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혈룡전 5권 (107화)
4장 혈교주의 최후/
혈교주가 분노와 불신이 뒤섞인 눈빛으로 진운룡을 노려봤다.
“크으……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도 무림 최고의 고수인 남궁진천을 쓰러뜨리고 승리감을 만끽하던 그가 이런 비참한 몰골로 땅바닥에 눕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것도 강호에 그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존재에게 말이다.
혈교주는 정말로 진운룡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런 고수가 어째서 지금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인가. 왜 하필 지금 나타나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무너뜨린단 말인가.
게다가 피의 권능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대결에서 펼친 무공들은 피의 권능과 전혀 연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혈교주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혈교주의 물음을 무시한 채 진운룡은 무심한 눈으로 혈교주를 내려다봤다.
“내가…… 혈신지체(血神之體)만 이루었어도…….”
혈교주가 이를 악물며 분함을 삼켰다.
혈신지체(血神之體)는 혈신대법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궁극의 경지다.
백오십 년 전 온 강호를 혈교의 깃발 아래 무릎 꿇렸던 그들의 사조 혈마가 이르렀던 경지다.
그동안 모아온 피의 제물들은 모두 이 혈신지체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혈신지체를 완성할 만큼의 제물이 모두 채워지게 된다.
혈교주는 자신이 만일 혈신지체를 이룬 후 진운룡을 만났다면 상황은 지금과 반대가 되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혈신지체?”
혈신지체라는 말에 진운룡이 반응했다.
제갈여령과 혈교와 혈신대법에 관해 꽤 오랫동안 조사했던 그였지만, 생소한 단어였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분명 혈신대법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혈신대법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진운룡이 관심을 보이자 혈교주의 입가에 조소가 일었다.
“쿨럭, 그렇다.”
한 차례 피를 게워낸 혈교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조사이신 혈마께서 이루셨던 경지가 바로 혈신지체다. 만일 내가 혈신지체만 이룰 수 있었다면 네놈은…….”
뒷말은 듣지 않아도 빤했다.
진운룡이 코웃음을 쳤다.
“그 혈마를 죽인 사람이 나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듯 내뱉는 진운룡의 말에 혈교주의 얼굴이 구겨졌다.
“크윽…… 끝까지 나를 우롱하겠다는 것이로구나!”
혈교주는 굴욕감이 가득한 얼굴로 진운룡을 노려봤다.
자신을 무릎 꿇린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혈교의 사조인 혈마까지 능멸하려 한다고 여긴 것이다.
강호인들은 혈마가 실종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진실은 그것과 달랐다.
혈교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혈마와 혈마궁의 마인들은 갑자기 등장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천외천의 고수에게 모두 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당시에 혈마를 꺾고 혈마궁을 혼자서 멸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쌓았다면 최소한 나이가 백 살에 근접한 자일 것이다.
이미 그때로부터 백오십 년이 지났다.
아무리 환골탈태를 거친 자라 해도 이백 년이 넘게 살아 있을 수는 없다.
혹시라도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해도 그런 자는 곧바로 등선하게 되니 세상에 남아 있을 리 없다.
인간이 이백 년이 넘도록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신대법을 통해 혈신지체를 이루어 불멸을 얻는 것뿐이었다.
혈교주로서는 당연히 진운룡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어차피 네 녀석 자유고, 어쨌든 혈마가 이루었던 경지가 혈신지체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혈신지체가 혈신대법을 통해 네놈들이 이루려는 궁극의 경지인가?”
“그렇다. 혈신지체를 이루게 되면 인간을 벗어나 반신(半神)이 되는 것이다.”
진운룡의 머릿속에 의문이 일었다.
자신이 혈마를 죽였을 때, 그곳에는 엄청난 규모의 대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혈마를 죽인 순간 자신에게 대신 떨어져 내린 저주.
규모는 달랐지만 그것 역시 혈신대법이다.
만일 혈마가 혈신지체를 이루었고, 그것이 혈신대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라면 왜 그때 또 다른 혈신대법을 시도하고 있었단 말인가.
둘 중 하나였다.
혈교주가 알고 있는 혈신지체가 최후의 경지가 아니었거나.
혈마가 혈교주의 말처럼 혈신지체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거나.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진운룡의 현 상태가 혈교주가 말하는 혈신지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혈교주에게서 자신의 현 상태를 되돌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문제는 첫 번째 경우였다.
당시 혈마는 지금의 혈교주보다 분명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있었다.
비록 진운룡에게 십여 초 만에 목이 잘렸지만, 그것은 당시 대법으로 인해 운신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제대로 붙었다면 제압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것은 곧 혈교주의 말대로 당시 혈마의 상태가 혈신지체였고, 사실은 그보다 높은 경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지금 내 상황에 대해서는 혈교주 역시 답해줄 수 없겠지.’
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운룡에게는 커다란 선물이었다.
마음을 정리한 진운룡이 혈교주에게 물었다.
“그 혈신지체라는 것은 불사의 존재인가?”
피를 마시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 현재 자신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물론, 아직 그가 살아온 날이 이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체가 전혀 노화되지 않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어지간한 충격이나 공격에는 상처조차 입지 않는다.
이미 혈신대법을 받기 전에 깨달음을 얻어 환골탈태를 한 그였지만, 노화가 늦춰졌을 뿐이지 아예 진행이 멈춰 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육체적인 면이나 진기를 살펴봐도 노화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신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이니 불멸인 것은 당연하다!”
혈교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혈신지체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반증이었다.
“약점이나 부작용은 없나?”
진운룡은 피를 마시지 않으면 석화된다.
그리고 피를 많이 마시면 점차 마기가 쌓여 광기에 잠식당하게 된다.
“완전체에 약점이 있을 리가 있느냐!”
“그렇다면 혈신지체는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흥!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왜 피를 마시지 않지? 피가 곧 우리의 근원이며 힘이거늘.”
하기야 혈교 교도들에게는 피를 마시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은혜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광기에 휩쓸리는 것 역시 부작용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혈신대법을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나?”
혈교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이자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혈신대법은 미약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신에 이를 수 있는 길이었다.
혈교의 교도라면 누구나 혈신대법을 받는 영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는 무림맹주의 손자이자 현 정도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로 불리던 남궁린까지도 혈신대법을 위해 자신의 위치와 가문을 버렸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은혜를 거부한단 말인가.
“네놈 역시 혈신대법을 받은 듯한데, 그것을 되돌리고 싶다는 것인가? 허…….”
잠시 어이없다는 얼굴로 탄성을 내뱉은 혈교주가 말을 이었다.
“지금 네놈이 가진 강함, 그리고 젊음, 신에 이를 수 있는 길, 그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그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피식!
진운룡이 실소를 흘렸다.
“흥! 네놈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냐? 마음에 수양이니, 선업을 쌓느니 하는 것 따위가 더 중요하다는 땡중과 도사 나부랭이들의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
진운룡이 혈교주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눈동자에 혈교주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멈칫했다.
“물론, 나도 그딴 이야기의 추종자는 아니다. 단지 강함과 젊은 신으로 향하는 길, 이 모든 것을 나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지.”
그는 혈신대법에 당하기 전에도 이미 깨달음을 얻은 자다.
육신은 여러 번의 환골탈태를 통해 젊어졌고, 강함으로 말하자면 이미 천하제일이라 확언하던 사부의 경지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또한, 그의 사부처럼 등선을 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사부에게 배운 심법 공심결(空心訣)은 궁극에는 신에 이르는 공부였다.
혈교주는 진운룡의 어이없는 대답에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진운룡의 모습이 순간 갑자기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너, 너는 대체…….”
끝을 알 수 없는 진운룡의 깊이가 그를 두렵게 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라.”
진운룡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에 혈교주가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런 방법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느냐.”
되돌릴 필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되돌릴 방법을 만든단 말인가.
진운룡의 얼굴에 실망감이 일었다.
예상했던 대로 혈교주에게도 저주를 풀 방법을 얻지 못한 것이다.
‘혈마라면 알고 있었을까?’
사실 그것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혈마라면 혈신대법에 대한 완벽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자료를 얻어 연구할 수 있다면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혈신대법에 대한 비급이나 자료는 어디에 있나?”
“흥! 낯짝도 두껍구나! 내가 그것을 네놈에게 곧이곧대로 말해줄 것 같으냐?”
비록 무공으로는 패했으나 마음만은 꺾이지 않겠다는 듯 혈교주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처음 진운룡을 만났을 때 보여줬던 오만하고 여유롭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물론, 그렇겠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한 진운룡이 갑자기 혈교주의 왼팔을 잡았다.
우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혈교조의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크으윽!”
눈을 부릅뜬 혈교주가 이를 악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진운룡의 손길이 곧장 혈교주의 오른 발목으로 향했다.
우득!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너무도 쉽게 혈교주의 발목이 꺾였다.
한마디 말도 없이 진운룡은 곧장 혈교주의 왼 발목도 마저 부러뜨렸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는 듯 진운룡의 움직임은 아무런 거리낌도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끄으으……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다……. 네놈이 어떠한 고통을 준다 해도 내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도 없을 것이다…….”
혈교주가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알고 있다.”
진운룡이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너 정도면 고통 따위에 입을 열지는 않겠지.”
혈교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장에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단지 제령안을 쓰려면 어느 정도 네 녀석의 진을 빼놓을 필요가 있거든.”
제령안은 상대의 정신에 들어가 기억의 조각을 읽는 술법이다.
당연히 대상의 경지가 높으면 정신의 벽이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낮았다.
하지만, 아무리 경지가 높은 자라 해도 진기와 체력이 고갈되면 정신 또한 흐려지기 마련.
진운룡은 그것을 위해 일부러 손을 쓴 것이다.
굳이 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제령안이라는 이름에서 그 용도를 충분히 짐작한 혈교주가 이를 갈며 발광했다.
“네, 네놈! 감히 내게……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냐!”
“아직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군.”
분노하는 혈교주를 무시한 채 진운룡의 오른손이 혈교주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푸욱!
혈교주의 옆구리를 파고든 진운룡의 오른손이 갈비뼈 하나를 그대로 잡아당겼다.
우드득!
“끄으으…….”
갈비뼈가 생으로 뜯겨 나가는 고통에 혈교주가 경련을 일으켰다.
진운룡이 고개를 숙여 뒤집어진 혈교주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계속된 출혈과 고통으로 의식이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
바로 진운룡이 원했던 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진운룡의 두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었다.
우우우우웅!
“끄으으윽!”
제령안이 뇌 속을 파고들자 혈교주의 몸이 마치 벼락을 맞은 듯 경련하기 시작했다.
혈교주의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 둘씩 진운룡의 머릿속으로 옮겨져 갔다.
그런데, 반각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응?”
진운룡이 무언가 이상을 발견한 듯 멈칫했다.
“혈신대법이 혈마에게서 전해진 것이 아니다?”
혈신대법에 대한 기억을 읽던 중 그 기원이 혈마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진운룡은 급히 혈마의 기억을 훑었다.
혈교주가 알고 있는 혈교 잔당들의 역사는 형편없이 초라했다.
혈마가 죽고 혈교가 붕괴한 후 잔당들은 비급과 대법에 대한 기록들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다.
반도 남지 않은 자료로 그들이 혈마의 절기를 다시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잔당들은 강호의 눈을 피해 음지로 숨어 그 명맥을 근근이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복수나 강호수복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바뀌는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혈교주가 혈신대법의 비급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묘한 우연이자 행운이었다.
당시 마흔다섯 살이던 혈교주는 일류를 간신히 넘은 무인이었다.
혈교의 무인들이 공력을 키우고 무공을 상승시키는 방법은 흡혈마공이다.
흡혈을 통해 상대의 정혈을 갈취하여 자신의 내공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자료를 잃어 그는 반쪽짜리 흡혈마공밖에 배우지 못한 그에게 상승의 경지에 이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강호의 눈을 피해 몰래 흡혈을 해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무공 실력이 미천하다보니 함부로 흡혈을 할 수도 없었고, 때문에 반쪽짜리 흡혈마공도 제대로 쓸 수 없으니 공력을 쉽게 모을 수가 없었다.
결국 무리해서 흡혈을 하다 강호인들에게 들켜서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이름 모를 산속 동굴에 숨어들었고, 그곳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상자와 그 안에 들어 있는 혈신대법의 비급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이상한 것은 그렇게 중요한 비급이 보관되어 있었음에도 동굴에는 그 어떤 기관 장치나 함정도 없었고, 마치 보란 듯이 동굴 한가운데 비급이 들어 있는 상자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그 동굴이 찾기 쉬운 곳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진법에 의해 보호를 받거나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급이 이제껏 발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당시 혈교주는 비급을 발견한 기쁨 때문에 이러한 점들을 그다지 깊이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억을 들여다본 진운룡으로서는 그 상황이 여간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혈신대법의 비급을 노출시킨 것 같지 않은가.
‘일단 혈교주가 발견한 혈신대법의 비급은 혈교의 것이 아니다.’
혈교주의 기억을 통해 알아낸 결과였다.
본래 혈신대법은 혈마가 만들어냈다고 알려져 있다.
한데, 상자나 비급 어디에도 혈교의 문양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비급의 글씨 역시 혈마의 필체와 달랐던 것이다.
혈마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혈신대법의 비급을 쓰게 했을 리는 없으니, 그 비급은 어딘가 다른 출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은 곧 혈마가 혈신대법을 창조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면, 혈마 훨씬 이전부터 혈신대법이 존재했고, 드러난 혈교 외에 혈신대법을 익힌 세력이 또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러한 세력이 하나일지, 아니면 다수일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얼마 전 진운룡이 홍혜란을 잡을 당시 부딪혔던 동창의 무리들 역시 흡혈의 공능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체 혈신대법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진운룡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혈마가 익힌 혈신대법 역시 그자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자신이 당했던 그 저주스러운 대법.
혈마에게 혈신대법을 전하고 혈교주와 동창의 무리에게 혈신대법을 전한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수많은 의문들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존재한다면 그자들은 이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겠군!’
진운룡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혈신대법을 창조한 자라면 그것을 되돌릴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알고 있어야 했다.
만일 그자도 그 방법을 모른다면 진운룡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동창을 먼저 조사해 봐야겠군.’
혈교주에게서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
남아 있는 연결 고리는 이제 동창밖에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혈신대법을 입수했는지를 조사해 보면, 배후에서 혈신대법을 세상에 뿌린 자에게 조금은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을 정리한 진운룡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혈교주의 육신은 물에 빠진 허수아비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무리하게 제룡안을 사용하는 바람에 뇌가 녹아버린 것이다. 뇌가 녹은 인간이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오늘 정도 연합군을 물리치고 무림맹주 남궁진천을 무릎 꿇린 그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비참한 최후일 터였다.
이로써 혈교는 다시 한 번 진운룡의 손에 멸망하게 됐다.
그야말로 기묘한 악연이라 할 수 있었다.
진운룡은 잠시 혈교주의 시체를 바라보다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