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혈룡전 6권 (128화)
1장 무림말살책 (3)/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애써 무시한 채, 소은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끝내도록 하마.”
순간, 손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동시에 소은설의 의식이 하얗게 멀어져 갔다.
‘무, 무슨 일…….’
갑작스러운 상황에 소은설은 급히 눈을 뜨려했지만, 몸은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 이곳은?’
눈을 뜬 소은설은 급히 사방을 둘러봤다.
한가운데 켜진 등잔불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캄캄한 석실.
대체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일까.
―왔느냐?
‘누, 누구?’
딱히 어떤 목소리라고 할 수 없는 기묘한 울림이 소은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너를 이승으로 불러오기 위해 내가 꽤 많은 수고를 했느니라.
‘무슨 소리지? 이승이라니…… 내가 죽기라도 했단 말이야?’
목소리는 소은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 너는 새로운 세상을 완성하기 위한 열쇠가 될 것이다.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석실 안을 가득 매웠다.
동시에 마치 머릿속에서 범종을 때리듯, 거대한 굉음이 소은설의 의식을 진탕시켰다.
―지금부터 제갈이라는 성은 잊고 소씨로 살거라.
목소리의 마지막 말과 함께 소은설의 의식이 다시 하얗게 멀어져갔다.
“괜찮으냐?”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소은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에 안절부절하는 진운룡의 모습이 보였다.
‘이 사람도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구나…….’
마치 술에 취한 듯한 의식 속에서 소은설이 피식 웃었다.
‘하기야, 예전에는 그토록 다정했던 사람이었는데…….’
오래전 진운룡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의 명치를 통해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진운룡이 기운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흐릿하던 의식이 명료해졌다.
“진 공자님…….”
“그래, 정신이 드느냐?”
그답게 노인스러운 말투로 진운룡이 물었다.
“네…….”
그런데, 소은설이 어쩐지 아련한 눈으로 진운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진운룡은 소은설이 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예전에 자신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세월의 깊이가 담겨져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번개에 맞은 듯 찌릿한 전율이 진운룡의 온몸을 때렸다.
진운룡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 * *
동창 제독 육환이 도중문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시립해 있었다.
“마교는 정리가 끝났습니다. 잔당들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차피 모두 뿌리를 뽑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먼저다. 세상이 바뀌면 놈들이 발붙일 곳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무인 나부랭이들이 더 이상 힘만 믿고 칼을 들고 설치지 못하겠지.”
차가운 눈빛으로 도중문이 육환을 응시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압력이 육환을 눌렀다.
“노, 놈들이 칙령을 따른다면 그냥 두실 것입니까?”
간신히 입을 연 육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중문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놈들이 칙령을 따르든 말든, 눈에 보이는 모든 무인들의 씨를 말릴 것이다. 놈들이 그 하찮은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세상의 눈을 피해서 꽁꽁 숨어 숨도 쉬지 말아야 할 것이야. 새로운 세상에서 그따위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 주어질 자리는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다.”
도중문의 무거운 목소리가 육환의 뒷목을 서늘하게 내리눌렀다.
* * *
“그대가…… 진정?”
진운룡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공자님. 여령이에요.”
“대체 어떻게…….”
진운룡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갈여령은 분명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묻었다.
한데, 백오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어떻게 그녀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처음 소은설을 봤을 때부터 너무도 닮은 그녀가 혹시 제갈여령은 아닐까 상상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이룰 수 없는 바람에 불과했다.
스스로도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자가 저의 영혼을 강제로 이승에 데려왔어요. 태아의 몸을 빌려 처음 이승으로 돌아올 때,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가 기억나요.”
소은설, 아니 제갈여령의 말에 진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의 영혼을 강제로 데려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가 제갈여령의 혼백을 태아의 몸에 집어넣은 것이다.
아니, 지금 그녀의 모습과 육신이 살아생전 제갈여령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보아서는 태아 자체가 제갈여령의 환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귀신이고 영혼이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믿기 힘든데, 이런 사실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혈신대법과 불사의 육신을 얻게 된 진운룡 자신을 비롯해, 죽었다가 부활한 소은설까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어디 한둘이던가.
진운룡은 제갈여령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누가, 대체 무슨 이유로 제갈여령을 이승으로 다시 데려온 것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운룡이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그대를 앞으로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소?”
그녀는 제갈여령이며 동시에 소은설이었다.
물론, 진운룡에게는 제갈여령이 더욱 그리운 이름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소은설로 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소은설도 제갈여령도 모두 저이니까요.”
“알겠소. 그렇게 하지.”
진운룡 역시 그편이 나을 것이라 여겼다.
“혹시 그대를 데려온 자에 대한 실마리는 없소?”
소은설이 잠시 눈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이승으로 끌어온 자에 대해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얼굴은 아예 보지도 못했고, 목소리마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소은설―제갈여령은 저승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졌기에 과연 그것이 신의 목소리인지 인간의 목소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소리라고 하기 보다는 머릿속에서 진동하는 울림에 가까웠다.
게다가 기억 속에 보이는 석실의 정경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한가운데서 빛을 밝히던 등잔뿐이었다.
“죄송해요…… 전혀…….”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제갈여령이 고개를 숙였다.
“그대가 미안해할 것은 없소. 단지 놈이 여령 그대에게 어떤 수작을 부린 것인지 걱정이 돼서 물어본 것뿐이오.”
왜 하필 제갈여령을 소환한 것일까.
게다가 공교롭게도 진운룡은 그녀로 인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녀의 피가 혈신대법의 부작용을 상쇄시킨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진운룡을 괴롭히던 광기도 그녀의 피를 흡수하면 사라진다.
물론, 그것이 영구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진운룡에게는 사막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값진 것이었다.
진운룡의 하산과 제갈여령, 혈신대법의 재등장까지. 그 시기가 묘하게도 맞물려 있었다.
“그자는 제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쇠라고 했어요.”
새로운 세상이라는 단어가 진운룡의 귀에 들어왔다.
혈교주 역시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령을 다시 데려온 자도 혈신대법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왠지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자가 목적을 가지고 제갈여령을 이승에 다시 불러왔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지금도 제갈여령을 주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진운룡의 시선이 제갈여령에게 향했다.
가문과 무림맹에 이용당해 목숨을 잃었고, 죽어서까지 평온을 허락받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가련한 여인.
“누가 그대를 이용하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자이든 반드시 내가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오. 그리고 절대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지킬 것이오.”
놈이 제갈여령에게 무슨 수작을 부리든 자신이 반드시 막아내리라.
그리고 제갈여령을 건드린 대가를 몇 배로 되갚아 주리라
진운룡의 두 눈에 핏빛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 * *
“망우 대사님!”
소림의 은거 고승 중 한 명인 무허가 무거운 목소리로 망우를 찾았다.
“무슨 일인데 표정이 그리 어두운 것이냐?”
망우가 놀란 눈으로 무허를 바라봤다.
무허는 오랜 수행으로 부동심에 다다른 고승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은 그만큼 큰일이 발생했다는 이야기였다.
“진운룡, 그자가 찾아왔습니다!”
망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그가 드디어 왔구나.”
망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진운룡에게 남궁진천의 일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냐, 안내하거라.”
잠시 고민하던 망우가 결심을 굳힌 듯 빠른 걸음으로 처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