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111화 (111/150)

# 111

/혈룡전 5권 (111화)

5장 혼돈 (4)/

다음 날 아침, 소은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으음…….”

몸을 일으키자 약간의 현기증이 찾아왔다.

그녀는 간밤에 또 제갈여령이라는 여인이 되는 꿈을 꿨다.

“운랑…….”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어렸다.

지금 그녀는 분명 소은설이었지만 동시에 제갈여령이었다.

머릿속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제갈여령의 기억들, 그리고 감정들이 그대로 그녀의 머릿속에 머물고 있었다.

진운룡에 대한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나는 누구일까…….’

분명 죽었다가 살아난 이후로 일어난 변화였다.

그때, 죽음의 순간 경험했던 현실 같던 환상.

그 환상은 이후로도 매일 밤 그녀의 꿈속에 나타났다.

진운룡과 함께했던 시간들, 혈마를 잡기 위해 그를 찾아가 그를 처음 만난 순간, 홀로 혈마와 혈교를 무너뜨리고 광인이 되었던 진운룡을 마주했을 때, 혈신대법의 저주를 풀기위해 함께 연구하던 일.

그 모든 순간들이 다 자신이 겪은 것처럼 또렷하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진운룡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아려왔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머릿속에 넘쳐나는 감정들을 주체할 수가 없어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일어났느냐?”

그때, 문 밖에서 진운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색한 노인 같은 말투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 기억 속의 그도 항상 똑같은 말투를 썼다.

기껏해야 약관으로 보이는 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말투에 항상 몰래 웃음 짓고는 했다.

‘아…… 또…….’

소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다시 자신이 마치 제갈여령이 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휴…….”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방문이 열렸다.

“몸은 좀 어떠하냐?”

진운룡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게서 이토록 감정이 실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괘, 괜찮아요.”

빤히 쳐다보는 진운룡의 시선에 소은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우우웅!

그때, 부드러운 기운이 소은설의 온몸을 감쌌다.

소은설은 곧 그것이 진운룡이 펼쳐낸 기운임을 알았다.

기운은 그녀의 몸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왠지 진운룡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에 소은설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기운은 곧바로 사라졌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하구나.”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은설이 조금은 의아한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진운룡이 신경을 쓴다고 느낀 것이다.

소은설의 표정을 읽은 진운룡이 천천히 물었다.

“혹시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 어젯밤이라뇨?”

영문을 알 리 없는 소은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흠……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거라.”

잠시 고민하던 진운룡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운룡은 어젯밤 있었던 일과 그녀가 죽었다 살아남으로 인해 얻게 된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피, 피를 마셨다고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은설이 물었다.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은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앞으로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가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소은설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사람의 피를 마시다니…….’

그렇지 않아도 죽었다 다시 살아난 후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그녀였다.

한데, 이젠 스스로가 정말 인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그녀의 시선이 진운룡을 향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저주를 풀고 싶어 하는지 그녀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는 백 년이 넘도록 이런 고통을 겪었겠지…….’

직접 자신에게 그 상황이 닥치고 보니 진운룡이 처음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왜 그가 이토록 저주를 푸는 것에 집착하는지도 이해됐다.

그런 진운룡 앞에서 자신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그때, 진운룡의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반드시 이 저주를 풀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그의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가 소은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본 순간 소은설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진운룡의 말에 믿음이 갔다.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버렸던 충격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나도 도울게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스스로의 말에 소은설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놀랍게도 머릿속에 혈신대법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제갈여령이 연구했던 지식들과 기억들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고스란히 머리에 들어 있던 것이다.

진운룡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소은설의 태도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말투나 행동이 점점 제갈여령과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대체…….’

그럴수록 진운룡의 마음은 그녀에게 쏠렸다.

진운룡과 소은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시선을 맞췄다.

진운룡의 눈빛을 마주하자 소은설은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 쳤다.

제갈여령의 기억이 없었던 때에도 자신도 모르게 진운룡에게 끌렸던 그녀였다.

제갈여령의 기억까지 겹쳐진 지금은 도무지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혈교주에게서 원하던 것은 얻으셨나요?”

진운룡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그녀가 슬쩍 화제를 바꿨다.

제갈여령의 기억이 떠오르게 되면서 진운룡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바를 알게 된 그녀였다.

“얻지 못했다.”

진운룡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그를 소은설이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이제 어찌하실 건가요?”

“글쎄…….”

아직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 안 되면 황궁으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소은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몇 번 부딪혔던 동창 무사들도 혈신대법을 쓰고 있었지요?”

진운룡의 두 눈에 다시 한 번 이채가 일었다.

혈신대법이라는 단어가 소은설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혈신대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냐?”

소은설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머릿속에 어느 순간 오래전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게다가 오늘 아침부터 더 선명해지고 있어요.”

소은설은 차마 제갈여령에 대한 것은 말하지 못했다.

아직 스스로도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진 공자께서 원하시는 것을 얻으려면 이제 동창을 조사해야겠군요.”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놈들을 상대하려면 황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

황궁 외에는 대부분의 동창 조직이 음지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놈들을 찾을 방법이 있다면 좋겠군요?”

진운룡이 묘한 눈으로 소은설을 쳐다봤다.

어쩐지 이전의 그녀와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전의 소은설은 그다지 똑똑한 아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깊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

한데, 오늘 그녀의 모습은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쩐지…….’

마치 제갈여령을 보는 듯했다.

“혈신대법에는 제물이 필요해요. 동창이 소녀들을 납치한 이유도 그 때문일 거예요.”

진운룡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소은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동창에 혈신대법과 관계된 자들이 있다면, 아마도 또 그런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요.”

그녀의 입에서 막히지 않고 술술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하오문에 부탁해서 갑자기 아이들이 사라지거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실종된 곳이 있는지 조사하면 그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가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내가 언제 이렇게 똑똑해졌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고, 앞으로 해야 할 일과 그 방법들이 떠올랐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그제야 진운룡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진운룡이 한 번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럼 오후에 하오문 분타부터 찾아가 보도록 하자. 일단은 푹 쉬어라.”

진운룡은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소은설의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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