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혈룡전 5권 (102화)
2장 소림 (1)/
진운룡의 신형이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산 위로 쏘아져 나갔다. 장애물들이 곳곳에서 진로를 방해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미끄러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고 거침이 없었다.
“주군, 같이 갑시다!”
적산이 헉헉거리며 진운룡의 뒤를 쫓았다.
객잔에 나타난 정파 무인들의 꼬락서니나 주변에 느껴지는 다급한 움직임들로 보아 이미 싸움은 무림맹의 패배로 결말이 난 듯했다.
그럼에도 진운룡이 서둘러 움직이는 이유는 아직 난전의 혼란이 가시지 않았을 지금, 소림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쓸데없는 번거로움을 상당 부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두른 덕에 두 사람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소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운룡의 예상과는 달리 소림은 방금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허…… 이거 싸움이 있기는 있던 거요?”
적산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헛바람을 토해냈다.
산문 앞에는 혈교의 무리로 보이는 복면인들 열 명 정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느긋한 자세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저희들끼리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양 농지거리를 하는 모습이 방금 큰 싸움이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진운룡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무림맹 놈들이 혈교 녀석들을 너무 쉽게 보고 밑에 조무래기들 몇 놈만 보낸 것 아니요?”
지금 소림의 상태는 무림맹이 혈교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완패했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 적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보다는 혈교의 전력이 무림맹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고 봐야겠지.”
진운룡이 무심한 듯 이야기했다.
그가 알기로 남궁진천은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집요하고 철두철미한 인물에 가까웠다.
그런 자가 상대를 얕보거나 방심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참히 깨진 것이다.
그것은 곧 혈교의 전력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뜻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림사의 정문을 응시하던 진운룡이 몸을 움직였다.
“가자!”
“후후, 몸 좀 풀어봅시다!”
적산이 씩 웃으며 성큼 그 뒤를 따랐다.
“응? 아직 도망치지 않은 놈이 있었나?”
복면인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 목숨이 서너 개는 되는 모양이로구나. 기껏 살려주었더니 제 발로 다시 목을 내밀다니. 큭큭큭!”
“후후, 아니면 너희 놈들도 교도가 되려는 것이냐?”
“큭큭큭, 교주님의 위대하심을 중원 무인들도 벌써 깨달은 게로구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든 복면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뱉어내며 이죽거렸다. 그들의 목소리나 눈빛은 광기에 젖어 있었다.
진운룡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신(死神)이 앞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 건방을 떠는 복면인들의 가소로운 작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상태가 진운룡 자신이 피의 광기에 취해 있을 때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 역시 혈신대법, 혹은 그와 비슷한 술법을 받은 듯했다.
산문을 지킬 정도라면 혈교에서 그리 높은 위치에 속해 있는 자들은 아닐 터였다.
그런 자들에게까지 술법을 행하려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켰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주제도 모르는 개잡놈들!”
그때, 복면인들의 조롱을 참지 못한 적산이 욕을 내뱉으며 뛰쳐나갔다. 진운룡은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까지 온 이상 싸움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면인들 정도라면 적산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복면인들과의 거리를 좁힌 적산이 번개처럼 도를 휘둘렀다.
“엇!”
“이놈!”
예상외로 빠른 적산의 움직임에 놀란 복면인들이 황급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서걱!
하지만, 그보다 적산의 도가 선두에 선 복면인의 가슴을 가로로 길게 가르는 것이 빨랐다.
“크악!”
비명과 함께 복면인의 가슴이 쩍 벌어지며 피 분수가 솟아올랐다.
“놈!”
“막아라!”
“크헉!”
첫 번째 복면인이 미처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그 옆에 있던 복면인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고, 거의 동시에 그 뒤에 검을 찔러오던 복면인의 왼쪽 가슴이 터져 나갔다.
스걱! 파악!
복면인들이 악을 쓰며 검을 휘둘렀지만, 적산의 옷자락조차 베지 못했다. 마치 환영처럼 적산의 신영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나타날 때마다 피가 튀고, 복면인들이 쓰러졌다.
열 명의 복면인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겨우 숨 한 번 쉴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클클클…… 소란스러워 달려와 봤더니 재밌는 놈이 있구나.”
그때였다.
마치 쇠를 긁는 듯 불쾌한 목소리가 산문 뒤쪽에서 들려왔다.
도에 묻은 피를 털어낸 적산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꼽추 노인네?”
적산이 뒤틀린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목소리 주인의 모습이 무척 기괴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 한 올 없는 머리, 주저앉은 코는 콧구멍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위로 젖혀져 있고, 이리저리 멋대로 돋아난 이빨은 툭 불거진 입술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두 눈은 그 크기가 달라 한쪽은 거의 감은 듯 조그만 한 반면, 나머지 한쪽은 흰자위가 위아래로 드러날 정도로 컸다.
그의 외모를 더 기괴하게 만드는 것은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두 배는 큰 머리에 비해 사 척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 그리고 적산이 이야기했던 대로 마치 혹이라도 난 듯 크게 굽어 있는 등이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혈교의 사 사령 추노였다.
추노의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 적산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두 눈에는 호승심이 가득했다.
본래 강한 상대만 보면 끓어오르는 투기를 주체할 수 없는 그였다. 추노는 적산의 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라?”
하지만, 추노는 그런 적산을 무시한 채 진운룡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클클클, 이게 누구신가. 네놈이 바로 진운룡이라는 애송이로구나?”
추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운룡의 두 눈에 이채가 일었다.
상대가 단번에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크크크, 어차피 소림 주변은 모두 본교가 장악한 지 오래다. 네놈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우리 시선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기야 이미 소림이 혈교의 손에 떨어졌으니, 숭산 인근은 혈교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다. 진운룡이 딱히 은밀히 행적을 숨기거나 한 것도 아니기에 추노가 그의 정체를 파악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진운룡 일행이 머물던 객잔에서 이미 혈교에 정보가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진운룡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그 아이가…….’
객잔에 남겨두고 온 소은설과 구학이 떠올랐던 것이다.
만일 숭산 인근이 이미 혈교에게 장악되었다면, 두 사람만 객잔에 남아 있는 것은 너무도 위험했다. 경신법 외에는 변변한 무공을 익히지 못한 소은설은 물론이거니와 구학 역시 말이 하오문주의 수제자일 뿐, 그동안 무공 연마를 게을리한 터라 이제 이류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미 진운룡의 일행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것이 빤한 이상, 혈교에서 그녀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한데, 어째서 벌써 온 것이냐? 교주님과의 약속 날짜는 사흘 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은설의 문제로 고민에 빠져있는 진운룡에게 추노가 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진운룡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것인지 계속해서 위아래로 진운룡을 살피고 있었다.
“후후, 주군께서 무엇 때문에 네깟 놈들이 언제 오라는 대로 따라야 된단 말이냐?”
적산이 추노를 향해 이죽거렸다.
“십이천(十二天)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애송이 놈이 겁도 없이 나대는구나!”
날카로운 살기가 추노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십이천의 이름을 마치 아이 부르듯 쉽게 내뱉는 추노의 모습을 다른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그 광오함에 비웃음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산은 추노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음을 타고난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훗, 늙은이, 어디 한 번 덤벼보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산은 물러서지 않고 기세를 쏘아냈다. 어찌 보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었다.
추노의 두 눈이 붉게 발광하고 그의 주변 공기가 우르릉거리며 울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감이 흘렀다.
“끄응…….”
그때, 예상 외로 당장에라도 적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추노가 침음성을 내쉬고는 천천히 살기를 거두었다.
“빌어먹을! 교주님의 분부만 아니었다면 네놈은…… 벌써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것이야!”
크르릉거리며 잔뜩 화를 참는 추노의 모습에 적산이 코웃음을 쳤다.
애써 적산을 무시한 추노가 다시 진운룡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여기까지 온 이상 교주님께 안내해 주마. 나를 따르거라!”
참혹하게 쓰러진 복면인들의 시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추노가 산문 안쪽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은 채 진운룡을 바라봤다.
잠시 추노를 바라보던 진운룡이 적산에게 시선을 옮겼다.
“적산, 너는 객잔으로 돌아가거라.”
“헛! 무슨 소리요, 주군. 여기까지 와서 별 재미도 못보고 그냥 돌아가란 말이오?”
적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복면인들의 실력이 워낙 보잘 것 없어 제대로 손맛을 보지 못한 터라 그러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한데 그냥 돌아가라니 적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여기는 나 혼자 충분하다. 너는 차라리 객잔으로 돌아가 일행을 지키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
“아!”
그제야 진운룡의 뜻을 알아차린 적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 걱정 말거라. 교주님께서 네놈들을 어찌하실 요량이었으면 벌써 네놈들 목숨은 사라지고 없었을 테니. 이번에는 단지 교주님께서 네놈에게 흥미를 느껴 직접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어 마련한 자리일 뿐이니라. 물론, 그렇다고 네놈이 교에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그 죄는 차후에 내 두 손으로 직접 벌해주마.”
당장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는 듯 추노가 입맛을 다셨다.
“사악한 네놈들의 말을 어찌 믿겠느냐? 주군, 일행은 걱정 마시오. 내가 반드시 놈들로부터 보호하겠소.”
살짝 목례를 한 적산이 몸을 훌쩍 날려 산 아래로 쏘아져 갔다.
조소를 입에 건 추노가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진운룡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소림사 경내로 진입할수록 비릿한 혈향(血香)이 진운룡의 후각을 자극했다.
‘싸움의 잔재인가?’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야 혈교의 압승으로 끝난 상황이라면, 무림맹 쪽 피해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저지른 혈교의 작태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피가 적지 않게 흘렀으리라.
피 냄새뿐만 아니라 기분 나쁜 끈적끈적한 기운 역시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운 때문인지 피에 대한 갈증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어젯밤 소은설의 피를 흡수한 탓에 참을 만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마치 소림사 전체가 핏물에 잠긴 것 같군…….’
그가 혈마를 죽이러 혈마궁에 발을 들였을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자신들이 혈교의 후예라는 혈교주의 주장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혈교주라는 자는 과연 이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을까?’
혈신대법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그자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인상을 찌푸린 진운룡을 힐끔 쳐다본 추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이제야 조금 두려운 모양이구나. 이 기운이야말로 교주님께서 교인들을 위해 내려주신 축복, 혈마기(血魔氣)이니라. 끌끌, 하기야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는 축복이지만, 네놈들은 오금이 저릴 것이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하는 추노의 말을 무시한 진운룡의 시선이 북동쪽 방향을 향했다.
피 냄새와 끈적끈적한 기운이 그곳에서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추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은 소림에서도 가장 심처에 속하는 장소였는데, 바로 방장실이 위치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