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혈룡전 5권 (116화)
6장 실종 (4)/
콰콰쾅!
멀지 않은 곳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침입자가 코앞까지 다다른 것이다.
구천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떤 놈인지 확인해 봐야겠군!’
구천엽이 홍무생과 함께 석실 밖으로 나가자, 다섯 명의 장로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앞장서거라!”
명이 떨어지자 장로들이 소란이 일고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고, 홍무생과 구천엽이 그 뒤를 쫓았다.
그런데 난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막 다가서던 구천엽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저, 저놈은!”
구천엽이 무언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눈을 부릅떴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구천엽은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그곳에는 백오십 년 전 자신을 죽인 자, 바로 진운룡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구천엽은 말도 잇지 못한 채 석상이 되어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가 흡수한 구천엽의 기억에 의하면 이미 그 때로부터 백오십 년 가까이 흐른 시대였다.
한데도 진운룡의 모습은 그때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조차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자신을 죽일 정도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라면 아직까지 살아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구천엽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자세히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러나 얼굴은 물론, 풍기는 기운까지 분명 자신의 목을 베었던 그놈이 분명했다.
‘설마…….’
구천엽의 머릿속에 지금 상황이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당시에 자신이 펼쳤던 궁극의 혈신대법이라면 인간을 불로불사의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설마 놈이 그때 그 대법을 나 대신 받은 것인가!’
구천엽의 두 눈에서 혈광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가까스로 펼친 대법의 열매를 엄한 놈이 훔쳐간 것이 분명했다.
순간, 기운을 느낀 진운룡의 시선이 구천엽을 향했다.
진운룡과 눈이 마주친 구천엽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현재 내 실력으로는 저놈에게 당할 수가 없어!’
아직 대법을 몇 차례 더 받아야 예전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다.
예전의 실력을 모두 되찾는다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진운룡이었다.
지금 부딪힌다면 구천엽은 몇 초도 못 버티고 죽고 말 것이다.
퍼퍼퍼펑!
그때, 진운룡이 앞을 막아서던 개방도들을 날려버리고 구천엽을 향해 쏘아져 왔다.
이를 악문 구천엽은 도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진운룡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일단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 좀 더 힘을 키운 뒤 백오십 년 전의 복수를 몇 배로 갚아 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놈을 막아라!”
다급히 홍무생과 장로들에게 명을 내린 구천엽이 석실 안쪽으로 도주했다.
그곳에는 밖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장로들과 홍무생이라면 자신이 도주할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진운룡이 그들을 뚫고 온다 해도 비밀 통로의 입구를 열어야 했다.
통로 입구를 막고 있는 문은 보통 재질이 아닌 만년한철이었다.
진운룡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삼 척이 넘는 두께의 만년한철을 순식간에 부술 수는 없을 것이다.
* * *
진운룡은 앞을 막아선 홍무생과 장로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굴과 피부에는 실핏줄이 불거져 있고, 두 눈에서는 혈광이 일었다.
게다가 마치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이미 이지를 잃은 상태로 보였다.
이것은 혈교주에게서 읽어낸 기억 중 이미 죽은 자들을 자신의 피를 먹여 되살린 경우와 비슷했다.
어느 정도 이지는 있으나,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꼭두각시. 어찌 보면 생강시와 비슷한 상태였다.
다만, 시전자가 따로 조종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혈신대법을 받은 자들처럼 인간의 피를 마셔야 한다.
진운룡의 머릿속에 의문이 일었다.
‘달아난 구천엽이 이들을 이리 만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구천엽이 혈교 잔당들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아니지, 동창도 혈신대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들과 연관이 있거나 혹은, 제 삼의 세력일 수도 있지…….’
꼭 소림을 점령했던 혈교 잔당들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의문점은 구천엽의 실력으로 홍무생과 장로들을 어떻게 제압했느냐는 것이었다.
일전에 보았던 구천엽은 무공의 경지가 그 정도로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으로는 장로들은 몰라도 홍무생을 쓰러뜨리는 것은 혹여 암습을 한다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간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패가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진작 개방도들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았으며, 제물을 모아 혈신대법을 펼치지 않았단 말인가.
또 다른 의문점은 소림에서 만났던 혈교의 잔당들이 펼쳤던 혈신대법과 이곳에 있는 혈신대법의 기운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혈신대법의 기운은 오히려 백오십 년 전 혈마가 펼친 그것과 흡사했다.
그렇기에 진운룡이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이곳으로 쳐들어오지 않았던가.
‘어차피 놈을 잡으면 해결될 일!’
진운룡은 의문을 접고 자신의 앞을 막아선 홍무생과 개방 장로들을 향해 걸어갔다.
“크으으으…….”
순간, 홍무생과 장로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며 진운룡을 둘러쌌다.
진운룡은 곧장 검을 빼들었다.
구천엽을 잡기 위해서는 한가로이 이자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홍무생이 가장 먼저 장력을 날렸다.
손바닥 모양의 붉은 강기가 진운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 팔밖에 남지 않은 홍무생이었으나, 그가 날린 강기의 위력은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진 듯 보였다.
쩌어엉!
진운룡의 검격과 장강이 부딪히며 공기가 찢어져 나갔다.
홍무생의 강기를 직접 접한 진운룡의 두 눈에도 이채가 일었다.
진운룡의 검격이 강기를 소멸시키기는 했으나, 그 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했던 것이다.
본래라면 자신의 검격이 강기를 소멸시키고 홍무생을 반으로 갈랐어야 했다.
‘이상하군…….’
홍무생은 물론, 장로들도 기운이 전에 비해 훨씬 강했다.
아무래도 구천엽이 이들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흥!”
진운룡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떤 수작을 부렸던 힘으로 부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는 즉시 진기를 끌어올렸다.
구오오오!
어마어마한 진기의 파도가 사방을 덮쳤다.
달려들던 홍무생과 장로들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몸을 웅크려 진기의 파도를 막았다.
바로 그때, 진운룡의 검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공간을 가로로 갈랐다.
두우웅!
순간, 마치 거대한 북소리와도 같은 울림이 지하 공간을 휩쓸었다.
번쩍!
동시에 눈부신 섬광이 장로들과 홍무생을 덮쳤다.
콰아앙!
홍무생과 장로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들은 지하 석실 벽을 뚫고 화석처럼 박혀버렸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으로 보였다.
조금은 씁쓸한 눈빛으로 홍무생을 슬쩍 쳐다본 진운룡이 구천엽이 사라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죽은 듯 벽에 파묻혀 있던 장로들과 홍무생의 육신이 갑자기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
진운룡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폭혈공!’
폭혈공은 몸 안의 피를 재료로 짧은 시간동안 잠력을 격발시키고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목숨을 잃으면 피가 끓어올라 육신이 폭발하는 수법으로, 죽은 혈교주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악독한 술법들 중 하나였다.
문제는 이 폭발이 어지간한 화탄에 맞먹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장로들과 홍무생의 육신이 폭발하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진운룡과 이들의 싸움 때문에 약해진 이곳 지하가 무너져 버릴 가능성이 컸다.
진운룡이 급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홍무생과 장로들의 육신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운룡을 중심으로 황금빛 기의 막이 생성되더니 지하 공동을 겹겹이 감쌌다.
그러자 폭혈공의 충격파가 그 안에 갇혀 핏방울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잠시 후, 폭발로 인해 일어난 검붉은 폭연(爆煙)이 황금빛 기막 안에서 우르릉 거리다 소멸했다.
기막이 걷히고 드러난 진운룡의 모습은 그동안과는 달리 제법 헝클어진 상태였다.
옷 여기저기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더러는 찢어진 곳도 보였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 데다 지하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폭발의 여파를 그가 다 감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용의주도한 놈이군.”
진운룡이 씁쓸한 표정으로 구천엽이 도망친 석실을 바라봤다.
그의 감각으로는 분명 막힌 곳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구천엽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곳에 밖으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제법 멀리 달아났을 터였다.
석실에 들어선 진운룡은 서둘러 밖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았다.
겉으로 보이는 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 비밀 통로가 있는 것 같았다.
진운룡은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석실 동편 벽 한복판 뒤의 공간이 비어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역시!”
진운룡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비밀 공간이 있는 벽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번쩍!
섬광과 함께 석벽이 쩍 하며 갈라졌다.
그러자 곧 드러난 광경에 진운룡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석벽이 부서지고 드러난 곳에는 시커먼 금속으로 된 문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허!”
문에는 방금 전 진운룡이 날린 검격의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진운룡의 검격이 문을 잘라내지 못한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 문의 재질이 보통 금속이 아닌 듯했다.
게다가 한 치는 될 듯한 깊이로 검흔이 새겨졌음에도 뚫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두께 또한 상당해 보였다.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문의 재질이 혹시 만년한철이라 해도 못자를 것은 없었으나, 그 두께에 따라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진운룡은 감을 끌어올려 달아난 구천엽의 기척을 찾았다.
“음…….”
구천엽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미 삼백 장이 넘는 거리를 이동해 있었다. 놀라운 속도였다.
삼백 장이면 진운룡이 감지할 수 있는 한계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이 문을 자르든, 부수든 그때쯤이면 구천엽은 이미 진운룡의 감지 범위를 벗어나 버릴 것이다.
“하…… 결국 놓쳤군.”
진운룡이 허탈한 표정으로 철문을 쳐다봤다.
거의 잡았던 것을 눈앞에서 놓치고 나니 그 허무함이 더했다.
도망친 구천엽이 마음먹고 숨어버린다면 다시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첫째는 구천엽이 흔적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놈이 아무리 꽁꽁 숨는다 해도 결국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언젠가는 그 흔적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동창을 파고들어야 하나…….’
관과 엮이는 것이 조금 껄끄럽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들과 부딪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저주를 풀 수 있다면 그 정도의 귀찮음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마음을 정리한 진운룡은 미련 없이 석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