구천엽의 발이 밑으로 쑥 꺼졌다.

“뭐, 뭐야!”

그가 발을 디딘 곳에는 지름이 넉 자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크윽!”

균형을 잃은 구천엽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아래쪽을 향해 미끄러졌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신형을 멈춰 세우려 애썼지만, 구덩이의 벽은 마치 기름을 바른 듯 미끄러워 헛손질만 할 뿐이었다.

구덩이는 제법 깊은 모양인지 한참을 쓸려 내려갔는데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크으으…….”

이대로 바닥에 충돌해 버린다면 지금 그의 몸 상태를 감안해 보았을 때,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구천엽은 뒤엉켜 버린 기혈로 인해 몸 여기저기 날뛰고 있는 내공을 억지로 끌어모아 충돌에 대비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 기운이 퍼져 의식마저 점점 더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쿠웅!

그때, 충격과 함께 구천엽의 육신이 바닥과 충돌했다.

“우욱!”

쿨럭!

비명을 크게 지른 구천엽이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냈다.

내공을 최대한 모아 몸을 보호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극심한 통증이 하반신을 유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덩이가 비스듬히 경사져 있었다는 점이다. 직각으로 떨어져 내렸다기보다는 미끄러져 흘러내린 것이다.

만일 그대로 떨어졌다면 단지 다리가 부러지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윽…… 제, 젠장…….”

구천엽은 고개를 들어 자신이 떨어진 입구를 살폈다.

아마도 땅 밑으로 뚫린 동굴에 빠진 듯했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주변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울리는 정도를 보아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 같았다.

구천엽은 우선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나마 부러진 두 다리 외에 다른 곳은 멀쩡한 편이었다.

문제는 꼽추의 독장(毒掌)에 당한 내상.

‘크으으…… 이런 몸 상태로는 이곳을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해.’

한참이나 떨어졌음을 고려해 볼 때, 지상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그가 구덩이를 타고 오르는 것은 무리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당장은 운기를 해서 독을 몰아내는 것에 집중해야겠군.’

움직일 수 없다면 차라리 내상을 치유하는 데 집중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독 기운만 몰아낼 수 있다면 공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내공이 받쳐 준다면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크윽!”

구천엽은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러진 다리를 끌어당겨 힘겹게 자세를 잡은 그가 천천히 운기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우우우우우우웅!

갑자기 동굴이 웅웅대며 울리기 시작했다.

―크크크크크!

동시에 귀기 어린 웃음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누, 누구냐!”

깜짝 놀란 구천엽이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웃음소리는 동굴 전체를 흔들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담겨져 있었다.

‘고, 고수!’

구천엽은 극도의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지척에 있었는데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웃음소리만으로 이정도 위력을 보여준다는 것은 상대가 최소한 화경을 넘어선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구천엽도 화경을 넘어섰지만, 지금 그의 상태를 감안할 때 상대가 적의를 가지고 덤벼든다면 제대로 대응도 못해보고 당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크크크크…… 드디어…… 그릇이…… 백……삼십 년 만에…….

귀를 찢는 듯한 목소리가 구천엽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구천엽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릇이라니!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무언가 불안하고 두려운 느낌이 구천엽의 뇌리를 건드렸다.

“허억!”

불안한 예감은 바로 현실이 됐다.

그의 몸을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끈적한 기운이 휘감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스스스스!

“뭐, 뭐냐!”

구천엽이 급히 기운을 떨쳐내려 했지만, 끈적한 기운은 그럴수록 더욱 그의 육신을 옭아맸다.

시체가 썩은 것 같은 불쾌하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를 악물고 몸부림을 쳤으나 마치 마비산에라도 당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런데다 추락과 독의 여파로 남아 있는 공력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구천엽은 결국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기운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크크크크크…… 키키키키…….

음산한 웃음소리가 더욱 짙어진다 싶은 순간 허공에 두 개의 붉은 섬광이 나타났다.

섬광 주위로는 어둠보다도 더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붉은 섬광을 마주한 구천엽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의 머릿속을 공포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죽음보다 더 깊고 어두운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대, 대체…….’

그는 자신이 마주한 존재가 재앙과도 같은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슈아아아악!

그때, 한 쌍의 붉은 섬광이 구천엽을 덮쳤다.

동시에 소용돌이치던 검고 어두운 기운이 구천엽의 눈, 코, 입을 비롯한 칠공(七孔)으로 파고들어 갔다.

‘끄으으윽!’

머리가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구천엽의 뇌를 흔들었다.

뭍으로 끌려 나온 생선이 파닥이듯 구천엽의 온몸이 심하게 경련했다.

두 눈이 하얗게 뒤집어진 구천엽의 정수리로 붉은 섬광이 번개가 내려치듯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엉!

굉음과 함께 경련하던 구천엽의 육신이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어느새 검은 기운도 모두 사라진 후였다.

요동치던 동굴 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요했다.

그때, 놀랍게도 죽었다고 생각한 구천엽의 손가락이 꿈틀, 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손가락, 그리고 손목, 팔다리를 꿈틀거리더니 급기야 뒤집혔던 눈동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떤 구천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두 눈에는 엷게 붉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크크크크…….”

그 사이로 귀기 어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크크크,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드디어 나 혈마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구나!”

혈마!

분명 혈마는 진운룡의 손에 백삼십 년 전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한데 이곳에서 왜 그 이름이 다시 튀어나온단 말인가.

“기다려라! 내가 곧 세상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크하하하하!”

스스로를 혈마라 칭한 구천엽의 광소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