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혈룡전 5권 (109화)
5장 혼돈 (2)/
“여러 정황상 진운룡이라는 자가 혈교를 멸한 것은 거의 확실하군. 어찌 되었든 결과가 이렇게 되면 우리 꼴이 참으로 우습게 되었소이다.”
남궁진천의 말에 모두 쓴 약이라도 마신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번일로 무림맹과 구파일방, 세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일단은 진운룡이라는 자를 다시 한 번 만나봐야겠소. 그자가 과연 어떤 자이며 우리와 양립할 수 있는 자인지 알아내야겠지. 만일 아니라면…….”
순간 남궁진천의 온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두 눈은 마치 광인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혈교주에게 패한 충격과 그러한 혈교주를 꺾은 자가 하필이면 손자를 죽인 악적 진운룡이라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과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다.
“그자가 반로환동을 했다 해도, 아니 신이라 해도, 무림에 해가 되는 자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소. 왕규 장로의 말대로 정도 무림과 무림맹은 결코 악에 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오.”
남궁진천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누구도 반문할 수 없었다.
“온 강호가 들고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없애야지요!”
개방 장로 왕규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호응했다.
홍무생이 씁쓸한 표정으로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남궁진천은 이미 진운룡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홍무생이 뭐라 한다 해도 그는 결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본래부터 남궁진천은 자신을 건드린 자에게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 아니 몇 배의 혹독한 응징을 해야 속이 풀리는 이였다.
결국 진운룡과 무림맹은 척을 지게 될 것이다.
‘허…… 화를 부르는구나…….’
만일 진운룡이 무림맹을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훤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어찌 보면 그 역시 진운룡에게 애지중지 하던 손녀딸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한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더 컸다.
“왕 장로의 의기가 이 남궁 늙은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구려. 다른 분들께서도 별다른 반론이 없다면 진운룡 그자에 대한 건은 이대로 처리하는 것으로 하겠소.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남궁진천의 두 눈동자에 잠시 살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홍무생의 얼굴에 시름이 더욱 깊어갔다.
***
황궁 심처.
“음…… 무림맹이 아닌 진운룡이라는 자가 혈교를 멸했다고?”
눈을 가늘게 뜬 황사 도중문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창제독 육환에게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숭산을 감시하던 동창의 당두들이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도중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육환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도중문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
본래 그들의 계획은 혈교와 무림맹이 서로 치고받아 양쪽 다 전력이 상했을 때, 조정의 이름으로 나라를 혼란케 한 죄를 물어 둘 다 처리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이 중원 땅에서 그들이 하는 일을 막아설 만한 존재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나라의 이름을 업고 하는 일이니 명분도 충분했다.
이미 황제는 도중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이 나라를 먹고, 세상에 피의 축복을 내리는 것이 머지않아 보였다.
한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도중문은 금세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뭐, 제법 귀찮은 녀석이긴 하구나. 하나, 어차피 놈은 혼자이지. 혼자서 아무리 날뛰어봤자 제 놈이 몸이 수십 개가 아니고서야 우리의 대계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니, 우선은 정파 놈들과 마교의 동향을 살피고 대법의 준비에 집중하도록 해라.”
“하지만, 놈을 그냥 두면…….”
육환이 아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놈이 우리와도 몇 번 부딪혔지?”
도중문이 육환을 빤히 쳐다봤다.
“그, 그렇습니다.”
육환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도 상하고, 네 녀석 자존심도 상했겠지.”
육환이 아무 말도 못한 채 도중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동창이 그토록 당하고도 진운룡을 그대로 놔둔다면 무척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깟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셈이냐? 이제 모든 것이 마무리될 때가 머지않았다. 그때가 되면 자연히 그깟 녀석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을 터. 무릇 일이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어야 하는 법이야. 놔두면 제풀에 지칠 것을 어리석게 놈에게 달려들지 말란 말이다.”
육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결코 크거나 공력이 실린 목소리가 아님에도 육환은 마치 태산이 찍어 누르는 듯한 압력을 느꼈던 것이다.
“일단은 제물을 모으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라. 혹시 모르니 대기시켰던 천혈단도 모두 투입하도록!”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육환이 오체투지하며 답하자 그제야 그를 내리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쯧쯧, 네 녀석도 아직 멀었구나……. 그만 나가 보거라.”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권력을 가진 동창제독을 마치 아이 다루듯 하는 도중문에게 육환은 아무런 반박도 못한 채 그대로 도망치듯 대전을 빠져나갔다.
* * *
낙양 외곽.
이곳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관제묘 주위로 수십이 넘는 거지들이 진을 치고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도 일반 거지들과는 사뭇 그 덩치나 기세가 달라 보였는데, 허리에 몇 개씩의 매듭을 매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개방의 방도들이 분명했다.
개방의 거지들이 수십이 넘게 모여 있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하지만, 이곳은 충분히 그럴 만한 곳이었다.
바로 이 관제묘가 개방의 낙양 분타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진운룡이 개방 총타에서 난동을 부린 이후로 전 분타의 경계가 더욱 삼엄해진 상태여서 다른 때보다 많은 숫자의 제자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중구난방으로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들의 두 눈만은 매의 그것처럼 매섭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어!”
그런데, 어느 순간 배를 긁으며 주변을 살피던 삼결 거지 하나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관제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년 거지를 향하고 있었다.
삼결 거지뿐만 아니라 주변의 거지들 역시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처음 일어섰던 개방의 삼결 제자 진소가 중년 거지를 향해 후다닥 달려 나갔다.
“아니, 방주님! 어디 계시다 이제야 나타나신 것입니까? 혹여 큰일이라도 당하신 줄 알고 방도들이 이제껏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겨우 삼결 제자의 신분인 진소가 상대가 태산 같은 방주라는 사실마저 잊고 허둥지둥 소리쳤다.
“방주!”
“방주님!”
“방주님이 돌아오셨다!”
관제묘 주변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뭐라! 방주님이 돌아오셨다고?”
관제묘 안쪽에서 나이가 지긋한 거지가 후다닥 뛰쳐나왔다.
허리에 다섯 개의 매듭이 매어져 있는 그가 바로 이곳 낙양 분타의 분타주 취견(醉犬) 양광이었다.
“허! 무사하셨군요! 하늘이 우리 개방을 버리지 않았음입니다!”
키가 크고 광대가 튀어나온 양광이 허리를 굽혀 개방 방주 구천엽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구천엽이 묘한 눈빛으로 양광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몸이 좋지 않으니 일단 쉬고 싶군. 그리고 자네와 단 둘이 따로 나눌 말도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게.”
“아! 제가 미처 방주께서 혈교 놈들과 혈전을 치루신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양광이 앞장서서 구천엽을 관제묘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관제묘 안쪽에 들어선 양광이 관우 석상 뒤쪽으로 향했다.
구천엽이 양광을 따라 석상 뒤로 들어서니 놀랍게도 그곳에는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분타 주위를 철저히 경계하고 방주께서 쉬시는 데 행여 방해가 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하거라!”
“예!”
낙양 분타의 개방도들이 절도 있게 읍을 하고 관제묘 밖으로 모두 빠져나간 후, 양광은 구천엽과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양광의 등을 바라보는 구천엽의 눈빛이 붉게 빛났다.
* * *
혈교주와 그 수하들을 죽인 진운룡은 일행과 함께 바로 등봉현을 빠져나와 개봉으로 돌아왔다.
쓸데없는 관심과 풍문에 휘말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개봉에 들어선 일행은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장원을 하나 빌렸다.
곽지량이 어느새 그들이 머물 장원을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어찌 보면 조금은 부담스러운 지원이었다.
하지만 적산과 구학의 수련을 위해서도 그렇고, 충격적인 일을 연이어 겪은 소은설을 위해서도 조용한 공간이 필요했기에 일단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