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혈룡전 5권 (108화)
5장 혼돈 (1)/
빠른 속도로 숭산 숲속을 빠져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거지 복장에 구결 매듭을 지은 것을 보아 개방의 고위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여기저기 핏자국이 보이는 것이 상처를 입은 듯했지만, 움직임은 무척 경쾌했다.
한동안 숲의 소로를 따라 내려가던 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앞쪽에서 인기척이 일었던 것이다.
“헉, 헉.”
부스럭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화산파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혈교 무인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중이었는지 낭패한 몰골이었다.
“아니, 구 방주 아니시오. 다행히 무사하셨구려.”
화산파 도사가 반가운 얼굴로 거지에게 아는 척을 했다.
장년의 거지는 바로 동굴을 빠져나온 혈마, 지금은 개방 방주 구천엽이었다.
혈마는 잠시 멈칫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잠시뿐이었다.
혈마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리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갑자기 뻗어나가 화산파 도사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억! 무, 무슨 짓이오!”
“그러지 않아도 정혈이 부족하던 참에 마침 잘 되었구나. 잘 먹으마!”
너무도 갑작스런 혈마의 공격에 화산파 도사는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쉽게 제압당해 버렸다.
설마 개방 방주가 자신을 공격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끄으으윽……!”
정기가 빨려 나가며 화산파 도사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털썩.
얼마 지나지 않아 목내이가 되어버린 화산파 도사를 바닥에 버린 혈마가 만족한 듯 긴 숨을 뱉어냈다.
“후우…… 좋아. 당분간은 다시 예전의 힘을 찾는 데 주력해야겠군. 일단 이 껍데기를 이용해서 제물들을 끌어들이면 되겠어.”
눈을 빛낸 혈마가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 * *
혈교에 참패한 정도연맹은 그야말로 비참한 몰골로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무당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인원은 위중한 부상을 당한 남궁진천을 비롯, 결사대의 절반뿐이었다.
십이천이던 종리벽이 사망했고, 당문의 가주 당환도 목숨을 잃었으며, 개방의 장문인 구천엽은 실종되었다. 무당 태허진인과 화산 장문 임혁군은 목숨은 건졌으나 중상을 입어 운신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나마 혈교에서 적극적으로 추격을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당에 모여 있던 정도연합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남궁진천까지 무너진 이상 혈교와 혈교주를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직접 확인한 혈교주와 그 수하들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대로라면 백오십 년 전의 혈사가 다시 되풀이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이 경악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소림에 있던 혈교가 갑자기 무너지고 잔당들이 모두 달아났다는 소식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혈교주와 그 수뇌부들이 모두 누군가에게 참살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보고를 받은 남궁진천은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지금 강호에서 진운룡밖에 없었다.
당시에 등봉현에 도착해 있었고, 혈교를 치러 간다는 소문까지 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도연합의 정예들이 제대로 상대도 못해보고 패주했는데, 그자 혼자서 혈교를 괴멸시켰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갑자기 처음 진운룡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진운룡은 남궁진천이 쏘아낸 기세에 신음을 흘리고 피까지 보였다.
‘처음부터 나를 기만했지.’
실제로는 십이천 둘을 간단히 제압하는 능력을 가지고도 남궁진천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속인 것이다.
‘교활한 놈.’
생각할수록 진운룡의 안 좋은 면만 계속 떠올랐다.
‘그렇다고 그 혈교주와 수하들을 혼자 상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아니, 있어서는 안 돼.’
몇 번이고 그 사실을 부정하던 남궁진천이 자리를 박차고 처소를 나섰다.
“제갈 군사에게 당장 회의를 소집하라 일러라!”
남궁진천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급히 삼청전으로 향했다.
* * *
무당 삼청전에 모인 정도연합의 인사들은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 있었다.
이번 결사대에 참가했다가 죽거나 중상을 당한 이들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있는 이들의 몰골도 그다지 온전치는 않았다.
대전 내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묘했다.
혈교와의 대전에서 패배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한 충격적인 소식으로 인해 이를 기뻐해야 할지 민망해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잠시 대전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던 남궁진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들 소식을 들었을 것이오. 혈교가 무너졌소.”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남궁진천의 시선이 군사 제갈휘를 향했다.
“누구의 짓인지 확인되었소?”
말투에서 마땅치 않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은 이곳에 모인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 강호를 지배하고 있는 구파일방과 세가들이 연합해서도 못 해낸 일을 다른 누군가가 해냈다는 것이 결코 기쁠 리가 없었다.
“실은…….”
그때, 공동파의 진율이 찌푸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때 패주하던 당시, 등봉현 객잔에서 진운룡이라는 자를 만났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진율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진운룡 말이오?”
남궁진천의 두 눈에 불길이 일었다.
그로서는 진운룡에게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잘난 손자 녀석을 죽인 자가 바로 진운룡이었고, 최근 그의 행보가 무림맹, 정파의 고수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심기를 건드리는 존재였다.
“그렇습니다. 당시 그자는 정도연합이 혈교를 공격했다는 우리 말을 듣고는 수하를 데리고 급히 소림으로 올라갔습니다.”
대전에 모인 이들이 웅성거렸다.
“그럼 진운룡이라는 자가 혈교를 멸했다는 말이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모용기중이 되물었다.
“그것이…… 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이나, 그때 그자가 소림으로 향한 것은 분명 사실이오.”
남궁진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어찌 인간이…….”
냉철한 제갈휘조차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이 확인한 혈교의 전력은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한데, 문파나 세력도 아닌 한 개인이 그들을 전멸시키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자라면 가능할 수도…….”
홍무생이 침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직접 상대해 본 그의 말에 모두의 귀가 집중되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느낀 홍무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시 나와 독황을 상대하면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느낌이었네. 그런데도 우리는 그자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지. 그자가 마음만 먹었다면 순식간에 우리의 목숨을 취했을 것이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자의 나이가 과연 보이는 그대로 인지도 의심스러워……. 그 정도 능력이라면 반로환동의 고수일 수도 있네…….”
홍무생은 진운룡의 무서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그가 죽은 소은설을 살려내는 것까지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결코 인간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런 자를 적으로 삼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홍무생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반로환동이라니…….”
그런 경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그 유명한 달마 조사나 무당의 사조인 삼봉 진인도 무의 끝을 보았으나, 반로환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남궁진천 역시 환골탈태를 겪고, 현경을 넘어서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있으나 반로환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가 그것은 그저 호사가들이 이야기하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한데, 정말 그런 경지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진운룡이 그런 경지에 이른 자라면.
그렇다면 모든 게 말이 된다.
반로환동에 이른 초극의 고수라면 십이천을 아이처럼 가지고 놀고, 혈교주와 그 수하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진정 그자가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면 정도 무림에는 큰 전력이 아닙니까?”
진율의 말에 모용기중이 콧방귀를 꼈다.
“흥!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이오? 지금까지 행동을 보면 그자가 정도라는 증거가 없지 않소. 풍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자가 피를 흡수하는 사술을 쓴다고 하였소. 그렇다면 정도라기보다는 마도나 사도에 더 가까운 자가 아니요?”
“모용가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그에게 이미 풍신과 당황께서 당하지 않으셨소. 게다가 우리 개방에도 난입해서 행패를 부린 자요.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인 자가 아니요. 어쩌면 그자도 반로환동을 한 것이 아니라 혈교의 무리와 같이 사이한 술법을 통해 힘을 얻은 자일 수도 있소.”
진운룡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개방의 장로 왕규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혈교 교주와 그 수하들조차 상대할 수 없었는데, 그런 그들을 혼자서 꺾은 자와 척을 지자는 것이오?”
진율의 말에 모두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율 진인께서는 힘이 약하다 하여 악에 굴복하자는 말이오? 우리 개방은 결코 그럴 수 없소이다!”
“허, 왜 악이라 단정 짓는 것이오? 지금까지 그가 한 행동은 오히려 악을 멸하는 쪽이 아니었소?”
황보혁군이 조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황보가주께서는 저희 태상방주이신 풍신 어르신과 독황 어르신이 악이란 말이오?”
“어허, 그것은 오해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 아니요. 홍혜란과 남궁린이 혈교 놈들과 한패였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지지 않았소?”
“그만!”
그때, 남궁진천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일고 있었다.
자신이 맹주의 아픈 곳을 찔렀다는 사실을 눈치챈 황보혁군이 쓴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섰다.
잠시 화를 다스린 남궁진천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