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혈룡전 5권 (122화)
8장 진운룡의 분노 (4)/
진운룡이 아무리 괴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는 혼자였고, 지지하는 무인들도 없었다.
그러나 망우는 이미 수많은 무인들에게 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고, 모두의 신뢰를 받았다.
살아 있는 생불이라 불리는 그가 악이라 칭하는데 누가 감히 반박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의 뒤에는 강호 제일 방파인 소림이 자리하고 있다. 그를 해하려면 소림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대사님…… 무인에게 무공을 폐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간 남궁 맹주께서 정도 무림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셨음을 조금 고려해 주십시오.”
몇몇이 조심스럽게 징벌을 경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망우는 단호히 그들의 의견을 일축했다.
“가지고 있는 힘이 클수록 그 힘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 더 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나는 법이다. 그만큼 그에 대한 책임이 막중한 법! 다른 자들보다 더 엄히 다스려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이야! 그나마 내가 불자의 몸이기에 목숨을 살려두는 것을 다행으로 알라!”
남궁진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무공이 폐기된 채 소림의 참회동에 유폐될 것이다.
그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아무리 진운룡과 망우가 버티고 있다 하나,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대사께서 나를 징치하는 것이오!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이를 악문 남궁진천이 검을 빼들었다.
“이놈!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려는 것이냐! 네놈이 버틴다면 네놈의 가문에도 피해가 갈 수 있음을 모른단 말이냐!”
남궁진천이 망우의 결정에 불복하고 맞설 경우 남궁세가 역시 남궁진천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남궁세가 홀로 망우와 은자림의 고승들, 그리고 진운룡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강호의 인심 역시 망우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결국 남궁세가는 자신과 함께 무너지게 될 터.
“크으으…….”
남궁진천이 억울한 듯 침음성을 흘렸다.
자신으로 인해 세가가 무너져서는 안 됐다.
그의 고집으로 인해 자식과 형제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어찌 볼 수 있단 말인가.
“진운룡…… 네 놈이…… 결국!”
남궁진천이 이를 갈며 진운룡을 노려봤다.
이 모든 게 진운룡이 남궁린을 죽이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게 핑계일지도 모른다.
남궁진천은 이미 진운룡이 얼마나 뛰어난 자인지 짐작하고 있었고, 자신보다 뛰어난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증오가 되고, 집착이 되어 결국 이런 무리수까지 두게 된 것이다.
“크으윽…… 나 하나로 끝내 주시오……. 가문은 아무런 잘못이 없소. 맹의 무사들도 내 명에 따랐을 뿐이오.”
남궁진천이 피눈물을 흘리며 검을 바닥에 버렸다.
“너희 가문은 손대지 않겠다. 하지만, 이번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자들은 그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냉정한 얼굴로 망우가 말했다.
남궁진천 하나로 끝낸다면 진운룡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에 빠져나간 자들이 언젠가 다시 딴마음을 먹게 될 수도 있었다.
망우의 시선이 진운룡에게 향했다.
“진 대협. 소승이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망우와 남궁진천을 바라보던 진운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혜원의 제자라 하니 한 번 믿어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만일 이후에도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그땐 내 손으로 직접 그 씨를 말릴 것이다. 만일 모든 무림이 나를 적대한다면 무림 자체를 지워버릴 것이다.”
광오하고도 오만한 선언이었다.
각파 고수들도 얼굴에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망우가 워낙에 진운룡을 극진히 대하고 있기에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속으로는 어이없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어떻든 망우는 한숨 덜은 얼굴로 얼른 진운룡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진 대협. 소승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니 소림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오늘 약속은 지켜질 것입니다.”
진운룡은 차가운 눈으로 장내를 한 번 쓸어본 후 훌쩍 몸을 날려 무당을 떠났다.
* * *
쉰 평 남짓한 석실 한가운데 놓인 연단로(鍊丹爐)가 붉은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연단로는 불에 닿은 부분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앞에 황사 도중문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도중문의 두 눈이 신광을 뿜어내며 번쩍 열렸다.
“드디어 완성인가!”
연단로에서 솟아오르던 붉은 연기가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 대신 은은한 붉은 빛 덩어리 하나가 연단로 위 허공에 떠 있었다.
도중문은 희열에 찬 얼굴로 빛 덩어리를 바라봤다.
“이것이야 말로 피의 정수! 혈신대법을 완성시킬 혈령단! 오 년을 기다려 드디어 완성 시켰구나!”
도중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인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평상시의 근엄하고 인세를 벗어난 듯한 초연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 마리 탐욕스러운 야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도중문의 손이 조심스럽게 빛 덩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손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빛 덩이 주변을 쓰다듬고 스쳐갔다.
알 수 없는 언어가 도중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 머리통만 하던 빛 덩이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크기가 작아짐에도 불구하고 빛 덩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광채는 더욱 짙어졌다.
도중문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이 작업에 얼마나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빛 덩이가 엄지손가락 크기의 구슬이 되었을 때, 도중문이 큰 소리로 알 수 없는 주문을 토해냈다.
번쩍!
동시에 빛 덩이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와 석실 전체를 가득 채우더니, 빛 덩이가 천천히 허공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중문은 눈썹을 꿈틀대며 주문을 외웠다.
무척 힘이 드는지 양쪽 뺨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빛 덩이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도중문의 정수리를 향해 움직였다.
치이익!
뜨거운 열기에 빛 덩이 주변의 공기가 타들어갔다.
도중문의 머리카락 또한 타들어가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도중문은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 듯, 자리에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익!
그때, 빛 덩이가 도중문의 정수리로 파고들었다.
“크읍!”
그동안 꼼짝 않고 버티던 도중문도 뇌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그 순간만큼은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화아악!
순간, 도중문의 몸 전체를 시뻘건 화염이 뒤덮었다.
“끄으으…….”
살이 타고, 눈알이 터져 나가고, 손발톱이 녹아내림에도 도중문은 달아나거나 불을 끄려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결국 모든 육체가 녹아내리고, 뼈마저 불꽃 속에 파묻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시뻘건 불꽃만이 그 자리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불꽃의 한가운데에서 손톱만 한 작은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스스스스스!
소용돌이는 점점 불꽃을 빨아들이며 그 크기를 키웠다.
시간이 지나자 불꽃은 모두 소용돌이에 삼켜져 종국에는 직경이 일 장에 이르는 거대한 소용돌이만 남게 되었다.
쿠르르르르!
그때, 굉음을 내며 회전하던 소용돌이 속에서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끈적한 핏물이 겉 표면을 감싸고 있는 그 덩어리는 마치 커다란 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이라기엔 그 표면이 그리 딱딱해 보이지 않았다.
꿈틀!
그 순간, 핏덩어리 한쪽 표면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마치 무언가가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듯 표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늘어났다.
치이익!
마침내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다란 무언가가 끈적한 표면을 뚫고 나왔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의 팔이었다.
핏물로 인해 온통 붉게 뒤덮여 있었지만, 그 끝에 붙어 있는 손과 손가락은 그것이 누군가의 팔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팔이 모습을 드러내고, 곧이어 다른 한쪽 팔과 어깨, 그리고 피에 젖은 머리가 표면을 뚫고 나왔다.
온통 붉은색 천지인 상태에서 오직 두 눈만이 희게 빛났다.
붉은 얼굴 아래쪽이 위아래로 벌어졌다.
“으하하하하하!”
동시에 핏덩어리를 뚫고 나온 인형으로부터 석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광소가 터져 나왔다.
“이제 나 도중문이 새로운 세상을 열리라!”
피에 뒤덮인 인형, 도중문이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광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