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혈룡전 5권 (110화)
5장 혼돈 (3)/
진운룡은 숙소에 앉아 혈교주에게서 얻은 기억을 정리했다.
그중에는 혈신대법의 부작용에 대한 것도 있었다.
혈교주가 시전했던 혈신대법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아래 단계는 일반 교도들이 받는 대법이라기에도 뭐한 단순한 술법이었다.
그만큼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적었고, 피의 권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단지 피를 마시면 힘과 공력이 늘어나는 정도였다. 광기에 휩싸이고 피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두 번째 단계는 남궁린과 방염이 받았던 것으로, 사령이 될 후보로 선택받은 자들에게 베풀어진다.
피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고 공력과 육체가 급격히 변한다. 역시 피를 마셔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광기가 점점 더 짙어지게 되며, 일정 시간마다 혈교주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결국 이지를 상실하고 광인이 된다.
세 번째 단계가 사령들이 받은 대법인데, 이 경우 광기나 피에 대한 갈증은 있지만, 이지를 잃고 광인이 되는 일은 없다.
단지 지속적으로 흡혈을 하면 성격이 점차 어둡고 음산하게 변하게 된다.
네 번째 단계는 혈교주가 스스로에게 시전했던 대법이다.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질 수 있고 정신이 미약한 인간들은 혼을 제압할 수도 있었으며, 혈신대법을 통해 자신의 권속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만들어낸 권속들은 결코 그의 명을 거역할 수 없으며,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광기가 쌓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혈교주는 그것을 광기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본성이 그러한 어둠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결국, 혈교주의 기억 속에도 진운룡에게 내려진 저주를 풀 방법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바로 혈교주가 시도하려 했던 마지막 대법.
혈교주 자신도 그 대법을 받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막연히 불사의 존재이자 완전무결한 혈신(血神)이 되는 대법이라 알고 있었을 뿐이다.
‘혹시 그 대법은 모든 부작용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진운룡은 잠시 떠오른 생각에 급히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그토록 끔찍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실마리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 생각나는 것은 동창이었다.
동창의 무인들 역시 피의 권능을 사용했다.
문제는 동창이라는 존재가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연 동창의 어느 선까지 혈신대법과 연계가 되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본부가 있는 황궁에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물론, 진운룡이 나라니, 황제니 하는 것에 얽매이는 이는 아니었으니 조용히 황궁에 잠입해서 알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황궁이라…….’
정 방법이 없으면 그렇게라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을 때였다.
“응?”
갑자기 진운룡의 감각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것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감각을 집중하던 진운룡이 갑자기 방을 뛰쳐나갔다.
“소은설!”
그의 감각에 걸린 것은 소은설의 숙소였다.
그곳으로부터 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곧장 소은설의 방으로 향했다.
콰당!
문을 거의 부수듯 밀고 들어간 진운룡이 방 안을 살폈다.
“으음…….”
침상에 누운 소은설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주군!”
소란을 듣고 뛰쳐나온 구학과 적산이 놀라 물었다.
진운룡이 소은설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과 온몸의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곁에 있는 진운룡에게까지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몸이 뜨거워져 있었다.
“아흑…….”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진운룡이 감각을 끌어올려 소은설의 내부 기운의 움직임을 살폈다.
소은설의 내부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기운들이 뒤엉켜 부딪히고 폭주하고 있었다.
당장에 기운들을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몸 내부의 장기들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진운룡은 즉시 소은설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직접 손을 써 내부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그때까지 굳게 닫혀있던 소은설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녀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갑자기 진운룡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운랑…….”
순간, 진운룡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동공은 흐릿하게 풀려 있는 상태였다.
“어험! 험! 그, 그럼 둘이 좋은 시간 가지십시오!”
“크흠…….”
구학과 적산이 겸연쩍은 얼굴로 얼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진운룡은 두 사람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소은설의 상태에 집중했다.
자신과 접촉하고 나자 이상하게도 좌충우돌 하며 들끓던 기운들이 한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위험했던 그녀의 내부가 조금 진정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가 제어하기에는 너무 강한 기운의 움직임이었다.
소은설은 진운룡의 몸을 더듬으며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가슴에 머물던 그녀의 머리가 진운룡의 어깨와 팔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손목에 멈췄다.
“아……!”
무언가 황홀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그녀가 탄성을 터뜨렸다.
소은설의 입술이 진운룡의 손목으로 향했다.
진운룡은 그런 그녀를 제지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봤다.
따끔!
그때, 그녀의 이가 진운룡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진운룡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문득 짐작 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쪼옥!
소은설이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을 탐했다.
“하아……!”
진운룡의 피가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가자 소은설이 몸을 비틀며 교성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해서 진운룡의 피를 마셨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고, 기껏해야 작은 술잔 하나를 채울 정도의 양이었다.
진운룡의 피를 세 번째 흡수한 소은설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눈을 감고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기혈은 안정되어 있었고, 호흡도 고르게 돌아온 상태였다.
어느새 온몸을 달구던 뜨거운 열기도 사라져 있었다.
진운룡은 바닥에 쓰러진 소은설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그의 시선이 소은설과 자신의 손목을 번갈아 향했다.
‘부작용인가…….’
그간 별 일이 없어서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부작용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하기야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을 리가 없었다.
‘일종의 발작인가…….’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지 아니면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내 피를 마시면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데…….’
혈교주의 기억 중에 죽은 자를 되살리는 부분에 대해서도 있었다.
하지만, 소은설과는 많이 달랐다.
혈교주의 피를 마시고 살아난 이들은 혈교주에게 종속되고 그의 말만 따르는 꼭두각시가 된다.
어찌 보면 살아 있는 강시와 비슷한 상태였다.
의식도 그다지 생전처럼 명확하지 않았고, 피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혈교주의 기억에 의하면 소림 방장이던 공지가 그 경우였다.
살아 있는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무공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지를 상실하고 피에 대한 본능과 혈교주에 대한 복종만이 남아 있는 상태.
그러고 보니 소은설을 혈교주에게 데리고 가면 살릴 수 있다던 홍혜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만일 그랬다면 소은설은 공지처럼 되었을 것이다.
진운룡이 쓸쓸한 눈빛으로 소은설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과 제갈여령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의 손길이 소은설의 볼을 스치듯 지나쳤다.
잠시 멈칫 하던 진운룡이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