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혈룡전 6권 (129화)
1장 무림말살책 (4)/
의사청에는 진운룡 일행과 각파의 수뇌들이 무거운 분위기로 마주하고 있었다.
황제의 칙령에 대한 대응 때문에 아직 자신들의 문파와 세가로 돌아가지 못해 많은 수의 고수들이 무림맹에 남아 있었다.
진운룡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갑작스러운 방문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진 공자, 오셨소이까?”
그때 망우가 무허와 함께 의사청으로 들어왔다.
진운룡의 시선이 망우를 향했다.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망우가 천천히 진운룡 앞에 마주섰다.
“남궁진천의 일로 찾아 오셨겠지요. 빈승이 뭐라 드릴 말이 없소이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남궁진천이 탈출한 것은 망우와 무림맹의 책임이었다.
진운룡이 그것을 추궁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약속은 소승의 이름을 걸고 한 것이니, 진 공자께서 죄를 물으시려거든 소승에게 하십시오. 소승의 오만함이 일을 그르친 원흉이외다.”
망우가 착착한 표정으로 합장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진운룡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구천엽의 시신을 보고 싶소.”
망우와 각파 고수들의 표정에 놀람이 어렸다.
“시, 시신을 말씀이오? 무슨 이유로…….”
망우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구천엽은 이미 무덤에 묻힌 상태였다.
그의 시신을 확인하려면 무덤을 파내야 하는 것이다.
개방에서 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사인이라면 소승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 방주의 시신은 이미 땅에 묻힌 상태인지라…… 게다가 시신의 상태도 부패가 많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죽었을 당시 목내이의 모습이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혈교에서 사용하는 흡혈마공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오. 그래서 확인하려는 것이오.”
진운룡의 말에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 역시 처음 구천엽의 시신을 봤을 때 흡혈마공을 의심했다.
하지만, 만일 구천엽이 흡혈마공에 당했다면 그 말은 곧 구천엽을 죽인 남궁진천이 혈교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랬다면 왜 남궁진천이 혈교주와 혈전을 벌였단 말인가.
게다가 거의 죽음 직전의 위기까지 이르렀음에도 혈교의 무리들이 사용하던 그들이 소위 피의 권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소승 역시 처음에는 혈교와의 연관성을 의심했소이다. 하지만…….”
진운룡이 망우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내가 시신을 직접 확인해 보면 진위를 정확하게 가릴 수 있소. 그리고 흡혈마공에 당한 시신은 수십 년이 지나도 썩지 않으니 부패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망우가 곤란한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진운룡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이제껏 그의 행동을 유추해 볼 때, 진운룡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결코 머뭇거리거나 망설이지 않는 이였다.
아마도 무림맹과 개방이 거부한다 해도 그는 무슨 수를 쓰든 구천엽의 시신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구천엽의 시신을 다시 파내는 것은 개방에게는 그야말로 치욕적인 일이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구천엽 역시 혈신대법과 연관이 있소. 개방 또한 마찬가지니, 그 자들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소.”
진운룡의 말에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웅성댔다.
“개, 개방이 혈교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
“무슨 근거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오!”
개방이 어디던가.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방파 중 하나로 제물과 명예를 멀리하고 항상 협과 의를 따라 모든 무림인들에게 칭송을 받는 곳이 바로 개방이었다.
그런 개방이 혈교와 연관되어 있다니, 누구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흥! 홍혜란 그 잡년은 개방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의 반응에 적산이 코웃음을 쳤다.
홍혜란 사건 때 상당수의 개방도가 혈교와 관련이 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당시 홍무생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모두 정리했다고는 하나, 숨어 있는 혈교도들을 모두 색출했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수뇌부들은 적산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 말씀이오?”
망우가 심각한 얼굴로 진운룡에게 물었다.
“그렇소. 내가 개봉 총타에서 직접 확인했소. 개봉에서 일어난 무인 실종 사건의 원흉이 바로 그들이오.”
“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망우가 한숨을 토해냈다.
만일 진운룡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파 무림에는 크나큰 오욕이다.
스승으로부터 들은, 그리고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온 후 보여준 진운룡의 행적을 생각하면 이런 일을 거짓으로 꾸며댈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거리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가 굳이 쓸데없는 거짓말로 다른 이를 속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구 방주가 혈교의 무공을 익혔다는 말이오?”
“그자가 혈신대법을 시도한 흔적을 이미 확인했소. 아마도 홍무생이나 개방의 수뇌들 역시 그자에게 당해서 이지를 잃은 것 같소.”
망우와 정파의 인물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딱딱하게 굳었다.
“홍무생 그 아이까지?”
망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홍무생은 그가 무척 아끼던 후배 중 하나였다.
성정이 올곧고 정의로웠으며, 무공의 재능 역시 뛰어나 정도 무림을 이끌 재목이라 여겼고, 결국 그의 예상대로 무림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한데, 그 홍무생마저 혈교의 술수에 당해서 이지를 잃었다 하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궁진천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망우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대사님!”
놀란 각파의 고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망우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개방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인데…….”
망우가 그들의 말을 잘랐다.
“이미 옛날의 개방이 아니오. 벌써 몇 번씩이나 혈교와 연관이 되어 있음이 드러났소. 차라리 이번 기회에 개방과 무림맹 모두 스스로 썩어가는 환부를 도려내는 결단을 보여줘야 할 것이오.”
망우의 두 눈에는 비장한 각오가 어려 있었다.
이미 정파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찢겨지고 추락한 상태였다.
과거의 잔재에 매달리기보다는 그동안의 오류를 인정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할 때였다.
망우의 단호한 모습에 모두가 씁쓸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 * *
구천엽의 무덤은 개봉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개방의 반발을 예상해 망우가 직접 진운룡과 함께 동행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개방의 반발은 그리 크지 않았다.
개봉 총타는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진운룡을 통해 개방의 상황을 전해들은 망우였지만, 직접 확인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총타에 있던 수뇌부들 대부분이 혈교와 연관되어 진운룡에게 죽거나 추종자들을 이끌고 달아난 상태인지라, 명령을 내리거나 사태를 수습할 인물이 존재하지 않아 방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일로 인해 조직이 분열되어 같은 방도들조차도 서로를 의심하고 경원시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방주 구천엽과 홍무생이 혈교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니, 더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자칫 개방이라는 문파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구천엽과 관련된 자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다행이나, 구천엽은 물론 홍무생까지 혈교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을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개방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들 중 누구도 구천엽의 시신을 확인하는 일에 대해 나서서 반대하거나 막는 자들이 없었다.
현 무림에서 가장 명망과 배분이 높은 망우가 직접 나서서 요청하는 데야 더욱 반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망우와 진운룡은 다소 싱거운 표정으로 구천엽의 무덤으로 향했다.
구천엽의 묘는 묘석이나 묘비 하나 없는 초라한 모양이었다.
개방 제자들이 무덤을 조심스럽게 열고 구천엽의 시신을 꺼냈다.
“음…….”
소은설이 시신의 처참한 모습에 신음을 흘렸다.
구천엽의 시신은 마치 온몸의 모든 체액이 빠져 나간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피부는 불에 탄 시신처럼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진운룡이 즉시 앞으로 나서 시신을 살폈다.
“흐음…….”
여기저기 시신을 상세히 살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소? 흡혈마공에 당한 것이오?”
망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하군…….”
진운룡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잣말을 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적산이 잔뜩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진운룡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분명 흡혈마공에 당한 모습과 흡사한데…….”
다시 한 번 시신을 살핀 진운룡이 말을 이었다.
“얼굴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이는군.”
망우가 조금은 황당한 얼굴로 진운룡을 바라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갑자기 해골을 연상시키는 말라비틀어진 시신의 표정을 들먹이는 진운룡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키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래 흡혈마공에 정혈을 갈취당한 이들은 한계를 넘어선 공포나 두려움에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절정의 쾌락을 맛본 이들처럼 희열에 젖어 있거나, 둘 중 하나요. 한데, 이 자의 표정은 너무 담담하고 평범하다는 것이오.”
말라비틀어진 시신의 표정을 따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진 공자께서는 구 방주가 흡혈마공에 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진운룡은 망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분명 시신의 상태는 흡혈마공에 당한 시신과 흡사했다.
단지 표정 때문에 흡혈마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정 짓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계속해서 진운룡의 머리 한 쪽을 찜찜하게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