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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127화 (127/150)

# 127

/혈룡전 6권 (127화)

1장 무림말살책 (2)/

푸욱!

혀들은 진운룡의 육신에 구멍을 내고 파고들었다.

크윽!

육신이 수천, 수만 갈래로 찢겨나가는 듯한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혀들은 진운룡의 몸 안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끄으으!”

진운룡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혀들을 통해서 끈적하고 불쾌한 기운이 몸 안으로 뿜어져 들어왔다.

기운은 온몸을 가득 채우고도 멈추지 않았다.

진운룡의 육신이 뒤틀리고 점점 부풀어 올랐다.

피부가 갈라지며 그 틈으로 핏빛 광망이 새어 나왔다.

온몸이 산산히 부서지는 듯한 극통에 진운룡이 비명을 질렀다.

―저항하지 말라.

천둥처럼 머리를 울리는 소리에 진운룡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정신은 점점 혼미해졌다.

점점 불어나던 핏빛 광망이 온몸을 뒤덮은 순간, 진운룡의 육신이 터져 나갔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진운룡은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 때문인지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으음…….”

오른손을 내려다본 진운룡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손등 한편이 검게 변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소은설의 피를 흡수한 지가 꽤 됐다.

소은설이 죽었다 살아난 이후로 자제했던 탓이다.

아마도 악몽을 꾼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피를 흡수하지 못한 탓에 광기가 다시 머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주군! 무슨 일이오!”

적산이 진운룡의 비명 소리에 달려온 모양이다.

“아무 일도 아니다.”

진운룡이 방문을 열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슨 악몽이라도 꾼 거요? 후후, 주군도 사람이긴 한 모양이오?”

적산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이라…….”

진운룡이 아득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과연 그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여 적산은 더 이상 농을 할 수 없었다.

진운룡의 상념을 깬 것은 소은설의 목소리였다.

“그 손……!”

그녀의 시선이 검게 변한 진운룡의 손등을 향했다.

“아직은 괜찮다.”

진운룡의 말에 소은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최근 여러 가지 고민 때문에 그녀의 피가 없으면 진운룡은 다시 석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진운룡 역시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서인지 아무런 말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지금이라도…….”

소은설의 말에 진운룡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내가 찾아가지.”

그제야 소은설은 적산과 구학이 흡혈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소은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림맹 놈들은 그냥 놔두실 거요?”

적산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남궁진천에게 엄한 징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던 그들이 결국 남궁진천을 놓치고 말았다.

“놈들이 주군 몰래 빼돌린 것일 수도 있지 않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본시 정파 놈팽이들은 앞에서는 성인군자인 척, 뒤에서 호박씨 까는 족속들이지요.”

구학이 목소리를 높였다.

항상 멸시당하는 하오문의 입장에서는 무림맹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처럼 세력이 약해진 때에 굳이 진 공자님과 척을 지려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소은설의 말에 적산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렇다고 해도 놈들이 약속을 어긴 것은 분명하잖소? 게다가 그런 중요한 죄인이 쉽게 도망치도록 허접하게 관리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운룡이 구학을 향해 물었다.

“놈이 탈출할 때, 개방 방주가 죽었다고?”

개봉의 총타를 덮쳤을 때, 달아났던 구천엽이 무당산에 나타났다는 것이 수상했다.

놈은 무슨 이유로 남궁진천을 만나려 했던 것일까.

홍무생처럼 남궁진천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던 것일까.

더욱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남궁진천이 구천엽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사실이었다.

총타에서 본 구천엽의 경지는 결코 혈교주의 아래가 아니었다.

부상까지 입은 남궁진천이 그를 죽이고 달아났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그때, 구학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왜 그동안 얌전히 잡혀 있던 남궁진천이 구천엽을 죽여 가면서까지 탈출을 감행했냐 이겁니다.”

“그게 뭔 소리여? 갇혀 있었으니까 당연히 못 도망갔지, 그러다가 개방 방주라는 자가 온 기회를 틈타 얼른 튄 것 아니냐?”

적산의 말에 구학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간 남궁진천을 가둬둔 곳은 경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았습니다. 남궁진천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의 능력을 감안할 때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을 정도였거든요.”

“아니, 그렇다면 정파 놈들이 아예 작정을 하고 남궁진천의 탈출을 방조했다는 이야기냐?”

적산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아닙니다. 그들이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은 남궁진천이 절대 탈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죠.”

“대체 뭘 믿고?”

“남궁진천은 자신의 가문을 무척 소중히 여기는 자입니다. 지금의 남궁세가는 그가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문의 안녕과 번영입니다. 한데, 만약 그가 탈출을 해서 무림 공적이 된다면 그 여파가 남궁세가에 미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간 무림맹에서 남궁진천이 벌인 일에는 알게 모르게 남궁세가가 관여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남궁진천이 무림맹주가 되면서 그들이 얻은 이익도 상당합니다. 당연히 남궁진천이 무림 공적이 된다면 남궁세가 또한 다른 문파와 무인들에게 지탄을 받겠지요. 아마 이것을 빌미로 남궁세가를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곳도 많을 겁니다. 사실 이번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힌 것도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그런 자가 갑자기 무엇 때문에 태도가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흥! 당장 지가 죽게 생겼으니, 가문이고 뭐고 버리고 도망간 거지!”

적산의 말에 구학이 혀를 찼다.

“아니, 적 공자님은 어찌 그리 단순합니까?”

“뭐야?”

적산이 눈을 치켜뜨자 구학이 얼른 소은설 뒤로 숨었다.

“그, 그게 아니라, 어차피 달아난다고 해도 놈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남궁세가로 가겠습니까? 아니면 산속에 은거라도 하겠습니까? 어차피 무림 공적이 되면 세상의 눈을 피해 평생 숨어 살아야 하는데, 그게 감옥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거, 거기다 그리되면 세가는 풍비박산이 날 텐데.”

물론, 단전이 파괴되고 폐인이 되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진천은 야심이 크고, 자신의 가문을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는 자였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가 고작 비루하게 몸을 숨기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을 버릴 리가 없었다.

구학의 말을 들은 진운룡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만…….”

잠시 입맛을 다신 구학이 무슨 커다란 비밀을 이야기하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죽은 구천엽의 시신이 목내이처럼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진운룡의 눈에 기묘한 빛이 일었다.

“목내이?”

“그, 그렇습니다.”

갑작스러운 진운룡의 반응에 구학이 목을 움츠린 채 대답했다.

진운룡이 생각에 잠겼다.

목내이처럼 변한 시신은 혈신대법의 제물들의 특징이다.

정혈과 공력을 모두 흡수당하면 인간의 육신은 다 타버린 숯처럼 껍데기만 남게 된다.

혈신대법을 받은 자들이 강호에 흡혈마공이라 알려진 방법으로 상대의 정혈을 흡수할 때에도 이와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만일 구천엽이 혈신대법이나 흡혈마공에 당했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누가 구천엽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알려진 대로 남궁진천이 구천엽을 죽였다면, 그가 혈신대법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진운룡이 알기로는 남궁진천은 혈신대법과 관계가 없었다.

만일 그가 혈신대법을 익혔다면 혈교주와의 결전에서 그토록 허무하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혈신대법을 숨기려 했을 리도 없었다.

‘아니, 우선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좋아.’

최근 벌어지는 일들의 기괴망측함을 생각해보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았다.

진운룡은 일단 남궁진천이 혈신대법을 익혔을 경우도 배제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무림맹을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자세한 경위와 구천엽의 시신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시신을 확인하면 그가 과연 혈신대법에 당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꽤 지난 상태라 이미 매장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무덤을 다시 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잘 생각하셨소!”

진운룡의 말에 적산이 신이 나서 답했다.

다음 날 출발하기로 결정한 후, 진운룡은 구학과 적산의 묘한 눈빛을 무시한 채 소은설의 방으로 향했다.

*   *   *

“죄송해요. 그간 생각을 못했네요.”

진운룡과 함께 방으로 돌아온 소은설이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다.”

짧지만 부드러운 진운룡의 대답에 소은설은 무언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한마디에 그녀의 상황에 대한 걱정과 배려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소은설의 시선이 진운룡의 손등으로 향했다.

“늦지 않은 건가요?”

검게 변한 진운룡의 손등은 물고기 비늘처럼 갈라져 있었다.

“아직은 충분하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시간을 더 가져도 된다.”

“아니에요. 저도 괜찮아요.”

소은설이 고개를 저으며 손목을 내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손목을 내밀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 그녀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더 커진 상태였다.

진운룡을 마주하면 그 혼란이 더욱 커졌다.

눈앞에 제갈여령의 기억들이 마치 환영처럼 보였다.

그간 알게 모르게 진운룡을 피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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