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혈룡전 5권 (112화)
5장 혼돈 (5)/
오후가 되어 진운룡 일행은 하오문 개봉 분타로 향했다.
개봉 분타는 외곽에 위치한 백 평 정도 하는 이 층짜리 도박장 건물이었다.
일, 이 층은 도박장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지하에 따로 제법 넓은 공간이 있어 그곳이 하오문의 지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개봉이라는 큰 도시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개봉에는 개방의 총타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하오문으로서는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학이 나서서 도박장 입구를 지키던 덩치들에게 몇 마디 하자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일행을 지하로 안내했다.
지하 지부로 들어서던 진운룡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허허허, 어서 오시오!”
어떻게 알았는지 하오문주 곽지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오문주정도 되면 문파를 관리하는 것만 해도 정신없이 바쁠 터인데, 진운룡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가 나타나니 조금 과하다 싶은 면이 있었다.
“허, 저 자는 대체 왜 우리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냐?”
적산이 못마땅한 얼굴로 구학에게 물었다.
“그, 글쎄요. 사부님께선 원채 종잡을 수 없는 분이라, 저도 그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난감한 얼굴로 구학이 답했다.
“그렇게 서 있지들 말고 안으로 들어오시구려.”
곽지량이 일행을 지부 안쪽으로 안내했다.
“하하하! 이번에 혈교주와 혈교 무리들을 혼자 때려잡으셨다구요. 이거 정말 진 공자야 말로 강호의 새로운 대 영웅이구려.”
접객실로 안내된 일행이 자리에 앉자 곽지량이 입이 마르도록 진운룡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진운룡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진운룡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곽지량이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적산은 그 모습을 보고 고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구학은 안절부절못하며 양쪽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용건이 있으신 게요?”
곽지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동창의 움직임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싶소.”
“음…… 동창이라…….”
진운룡의 말에 곽지량이 침음성을 흘렸다.
동창은 하오문뿐만 아니라 개방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한 그들의 움직임 자체가 워낙에 은밀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보를 얻는 것 자체도 힘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구려. 솔직히 하오문의 능력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외다.”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운룡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던 곽지량이 이리 말할 정도면 정말로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이야기다.
“하면, 최근 어린 소녀들이나 사람들이 대량으로 실종되고 있는 지역을 알아봐 주시오.”
“그것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소. 내 각 지부에 연통을 넣도록 하리다. 대신…….”
곽지량이 눈을 빛내며 진운룡을 바라봤다.
어차피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도와주리라 생각지는 않았기에 진운룡은 담담한 얼굴로 곽지량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에도 말했듯이 진 공자께서 훗날 이 곽 모의 부탁을 한 번 들어주셨으면 하오. 물론 도리에 어긋나거나 무리한 부탁을 드리지는 않을 것이오.”
진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는 것이 당연했다.
목숨이 걸려 있거나 하오문의 이익을 위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의뢰하지 않는 한, 진운룡은 곽지량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진운룡의 대답에 곽지량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습니다! 그럼 부탁하신 일은 결과가 나오는 대로 장원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소이다.”
진운룡 일행은 곽지량의 배웅을 받으며 장원으로 돌아왔다.
* * *
무당산 홍무생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오결 거지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태, 태상방주님!”
숙소 방문이 열리며 홍무생이 머리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오결 거지 방삼의 호들갑에 홍무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 방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홍무생이 두 눈을 부릅떴다.
“뭐라! 구 방주가 살아 돌아왔단 말이더냐?”
무려 한 달 가까이 소식이 없던 구천엽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에 홍무생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왔다.
그간 구천엽이 혈교 잔당들과의 싸움에서 죽었다고 여겨 개방의 분위기는 극도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홍무생에게도 구천엽은 아끼는 제자였다.
그의 실종 소식에 마음이 답답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에 있다 하더냐.”
“낙양에 처음 나타나셨고, 지금은 개봉으로 향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개봉으로 지금 당장 가자.”
홍무생은 여장도 챙기지 않은 채 그대로 무당산을 나서 개봉으로 향했다.
* * *
자금성 중화전(中和殿).
용상에 앉은 황제 앞에 도중문이 고개를 숙인 채 시립해 있었다.
황제를 독대하는 대부분의 신하가 오체투지하는 것과 달리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불경한 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당과를 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무언가 조급한 얼굴로 도중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사, 어찌 되었소? 아직 먼 것이오?”
그런 황제와 달리 도중문의 얼굴은 덤덤했다.
“폐하. 조금만 기다리옵소서. 신단의 완성이 눈앞에 다가와 있사옵니다. 다만…….”
도중문이 말꼬리를 흐리자 황제가 안절부절못하며 보챘다.
“다만 무엇이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도중문이 잠시 뜸을 들이다 못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제물이 더 필요하온데…….”
“그럼 제물을 더 마련하면 될 것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황제의 두 눈동자에는 흐릿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제물을 위해 많은 소녀들을 잡아들인 상태이옵니다. 여기서 더 소녀들을 잡아들인다면 백성들의 원성이 거세질 것이옵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흥!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는 법이 아니오. 짐이 곧 이 나라 명(明)이거늘, 짐과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백성된 자로서 가장 큰 영광일진데 감히 어떤 불온한 자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원성을 토해낸단 말이오. 황사께서는 그런 걱정 말고 필요한대로 소녀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시오. 만일 황명을 거역하는 자들이 있다면 역도로 다스릴 것이오.”
붉어진 눈으로 소리치는 황제를 향해 도중문이 고개를 조아렸다.
“신 황명을 받들어 최선을 다해 신단을 완성하겠나이다!”
“고맙소. 내 황사만 믿겠소이다.”
황제가 용좌에서 내려와 도중문의 두 손을 맞잡았다.
고개를 숙인 도중문의 두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 * *
홍무생이 무당산을 떠나 개봉 총타에 도착하는 데는 겨우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최대한 경공을 발휘하여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강호에서 손꼽는 경공의 달인이라 하지만, 보름 내내 경공을 사용하여 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개봉에 도착했을 때는 진기가 마르고 체력이 대부분 소진된 상태였다.
“천엽이가 여기 있느냐!”
총타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돌릴 틈도 없이 홍무생이 소리쳤다.
“태상방주님!”
관제묘 밖을 지키던 개방 제자들이 얼른 일어나 홍무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란을 듣고 관제묘 안에 있던 거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개방 방주 구천엽의 얼굴도 보였다.
“구 방주! 살아 있었구나!”
홍무생이 달려가 구천엽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그에 비해 구천엽의 반응은 조금 미적지근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죽었다 살아온 사람치고는 너무도 덤덤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방주께서 혈교 무리와 싸우시다 머리에 부상을 당하셔서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 하신 모양입니다.”
구천엽 옆에 있던 낙양 분타주 양광이 홍무생에게 설명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머리를 다치다니!”
홍무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구천엽을 바라봤다.
“이제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기억만 조금 흐릿할 뿐입니다.”
구천엽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어디, 손목을 좀 내밀어 보거라, 내가 좀 살펴봐야겠다.”
“하하하, 다른 제자들도 있는데 너무 호들갑 떠실 필요 없습니다. 일단은 안으로 드시지요.”
구천엽이 슬쩍 홍무생의 손길을 피하며 그를 관제묘 안쪽으로 안내했다.
구천엽과 홍무생은 관제묘 안에 마주 앉았다.
낙양 분타주 양광을 비롯한 개방의 몇몇 간부들도 함께 자리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그간 어디에 있었던 게야?”
홍무생이 조바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혈교 무리에게 쫓기다 크게 부상을 입어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 몸은 좀 괜찮으냐?”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홍무생이 물었다.
“하하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이제는 모두 회복된 상태입니다.”
“쯧쯧, 웃을 일이 아니야. 내상은 쉽게 낫지 않는 법이야. 게다가 혈교 놈들의 사이한 무공은 겉으로는 괜찮아도 결코 안심할 수 없어. 혹시 모르니 내가 직접 살펴봐야겠다. 손목을 내밀어 보거라.”
“하하, 굳이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몇 번을 확인했습니다.”
“어허! 어서 내밀어 보래도!”
홍무생이 계속 재촉하자 구천엽이 마지못해 오른 손목을 내밀었다.
손목을 잡은 홍무생이 눈을 지그시 감고 구천엽의 몸 내부를 살폈다.
자신의 기운을 천천히 흘려 넣어 기혈과 진기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구천엽의 말대로 혈맥과 장기에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는 않았다.
“응? 이게 무엇이지?”
잠시 동안 구천엽의 내부를 살피던 홍무생이 무언가 이상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구천엽의 손이 미끄러지듯 홍무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동시에 구천엽이 홍무생의 목젖을 향해 수도를 날렸다.
“뭐, 뭐하는 짓이냐!”
전혀 예상치도 못한 구천엽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홍무생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십이천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실력을 가진 그였다.
구천엽의 갑작스런 공격에도 부룩하고 그의 대응은 무척 빨랐다.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피한 그가 왼손을 들어 구천엽의 수도를 쳐냈다.
“이놈!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리고 그 사이한 기운은 무엇이더냐!”
홍무생은 구천엽의 몸속을 살피던 중 내부에서 꿈틀대던 마기 덩어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상대했던 혈교의 무리들이 내뿜던 기운과 몹시 흡사했다.
“후후,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십이천이라는 이름값이 허명은 아니구나! 내가 본래 힘의 반만 회복했어도 네놈 정도는 일 초식도 안 될 텐데!”
구천엽이 비소를 흘리며 홍무생의 명치와 사타구니를 공격했다.
“너, 너는 천엽이 아니구나! 정체가 무엇이냐!”
홍무생이 경악한 눈으로 소리쳤다.
상대가 자신의 제자가 아님을 눈치챈 것이다.
퍽! 퍼퍽!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손이 저릿할 정도로 상대의 실력이 뛰어났다. 십이천인 홍무생과 대등한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본래의 구천엽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뭣들 하느냐! 당장 이 사악한 악적을 제압하거라!”
홍무생이 주변의 개방도들에게 명했다.
그러자 양광을 비롯한 장로와 수뇌부들이 달려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퍼퍼퍽!
“커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홍무생이 피를 토해냈다.
놀랍게도 양광과 수뇌부들이 구천엽이 아닌 홍무생에게 손을 쓴 것이다.
구천엽의 공격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차에 당한 갑작스런 공격에 홍무생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치명적인 일격들을 허용하고 말았다.
“네, 네놈들이…… 어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홍무생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공격한 개방도들을 바라보았다.
“후후, 피의 주인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주셨다! 이제 곧 네놈도 주인의 은혜를 받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크으으…… 이, 이럴 수가. 개, 개방이…….”
홍무생의 흐릿해지는 시야에 붉은 안광을 빛내며 다가오는 구천엽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