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121화 (121/150)

# 121

/혈룡전 5권 (121화)

8장 진운룡의 분노 (3)/

망우가 누구인가, 소림은 물론 강호 전체에서 살아 있는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절대고수가 아니던가.

아니, 그걸 떠나서라도 이미 세수(歲數)가 백 살을 훌쩍 넘긴 그가 진운룡을 마치 윗사람 대하듯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본인의 소개를 하자면, 소승은 소림의 망우라 합니다. 혜원 대사께서 제 스승이 되시지요.”

진운룡은 차가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망우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군웅들을 옭아맸다.

“진 대협에 대해서는 스승께 들어서 잘 알고 있소이다.”

이어진 망우의 말에 진운룡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진운룡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진운룡이 혈마를 죽였을 당시 소림의 미래라고 불리던 젊은 승려.

마흔이 넘지 않은 나이에 최연소 나한당주가 되어 강호를 놀라게 했던 천하의 기재.

그가 바로 망우의 스승인 혜원이었다.

강호나 다른 무인들에 대해 무관심한 진운룡이 혜원에 대해 이 정도로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다른 무인들과 달리 진운룡을 동경하여 귀찮게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혜원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스승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당시의 일을 항상 개탄하고 후회하셨습니다.”

망우의 두 눈에 회한이 일었다.

정파의 대표 문파들과 세가들이 작당을 하고 진운룡을 혈귀곡에 몰아넣은 후 무림에서 진운룡과 제갈여령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진운룡을 무척 존경하고 따랐던 혜원은 그때의 일을 결코 묻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에게만은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혜원은 당시 정파가 저질렀던 파렴치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해 죄스러워 했었다.

군웅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진운룡이 스승이던 혜원 대사와 관계가 있는 듯 이야기하는 망우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망우의 말을 들은 진운룡의 미간에 내 천 자가 새겨졌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망우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대협께서 혈마를 죽여 무림에 큰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저희는 그 은혜를 원수로 갚았지요.”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혀, 혈마라니…….”,

“설마 백삼십 년 전 그 혈마를 말하는 것인가?”

반면 진운룡의 표정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혈귀곡에서 나오셨다는 소문과 진운룡이라는 이름을 듣고 진즉에 찾아뵈려고 했었습니다. 스승께는 은인과 같은 분이시니까요.”

노승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이어졌다.

“이렇게 늦게 찾아뵘을 먼저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조금 더 서둘렀다면, 이런 상황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을…….”

잠시 착잡한 눈으로 남궁진천 등을 돌아본 망우가 엄중한 얼굴로 일갈했다.

“너희는 이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이분이 바로 백삼십 년 전 강호를 피로 물들이고 암흑 속에 빠뜨렸던 대마두 혈마를 죽이고 무림을 구하신 큰 은인이시다! 천 번 만 번을 더 감사하고 갚으려 해도 우리가 받은 생명의 빚을 다 갚을 수가 없거늘 어찌 은인께서 이토록 분노하시도록 만들었단 말이냐! 당장 진 대협께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거라!”

현 무림을 지배하는 각파의 고수들을 마치 아이를 꾸짖듯 나무라고 있음에도 망우도사의 모습에는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진운룡을 제외하면 모두 그에게 손자뻘 되는 아이들이었다.

망우의 호통을 들은 모두의 표정에 당혹감이 일었다.

그들이 알기로 혈마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종적을 감췄다.

한데, 망우는 그 혈마를 진운룡이 죽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려 백삼십 년 전의 일이다.

대체 진운룡의 나이가 몇 살이라는 말인가.

나이를 제쳐두고라도 만일 진운룡이 망우대사의 말대로 혈마를 죽이고 강호를 구했다면, 왜 지금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왜 과거 그들의 선조들은 그 사실을 숨겼단 말인가.

어느 하나 의문스럽지 않은 일이 없었다.

게다가 진운룡을 막을 것이라 기대했던 망우가 마치 웃어른을 모시듯 진운룡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운룡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더욱 오리무중이 되었다.

그렇게 모든 이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그때였다.

“너는 지금 나를 막아서겠다는 것이냐?”

장내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멈칫한 망우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들이 잘못을 깨닫고 진 대협께 사죄토록 하려고…….”

“그들은 이미 선을 넘었다. 내 사람을 납치하고 인질로 삼아 나를 겁박하려 했지. 너희가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정도와 협의에 의하면 열 번 죽어도 모자란 죄이지.”

진운룡이 망우의 말을 끊고 단호히 말했다.

망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무림맹주가 그런 더럽고 비열한 일을 벌이다니,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그 누가 무림맹을 따르고 그 권위를 인정하려 하겠는가.

“남궁진천! 네놈이 정파의 이름을 땅에 처박고 그 교만한 머리로 모든 정파의 무인들을 욕되게 하는구나!”

망우가 노해서 소리쳤다.

불이라도 뿜어낼 것 같은 매서운 눈빛으로 망우가 남궁진천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직시했다.

진운룡이 이토록 분노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한동안 남궁진천을 노려보던 망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 대협, 저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 진 대협이 지금 저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또 다른 원한을 나을 뿐입니다. 그리되면 결국 이번 사건과 같은 일들이 계속 끊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니, 저들의 비루한 피로 진 대협의 손을 더럽히지 말고 저에게 저자들의 처분을 맡겨 주십시오.”

진운룡이 죽이려는 이들은 현 무림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이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곧 그들이 대표하고 있는 문파와 세가를 적으로 삼는 일이다.

강호를 좌지우지 하는 그들이었다.

진운룡이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 해도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복수하려 할 것이다.

은밀하고 교활한 술수를 동원해 그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진운룡에게는 그다지 두려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와 관계된 모든 문파와 세가를 쓸어버리고, 그 뿌리까지 뽑을 것이다. 감히 그런 생각조차 못하도록 그들이 머문 땅에 풀 한 포기조차도 남기지 않으리라.”

진운룡의 말에 망우는 한기를 느꼈다.

진운룡의 경지에 이른 이가 쓸데없는 허언을 할 리가 없었다. 또한, 충분히 그 말을 실행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강호는 전대미문의 혈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진 대협, 그리되면 무고한 이들까지 휩쓸리게 됩니다.”

망우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사지로 밀어 넣은 제갈여령 역시 무고한 이였다.”

망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승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

당시 제갈세가의 여식이 진운룡을 유인하기 위해 함께 혈귀곡으로 들어갔다고…….

소녀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진운룡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야말로 부끄럽고 천인공노할 죄업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진 대협, 정녕 또 다른 여령 소저를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까?”

진운룡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망우를 바라봤다.

‘나는 당신이 살인마가 되길 원하지 않아요…….’

죽어가며 남긴 제갈여령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진운룡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의 뜻대로 적대 문파와 그 주변을 모조리 쓸어버린다면 결국 제갈여령이 그토록 원치 않았던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는 또 다른 자들이 매울 것이고, 겉으로야 진운룡을 두려워하고 거스르지 않겠지만, 자신들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은밀히 칼을 갈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들은 항상 자신의 머리 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망우는 진운룡이 생각을 마치기를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무림에서의 명성과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지금 그가 진운룡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스승에게 들은 진운룡은 백삼십 년 전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였다.

무림 역사상 최초로 형성된 정사마 연합군을 처참하게 무너뜨린 혈교를 단신으로 멸한 것이 바로 진운룡이다.

그로부터 백삼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의 능력이 어떠할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떠나서라도 망우는 이미 속세의 욕심을 버리고 부처의 가르침 끝자락을 붙잡은 이였다.

여기서 진운룡과 부딪히는 것보다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설득하는 것이 옳았다.

그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더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그때, 진운룡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네 녀석이 저것들을 책임지겠다?”

망우가 반가운 얼굴로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진 대협. 남궁진천과 이번 일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의 무공을 폐하고 소림의 참회동에 가둬 강호인들에게 본보기로 삼을 것입니다. 저 망우와 소림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지요! 저들은 죽을 때까지 다시 빛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각파 고수들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아무리 남궁진천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하나 무림 맹주이자 남궁세가의 태상 가주인 그를 폐인으로 만들고 참회동에 가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다름 아닌 망우였다.

그가 허튼 소리를 내뱉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진운룡과 망우는 정도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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