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103화 (103/150)

# 103

/혈룡전 5권 (103화)

2장 소림 (2)/

대웅전과 나한전을 지난 두 사람은 사방 이십 장 정도 되는 넓은 공터에 이르렀다.

공터 한가운데 뒤쪽에는 그다지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전각이 한 채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전각이 바로 소림의 주지, 방장이 머무는 방장실이었다.

“으음…….”

방장실 앞에 도착한 진운룡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였으나, 방장실 앞 공터에 펼쳐진 광경은 그런 진운룡으로서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림승으로 보이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대나무 장대에 매달려 공터에 널려져 있었는데, 그들의 왼쪽 가슴은 모두 구멍이 뚫린 채였고, 칼로 베어져 반쯤 잘린 손목과 발목의 상처에서 핏물이 끈적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부패가 꽤 진행된 시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그 피만은 굳지 않은 채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시신들의 정체가 기껏해야 열 살이 채 넘지 않은 동자승들이었다는 것이다.

“클클클, 소림 중들의 피 맛은 제법 괜찮았지……. 게다가 어린 것들의 피는 더욱 그 향기가 짙고 깨끗하거든…….”

추노가 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조소를 지었다.

진운룡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교주에게서 혈신대법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눈앞에 참혹한 죽음들을 대하니 그냥 모른 채 할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 혈교의 무리를 놔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이 억울하게 스러져 갈까.

그는 비록 불의와 악을 용납하지 않는 협의지사(俠義之士)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렇다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죄 없는 죽음을 모른 체 할 만큼 냉혈한은 아니었다.

“너희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겠구나.”

무심하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진운룡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순간, 추노는 온몸이 예리한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듯한 느낌에 눈을 부릅뜬 채 굳어버렸다. 진운룡이 딱히 기세를 뿜어내거나 살기를 쏘아낸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얼음에 갇힌 것처럼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옭아매고 그의 머릿속을 공포로 채웠다.

‘이, 이것이 대체!’

당황한 추노가 다급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구우우우웅!

그러자 간신히 굳었던 몸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놈!”

추노가 이를 갈며 진운룡을 노려봤다.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는 있으나, 아직도 엄청난 압력이 그를 짓누르고 있어 산이라도 짊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진운룡이 예의 무심하고 공허한 표정으로 추노를 향해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압력이 더욱 커졌다.

―그만!

그때, 방장실로부터 천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진운룡이 손을 멈추고 방장실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동시에 추노를 누르던 거대한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즉시 추노가 손톱을 세우며 진운룡에게 달려들으려 했다.

“물러서라!”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추노는 고개를 숙인 채 뒤로 급히 물러났다.

끼이익!

방장실 문이 열리며 두 마리 혈룡이 교차하는 화려한 용포를 차려입은 혈교의 교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는 일 사령 척진군을 비롯한 나머지 사령들이 호위하듯 늘어서 있었다.

추노가 동작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인 채 뒤로 급히 물러났다.

“네가 진운룡이라는 아이인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운 채 혈교주가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의 두 눈은 마치 뱀의 그것처럼 요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진운룡은 그 시선을 무심하게 받았다.

혈교주의 두 눈에 이채가 일었다.

“호오…… 생각보다 더 뛰어나구나. 그동안의 정보가 오히려 모자람이 있었어…….”

혈교주가 흥미로운 얼굴로 눈을 빛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진운룡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내가 내력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라니…… 그 나이에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경지로구나. 아니, 아마도 보이는 나이와는 다를 테지…….”

무언가 재밌는 것이라도 접한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혈교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본래 사흘 후가 아니었던가? 하긴, 어차피 상관없지. 너에 대한 환영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이니 굳이 사흘 후까지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군.”

혈교주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일었다.

“환영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느니라.”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듯 좌우로 두 팔을 벌린 채 혈교주가 말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혈교주의 말을 듣던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너에게 물어볼 것이 많다.”

조금은 무례한 진운룡의 언사에 혈교주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놈! 감히 어디라고!”

일 사령 척진군이 고함을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것을 혈교주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만! 내 명이 있기까지는 경거망동 말거라!”

깊숙이 머리를 조아린 척진군이 못마땅한 얼굴로 진운룡을 노려보며 뒤로 물러났다.

“좋아……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하기야 그 정도 능력이라면 이제껏 적수를 만난 적이 없을 테니 오만할 만도 하겠지. 강한 자에겐 당연히 오만할 권리가 있는 법. 하지만, 지나친 오만은 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니라. 단, 오늘은 세상에 교의 위대한 힘을 드러낸 기쁜 날이니 너그러이 넘어가도록 하지.”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온 혈교주가 말을 이었다. 마치 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 거만한 자세로 점잖게 목소리를 깐 채였다.

교인들에게 그는 현세에 강림한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능력 또한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진운룡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봐야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는 그에게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벌레처럼 밟아 죽일 수 있는 미천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피식.

진운룡이 심드렁하게 웃으며 혈교주를 바라봤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혈마를 죽인 그였다.

그 진전을 이은 혈교주가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내가 좀 바쁘니 잡설은 그만하고 먼저 하나만 묻지. 혈교의 후예라 들었다. 그렇다면 혈마와는 무슨 관계인가?”

사령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저런 쳐 죽일 놈!”

사령들이 당장이라도 진운룡에게 달려들 것처럼 살기를 뿜어내며 몸을 들썩였다.

“크하하하하하!”

그때, 혈교주의 광소가 그들의 움직임을 멈췄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방장실 앞 공터가 쩡쩡 울릴 정도로 웃어 젖힌 혈교주가 핏빛 눈동자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후후, 배짱이 제법이로구나. 마음에 들어…….”

본래 그는 이렇게 너그러운 이가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진운룡의 무례에도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방금 전 무림맹 정예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데다가, 강호제일고수라 일컬어지는 남궁진천마저 자신 앞에 무릎 꿇린 뒤라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느끼기에 진운룡은 남궁진천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자다.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가치가 있었다.

“주인이시여! 미천한 종이 저 잡종의 목을 따올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진운룡의 도발을 참지 못한 일 사령 척진군이 거도를 앞에 세우며 혈교주에게 허락을 구했다.

“흥! 소녀가 저자의 사지를 찢어놓겠사와요!”

그에 질세라 이 사령 심유화가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되었다. 내 앞에서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오히려 오랜만에 날 즐겁게 하는 녀석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그리고 어차피 너희 중 누구도 저자를 홀로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척진군과 심유화가 승복할 수 없다는 듯 진운룡을 노려봤다.

하지만, 교주가 허락하지 않은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운 혈교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후후, 날 즐겁게 해준 보답으로 너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마.”

혈교주가 의외로 진운룡의 질문에 순순히 답했다.

“너의 말대로 우리는 혈교의 후예들이며, 혈마께서 남기신 유지를 계승하는 자들이 맞다. 당연히 혈마께선 교의 조사(祖師)이시며 피의 근원이시니라.”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혈교주를 보며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혈신대법 역시 혈마에게 전수받은 것이겠군…….”

그 이야기는 혈신대법을 푸는 방법 역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은 이야기할 리 없겠지…….’

진운룡이 묻는다고 혈교주가 혈신대법을 푸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줄 리가 없었다.

결국 제압해서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운룡의 혼잣말에 혈교주의 두 눈에 이채가 일었다.

“보고를 듣고 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네 녀석은 대체 혈신대법이란 이름을 어찌 아는 것이냐? 분명 지금 강호에는 이를 아는 자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혈신대법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들은 혈교의 수뇌부와 정사마 무림인들 중에서도 각 문파의 수장급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혈마에 의해 중원 무림이 피에 잠기고, 수많은 목숨이 참혹하고 잔인하게 사라진 이후, 강호인들에게 혈신대법은 금기시되는 단어가 됐다.

혈신대법이란 단어는 그들에게는 지옥의 사신과도 같던 혈마를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가 벌였던 혈겁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무려 백오십 년 가까이 흐른 지금, 구대문파나 세가는 물론 마교와 사파의 거대 문파들과도 아무 연고가 없는 진운룡으로부터 그 이름이 다시 거론된 것이다.

당연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의 권능은 또 누구에게 받은 것이냐?”

더욱이 그는 혈마의 후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혈교주가 진운룡을 당장에 죽이지 않은 것은 진운룡이 피의 권능을 사용한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일 진운룡이 자신들과 같이 혈신대법을 받은 자라면 그 능력이 얼마나 될지 확신할 수 없기도 했고, 누군가 진운룡에게 혈신대법을 펼쳤다면 분명 그 배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보에 의하면 육 사령 홍혜란이 진운룡과 부딪혔던 당시 조우한 동창의 무리 역시 피의 권능을 사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진운룡과는 오히려 적대시했다고 하니, 그것은 곧 피의 권능과 혈신대법을 알고 있는 최소 세 개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일반 무인들이라면 우습게 여기는 그들이었으나, 피의 권능을 사용하는 자들이라면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진운룡이 빠져나왔다는 혈귀곡이라는 이름도 무척 걸렸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혈귀가 산다는 이야기 자체가 혈신대법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혈귀곡이라는 곳이 혈신대법을 사용하는 또 다른 무리의 근거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진운룡을 통해 그 정보를 확실히 알아내야만 했다.

그때,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지…….”

무언가 고민하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뜸을 들이던 진운룡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더 이상 귀찮게 말을 섞을 이유가 없는 것 같군.”

방장실 앞마당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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