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혈룡전 5권 (117화)
7장 습격 (1)/
개봉 동쪽 외곽에 위치한 작은 객잔.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자가 장원을 빠져나갔다고 하오.”
허리에 여러 개의 매듭을 묶은 거지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한데, 그의 얼굴이 어쩐지 익숙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개방의 장로 왕규였다.
무당산에서 남궁진천의 의견에 목에 핏대를 올리며 찬동했던 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탁자 맞은편에 앉은 장년인도 낯이 익었다.
그는 역시 진운룡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내비쳤던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기중이었다.
두 사람과 함께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셋이었는데, 그 세 명 역시 왕규와 모용기중 못지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의 인물들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맹주 남궁진천을 호위하는 천영십이수(天影十二手)였다.
대주 신립과 일 호 유선, 이 호 석운이 그들이었다.
천영십이수는 맹주를 호위하는 만큼 한명 한명이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맹주를 지켜야하는 임무를 저버리고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진운룡 때문이었다.
사실, 진운룡에게 신웅을 보낸 것은 미끼에 불과했다.
남궁진천은 어차피 진운룡이 자신의 통첩을 거절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신웅은 단지 명분을 세우기 위한 제물이었고, 신웅을 보내면서 은밀하게 왕규와 모용기중을 비롯한 의천대를 개봉으로 보낸 것이다.
남궁진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진운룡을 무력으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린 것이 그 일행들이다.
소은설과 적산.
소은설의 경우 정보에 의하면 진운룡이 강호에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고 있었다.
남궁진천이 보기에 소은설이 진운룡의 여자라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적산은 제자에 가까운 수하였다.
제자와 정인을 인질로 삼아 위협한다면 진운룡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해서 남궁진천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왕규, 모용기중에게 은밀히 소은설과 적산을 잡아오라 명을 내린 것이다.
자신을 호위하는 천영십이수 열두 명을 함께 보내면서까지 말이다.
왕규의 말을 들은 모용기중의 두 눈이 빛났다.
“진운룡 그놈이 없는 것이 확실하오?”
“그렇습니다. 진운룡 그놈이 방금 장원을 빠져나가 그곳에는 이제 하오문 계집과 그 미치광이 사내 녀석만 남았소.”
“놈이 눈치를 채진 않았겠지요?”
천영십이수의 대주 신립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일부러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를 고용해 장원을 감시했습니다.”
“좋소, 기회군.”
모용기중이 손바닥을 치며 자리에 모인 이들을 둘러봤다.
모용기중 자신은 화경을 넘어선 고수였고, 왕규와 여기 모인 세 사람은 초절정에 이른 고수다.
나머지 천영십이수도 모두 절정을 웃도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전력이면 계집 하나와 천방지축 미치광이 녀석 하나를 상대하는 데 차고 넘친다.
문제는 얼마나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모용기중이 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정도인으로서 그리 떳떳한 짓은 아니오. 하나, 마귀를 잡으려면 우리도 마귀가 되어야 하오. 그러니 다들 독하게 마음먹으시오.”
“물론입니다!”
왕규가 당연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천영십이수 세 사람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놈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움직입시다!”
“먼저 출발하십시오. 저희는 나머지 천영들을 이끌고 바로 뒤따르겠습니다.”
모용기중과 왕규가 먼저 객잔을 나섰고, 잠시 후 열두 명의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그 뒤를 따랐다.
* * *
달도 모습을 감춘 짙은 어둠 속에서 열네 명의 흑의인이 장원의 담을 조심스럽게 넘었다.
객잔을 빠져나온 모용기중, 왕규와 천영십이수가 바로 그들의 정체였다.
―우선 흩어져서 계집과 사내 녀석이 있는 방을 찾읍시다. 찾는 즉시 구적(口笛)으로 신호를 보내시오.
모용기중의 전음을 받은 일행이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바로 그때였다.
“어떤 쥐새끼들이냐!”
맞은 편 건물 방문이 열리며 산발한 사내 하나가 한 자루 도를 쥔 채 모습을 드러냈다.
적산이 침입자의 기척을 느끼고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모용기중과 일행의 움직임이 멈췄다.
“흥! 제 놈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찾는 수고를 덜었구나!”
모용기중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속으로는 경계심이 더 깊어졌다.
최대한 은밀히 움직였음에도 자신들의 침입을 상대가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
그것은 곳 적산의 경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높다는 것을 뜻했다.
“흥! 악적의 개로구나! 목숨이 아까우면 당장 무릎을 꿇고 얌전히 투항하거라!”
왕규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어느새 진운룡은 천하의 악적이 되어 있었다.
적산이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뒤틀었다.
“하! 이제 보니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주군께 박살났던 개방의 거지새끼로구나! 핏덩이 놈들과 한패가 되어 어울렸던 거지 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악적이라 하는 것이냐? 게다가 주군께서 없는 틈을 타 도적놈처럼 몰래 침입하기까지 하다니, 겁 많은 벌레 새끼들답구나!”
왕규의 얼굴이 벌개졌다.
“이, 이런 죽일 놈! 뭘 기다리시오, 저 잡놈을 당장에 쳐 죽이지 않고!”
모용기중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적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처럼 화경의 경지에 들어섰는지도 몰랐다.
‘설마, 저 나이에 벌써 화경이라니…….’
그것은 천하의 기재라던 남궁린조차도 이루지 못한 경지였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질 리는 없다.’
만일 적산의 경지가 화경을 넘어섰다 해도 이쪽은 화경 고수인 자신 외에도 초절정 넷, 그리고 절정 고수 아홉이 버티고 있다.
전력상 지려야 질수가 없는 싸움이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 약간의 문제였다. 그 사이 만일 진운룡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임무는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놈을 제압한다!’
결정을 내린 모용기중이 일행에게 명을 내렸다.
“만만치 않은 놈이오. 시간을 끌 수 없으니 전력을 다해 놈을 제압합시다.”
왕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렸다.
“이런!”
모용기중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이 적산과 맞붙고 나머지 일행이 협공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데, 성질을 참지 못한 왕규가 먼저 튀어나가 버린 것이다.
왕규의 실력으로는 적산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분노에 차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의 막무가내 공격은 다른 사람들과 연계해서 이루어지기 쉽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놈을 포위합시다!”
모용기중의 명에 천영십이수가 흩어지며 적산을 둥글게 포위했다.
그 뒤에서 모용기중이 언제라도 출수할 자세로 적산을 주시했다.
틈이 보이는 순간 적산에게 치명타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인질로 생포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최악의 경우 계집만 생포하고 사내놈은 죽이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왕규는 적산의 눈앞까지 다가갔다.
열네 명의 고수들이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달려들고 있음에도 적산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이놈! 그 역겨운 낯짝부터 뭉개주마!”
왕규가 적산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권기가 어린 주먹이 코앞에 도달한 순간, 적산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엇!”
놀란 왕규가 헛바람을 삼키고는 급히 적산의 위치를 찾았다.
“거지새끼가 아니라 굼벵이 새끼였구나!”
그때, 왕규의 귓가에 적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규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어느새 왕규의 등 뒤를 점한 적산의 도가 목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쇄애애액!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천영십이수 셋이 급히 적산을 향해 검을 날렸다.
적산이 계속해서 왕규의 목을 친다면 그대로 세 자루의 검에 꿰여 꼬치가 되고 말 것이다.
순간, 쑥 하고 적산의 신형이 밑으로 꺼졌다.
세 자루의 검이 적산의 잔상을 꿰뚫는 순간 왕규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어느새 몸을 낮춘 적산의 도가 왕규의 두 발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모용기중이 눈을 부릅떴다.
적산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왕규가 적산의 상대가 못된다고 예상하긴 했으나, 이렇게 쉽게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왕규가 상대를 얕보고 너무 생각 없이 움직인 탓도 있었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일전으로 인해 상대의 경지가 화경을 넘어섰음이 확실해졌다.
이제는 자신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번 격돌로 왕규가 빠르게 이탈한 것이 오히려 모용기중과 천영십이수에게는 전력을 더 배가 시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천영십이수는 합공을 전문적으로 익힌 자들이다.
맹주를 호위하기 위해서는 그 격에 맞는 자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화경 이상의 고수를 적으로 상정한 합격술을 구사한다.
모용기중 자신이라 해도 이들의 합공을 당해낼 수 없었다.
생각대로 왕규가 쓰러지자 바로 천영십이수가 움직였다.
그들은 열두 명 모두 검을 쓰고 있었다.
우선 네 명의 검수가 사방에서 적산을 찔렀다.
두 명은 복부, 나머지 둘은 다리를 노린 공격이었다.
적산이 허공으로 몸을 띄워 그들의 검격을 피했다.
그러자, 또 다른 네 명의 검수가 앞 검수들의 어깨를 차고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검을 쏘아냈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적산이 허공에 몸을 띄운 것과 그 시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네 자루의 검이 위아래로 적산의 몸을 노렸다.
적산이 날개가 있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도 적산의 얼굴에는 오히려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화경에 오른 후로 실전에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처럼 최고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것도 상대는 그의 방심을 허용치 않는 고수들.
그야말로 적산의 가슴을 짜릿하게 만드는 승부였다.
적산의 집중력이 극에 달했다.
상대방의 검로가 눈에 잡혔다.
허공에 솟구친 네 명의 검수가 각각 심장과 복부를 노리고 있다. 동시에 아래 네 검수가 공중에 떠 있는 적산의 하체를 노리고 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그때, 적산의 다리가 움직였다.
앞쪽에서 적산의 복부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던 검면을 툭, 찼다.
상대의 검이 묵직한 압력에 뚝 떨어져 내렸고, 동시에 그 반동을 이용해 적산의 신형이 다시 한 번 허공으로 솟구쳤다.
쉬익! 쉭!
그 밑을 간발의 차로 네 자루의 검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 순간, 허공으로 솟구친 적산이 몸을 거꾸로 뒤집듯 회전했다.
머리가 밑으로 돌고 다리는 위로 올라갔다.
그 회전을 담아 적산의 도가 긴 반원을 그리며 밑으로 내리꽂혔다.
채재쟁!
적산의 강력한 도격에 아직 회수되지 않고 남아 있던 네 자루의 검이 튕겨나갔다.
팔이 뒤로 젖혀지며 네 검수의 머리가 무방비로 드러났다.
그들을 노리며 적산의 도가 풍차처럼 회전했다.
하나, 네 사람의 신형이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땅으로 푹 꺼졌다.
뒤쪽에 있던 또 다른 네 명의 천영십이수가 네 사람을 뒤로 당긴 것이다.
동시에 적산의 도가 허공을 휩쓸었다.
촤아아악!
그 틈을 노리고 뒤쪽에 있던 천영십이수 넷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들의 검은 이제 아래를 향해 낙하하고 있는 적산의 머리와 목을 노리고 있었다.
마치 톱니가 돌아가듯 정교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적산의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막 시계 방향으로 돌았던 적산의 도가 반대 방향으로 다시 한 번 회전했다.
쩌저저정!
눈부신 속도로 회전한 도가 네 자루의 검을 쳐냈다.
가장 뒤에 있던 자들이 가장 고수였는지 검에 담긴 경력이 상당했다.
허공에서 네 자루의 검을 쳐낸 적산의 도가 주춤했다.
어느새 적산의 신형은 아래에서 검을 들이밀며 기다리던 처음 네 명의 검수에게 달려드는 꼴이 되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적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대로라면 이번 검격을 어찌어찌 막아낸다 해도 이어지는 함격에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게 될 것이고, 결국 체력이나 진기가 고갈되어 무릎 꿇게 될 것이다.
“흥!”
코웃음을 친 적산의 신형이 네 자루의 검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밑으로 내리꽂혔다.
쩌어엉! 파앗!
쇳소리와 함께 핏물이 튀어 올랐다.
어느새 머리 위를 도면으로 막아 최대한 검격의 과녁이 될 부분을 줄인 적산이 그대로 네 자루의 검과 충돌한 것이다.
두 자루의 검은 도에 의해 튕겨 나갔고, 나머지 두 자루는 적산의 등을 긁고 지나갔다.
제법 깊은 상처였지만, 최대한 몸을 다른 두 명의 검수에게 붙인 덕에 치명상을 면할 수 있었다.
화끈한 통증이 몸을 움츠리도록 강요했지만, 적산은 이를 악문 채 이겨냈다.
그렇게 떨어져 내린 적산이 도를 이용해 땅을 짚었다.
팔을 굽히며 충격을 흡수한 적산이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거꾸로 솟구치며 두 다리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퍼퍼퍽!
적산의 도와 충돌하며 검을 내려뜨린 두 검수의 가슴이 그대로 다리에 걸렸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두 검수가 뒤로 튕겨나갔다.
반대편에 있던 검수들과 허공으로 솟아올랐던 검수들의 검이 적산을 노리고 쏟아져 내렸다.
손으로 땅을 치며 한 바퀴 회전한 적산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튕겨나간 두 검수를 쫓았다.
그가 빠져나간 공간을 여섯 자루의 검이 관통했다.
때댕!
검수들의 검이 바닥을 때린 순간, 적산이 땅을 박차고 몸을 급격히 본래의 자리로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