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125화 (125/150)

# 125

/혈룡전 5권 (125화)

9장. 혼돈에 빠진 강호 (3)/

마교 내성의 성벽 위로 하우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는 아홉 명의 마두들이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며 시립해 있었다.

하우광의 시선이 성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으로 향했다.

천 명의 붉은 옷을 입은 관군과 이천의 광마단이 대치하고 있었다.

나머지 관군들은 싸움에 껴들지 않고 뒤쪽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 수가 워낙 많았기에 외성 밖까지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결국 실질적으로는 이천의 광마단과 천 명의 붉은 옷 관군의 대결이었다.

한데,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광마단이 밀리고 있었다.

“놀랍군.”

하우광이 순수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관군들의 실력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광마단은 마교의 열 개 무력 부대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조직이다.

그런 광마단을 상대로 관군들은 절반의 숫자로도 손쉽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장 앞에 나선 적발의 사내였다.

이미 초절정을 넘어 화경 초입에 이른 광마단주를 가지고 놀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하우광의 시선이 싸움터에서 벗어나 외성 입구를 향했다.

관군들의 행렬 가장 끝 쪽에 네 명의 관군이 짊어진 가마 하나가 보였다.

하우광은 그곳으로부터 진한 혈향을 느낄 수 있었다.

특별한 기세나 강력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분 나쁜 찐득한 혈향이 묘하게 그를 자극했다.

“진짜는 저곳에 있군.”

하우광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우우우우우웅!

순간, 하우광의 몸에서 마치 메뚜기 떼의 날갯짓 소리와 같은 굉음이 울리며 강력한 기파가 전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파아아앙!

기의 파동이 성문 앞을 휩쓸자, 광마단과 붉은 옷의 관군들도 싸움을 멈췄다.

“그만 모습을 드러내거라!”

하우광의 사자후가 천마신교가 자리 잡은 계곡 전체를 울렸다.

사마진과 아홉 마왕들이 무슨 소리인가 하여 조심스럽게 하우광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였다.

“크하하하하하!”

외성 입구로부터 산을 무너뜨릴 듯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역시 대단하구나, 하우광. 나의 존재를 눈치 채다니. 그대에 대한 강호의 평가가 오히려 모자람이 있구나.”

풍겨지는 찐득한 혈향과 달리 그 목소리는 너무도 맑고 청량했다.

하우광은 철탑처럼 우뚝 선 채로 가마를 응시했다.

“좋아, 그 정도는 되어야 나와 상대할 자격이 있느니라.”

콰아앙!

순간, 가마의 지붕이 터져 나가며 한 줄기 핏빛 선이 내성 벽을 향해 쏘아졌다.

핏빛 선은 하우광과 열 장 정도 떨어진 허공에 멈춰 섰다.

“그대의 능력이 아까워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회를 주겠노라. 이대로 무릎을 꿇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그대를 새로운 세상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세워주마!”

핏빛 선의 정체는 바로 도중문이었다.

그는 온몸에 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두 눈은 홍옥처럼 붉게 빛났으며,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혈신대법을 완성한 지 겨우 한 달 만에 신강 땅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북경에서 신강까지는 말을 타고 움직여도 반 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하지만 경악스럽게도 도중문은 단 한 달 만에 그 거리를 주파한 것이다.

하우광과 도중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놀랍군. 그대와 같은 자가 존재하다니…….”

하우광이 다소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도중문의 기운은 마치 무저갱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기운으로부터 끝을 알 수 없는 혼돈과 공허가 느껴졌다.

“인간을 벗어났군.”

“후후후, 그렇다. 그대의 말대로 나는 인간의 껍질을 벗었느니라. 하니, 그대의 능력으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글쎄, 그대가 인간을 넘어서 신에 도달한 자인지, 아니면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에 불과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강적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하우광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쯧쯧, 기어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다는 것이냐?”

도중문이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의미 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하우광이 먼저 움직였다.

그만큼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그도 인정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공격은 권(拳)이었다.

강기도 실려 있지 않은 평범한 주먹이었다.

하지만 그 속도가 그야말로 벼락처럼 빨랐다.

주먹을 뻗어낸 순간 어느새 도중문의 눈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중문의 얼굴에는 여유 있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쩌어어어엉!

공기가 터져 나가는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주변 오십 장이 넘는 범위를 덮쳤다.

땅 위에서 대치하고 있던 광마단과 관군들이 충격파에 밀려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닥이 꺼지며 운석이 떨어져 내린 것 같은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도저히 인간의 힘이라 볼 수 없는 강력한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하우광의 주먹이 도중문의 얼굴 한 치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법이구나.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겠어. 이번에 얻은 내 힘을 시험해 보기에도 딱 좋구나.”

도중문이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는 뒷짐까지 진 채 미동도 않고 하우광과 마주하고 있었다.

“인사는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하우광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앞으로 뻗어낸 주먹에서 검붉은 강기의 파편이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

쩌저적!

그러자 도중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무형의 막에 금이 갔다.

“호오!”

도중문이 탄성을 터뜨렸다.

무형의 막이 깨져 나가며 강기의 파편들이 도중문을 덮쳤다.

순간, 신기루처럼 도중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우광이 즉시 주먹을 거두고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슈아악!

그 자리로 핏빛 광구(光球)가 스치듯 지나갔다.

하우광이 피해낸 광구는 그대로 성문에 직격했다.

콰아아앙!

폭발과 함께 성문과 그 위의 성벽까지 주변의 모든 것이 터져 나갔다.

“이런!”

하우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곧바로 도중문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콰콰콰쾅!

도중문이 날린 광구가 연달아 하우광에게 직격했다.

하우광은 강기를 일으켜 광구들을 쳐냈다.

튕겨나간 광구들이 사방에서 터지며 적아를 가리지 않고 장내를 휩쓸었다.

하우광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의 공력이 예상대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움직임 역시 하우광이 쉽게 쫓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하우광은 곧장 천마신공을 끌어올렸다.

밑천을 남겨둘 상대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우광의 몸 전체를 검붉은 기운이 둘러쌌다.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도중문이 날린 광구들을 튕겨냈다.

곧이어 하우광의 신형이 화살처럼 도중문을 향해 쏘아졌다.

그 앞쪽으로 거대한 묵 빛 권형(拳形)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천마신공의 절기 중 하나인 천마파천권이었다.

사람 몸통만 한 권형이 그대로 도중문을 직격했다.

도중문은 피하지 않고 양 손바닥으로 권형을 막았다.

콰아아앙!

한 순간 공간이 수축되었다가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도중문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그 한가운데 있는 도중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 하우광의 공격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번에는 거대한 장영(掌影)이 도중문을 덮쳤다.

천마신공의 두 번째 절기 천마멸겁장이었다.

연달아 이어진 공격에 도중문 역시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하나 여전히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하우광은 멈추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천마멸겁장이 연달아 도중문에게 쏘아졌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십여 개의 장영이 도중문이 움직일 모든 곳을 점하며 날아갔다.

그때, 도중문의 두 눈에서 핏빛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도중문이 순식간에 핏빛 안개로 화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하우광이 눈을 부릅떴다.

이번에는 자신도 도중문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콰콰콰쾅!

목표를 잃은 장영들이 산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만일 내가 혈신대법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대에게 당했겠구나.”

그때, 하우광의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우광이 재빨리 뒤돌아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장력은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어느새 도중문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 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둘러 하우광의 장력을 쳐낸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그대와 더 어울렸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놀이는 여기까지다.”

도중문의 검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검으로부터 핏빛 뇌전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하우광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이 느려짐을 느꼈다.

그 속에서 오로지 도중문의 핏빛 검만이 완만한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움직임도, 소리도 사라진 공간 속에서 오직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전과 검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검의 궤적 끝에는 하우광의 목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다가오는 검을 보면서도 하우광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서걱!

동시에 하우광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의 두 눈에는 평온이 어려 있었다.

마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석상이 된 듯 그들은 수장의 죽음을 바라봤다.

“후우…….”

도중문이 비틀거리며 땅 위로 내려섰다.

“만만치 않은 자였어. 혈신지체가 된 내가 전력을 다해야 하다니…….”

힘에 겨운 듯 숨을 고른 도중문이 몸을 바로 세우고 명을 내렸다.

“오늘로 마교는 이 땅 위에서 지워질 것이다! 모두 추살하라!”

삼만의 관군이 주인을 잃은 마인들을 덮쳤다.

전의를 상실한 마인들은 제대로 대항도 못해본 채 그대로 쓰러졌다.

수천 년을 이어온 천산마교의 신화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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