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혈룡전 6권 (131화)
2장 무림맹의 해산 (1)/
구대 문파를 비롯한 세가들은 칙령에 명시한 최종 시한이 가까워지자 무한에 모였다.
“대사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불안한 얼굴로 팽가의 가주 팽천도가 물었다.
“놈들이 벌써 의창에 이르렀다 합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이렇게 된 이상,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각파의 인사들이 저마다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무한 주변을 일만이 넘는 관군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창의 주력 고수들이 의창까지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젠 칙령의 내용이 그저 엄포용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대로 봉문을 할 수는 없지 않소?”
화산 장문 임혁군이 말했다.
봉문은 문파의 존립을 위협하는 일이다.
모든 수익 사업과 외부 활동을 멈추고는 문파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속가들이 있으니 그나마 버틸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공동파 진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속가들은 가만 놔둘 것 같습니까? 지금 놈들이 하는 짓으로 봐서는 모든 문파와 세가들을 무너뜨릴 작정입니다.”
“그러니 이제 놈들과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소이까?”
성정이 불같은 팽천도가 상기된 표정으로 소리쳤다.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동창과 맞서는 것은 반역이 아닙니까?”
“그럼 가만히 앉아서 죽기라도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기야 당장에 가문과 문파가 사라지게 생겼는데, 반역이 문제입니까?”
이들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중소 문파야 봉문을 하고 제자들을 해산시켜도 살길이 있겠으나, 대형 문파와 세가들은 달랐다.
당장에 수많은 가솔들과 제자들의 생계가 막막할 뿐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이어왔던 그들의 전통과 자긍심 역시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명(明)이 생기기 전에도 이 중원 땅을 지키고 있었으며, 몽골 오랑캐들이 중원 땅을 유린할 때도 꿋꿋이 버티고 맞서왔소! 임금이 바뀌고 나라가 바뀐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무도(武道)요, 정도(正道)이올시다! 어찌 그들이 감히 우리를 반역도로 몰고 씨를 말리려 든단 말이오!”
황보혁군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이제까지 놈들의 행보로 보아 동창이 노리는 것은 결국 무림을 멸하는 것이오.”
망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봉문을 하고 그들의 말을 따른다 해도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오.”
모두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소이다. 놈들에게 죽거나, 놈들을 물리치고 무림을 지켜 내거나…….”
망우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정보에 의하면 동창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
마교를 단 하루만에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우두머리인 도중문이라는 도사는 마교주를 홀로 추살했을 정도로 무공의 경지가 높았다.
그렇지 않아도 혈교와의 혈전으로 인해 전력이 약해진 현 정도 무림이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아미타불…….”
불호와 함께 망우의 시름이 깊어갔다.
* * *
무림맹은 무한 외곽 동호 근교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문을 중심으로 폭이 이십 장이 넘어가는 대로가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상가와 객잔, 식당, 주점 등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북적댔다.
한데 오늘은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방이 고요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가와 객잔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거리를 누비던 인파와 손님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천 명이 넘는 관인들이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대로를 가득 채우고 무림맹을 둘러싼 채 삼엄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무림맹 정문 쪽으로 관인들 중 하나가 양손에 두루마리를 받쳐 든 채 걸어 나왔다.
정문에서 열 걸음 정도 앞에 멈춘 관인이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역당들은 지엄하신 황명을 받으라! 황제께서 내리신 칙령을 어기고 반역을 꾀한 무림 도당들은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만일 이를 따르지 않으면 황제께서 내리신 명을 받들어 너희 역적 무리를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참살할 것이다!“
두루마리를 모두 읽은 관인이 다시 뒤로 물러섰다.
끼이익!
그때, 무림맹 정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망우와 정파의 고수들이었다.
“아미타불! 본디 무림은 관과 관여한 적이 없고, 정치에도 관여한 적이 없거늘, 어찌 역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이오?”
망우가 심우한 공력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위압감이나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를 맑게 해주는 소리였다.
“본디라…… 본디 중은 싸움질에 열중할 것이 아니라, 수행에 정진하고 부처의 뜻을 깨우치기 위해 수도에 힘써야 하지 않느냐?”
관군의 뒤쪽에서 나직하면서도 사방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우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도사가 있었다.
나이는 기껏해야 마흔도 안 되어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풍도골의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바로 황사 도중문이었다.
“음…….”
망우가 침음성을 흘렸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만만치가 않았다.
망우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망우라는 땡중이 너로구나? 듣던 대로 보통이 아니로군. 마교 교주보다 더 경지가 높구나.”
도중문의 두 눈에 이채가 일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망우의 경지가 훨씬 높았던 것이다.
“그 정도면 나와 겨룰 자격이 있도다.”
광오한 도중문의 언사에 정파 고수들이 이를 갈았다.
“부탁드리오. 우리는 싸움을 원치 않으니 부당한 핍박을 멈추고 물러가 주시오.”
망우가 간곡하게 말했으나, 도중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망우의 말을 잘랐다.
“역도의 무리와 타협은 없다!”
동시에 도중문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갔다.
“모두 역도들을 제압하라! 대항하는 자들은 참살하라!”
명이 떨어지자 동창의 무인들이 무림맹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중에서도 하얀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가장 선두에서 달려들었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섬전과 같이 빠르고 가벼웠다.
“고수들이오! 모두 조심하시오!”
정문을 막아선 정파의 고수들이 공력을 끌어올리며 동창의 무인들을 맞이했다.
“이놈들!”
화산 장문 임혁군의 검이 수십 개의 매화 송이를 피워내자 앞서 달려들던 동창의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그때 어지간한 사람 키보다 더 길고 거대한 거치도가 임혁군을 덮쳤다.
마치 태산이 덮쳐오는 듯한 중압감에 임혁군이 급히 검강을 피워올렸다.
콰아아앙!
“허억!”
강기를 씌웠음에도 어마어마한 충격에 눌린 임혁군의 다리가 절반이나 땅을 파고 들었다.
“후후! 이것밖에 안 된다면 실망이군!”
거구의 동창 무사가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이익!”
임혁군이 이를 악물며 거치도를 밀어내고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거치도를 어깨에 걸친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임혁군의 행동을 방치했다.
너 따위는 언제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 담긴 모습이었다.
훌쩍 뒤로 물러난 임혁군이 주변을 살폈다.
다른 이들 역시 동창의 무사들과 상대하고 있는데, 그 실력이 거치도를 든 사내 못지않았다.
무당의 태허진인은 쌍극을 든 눈동자가 없는 사내와 맞서고 있었는데, 무당제일검이자 십이천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그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연신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은 쌍극을 든 사내였다.
소림 은자림의 고수인 무허와 무운 역시 괴이한 용모의 동창 무인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당장에 밀리지 않는 것은 그나마 십여 명의 은자림 고수들 때문인데, 그들이 백여 명이 넘는 동창의 무사들을 막으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동창 무사들은 숫자가 너무 많았고, 그 실력도 일반 무림맹 무사들을 압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림맹 측이 불리해질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망우가 결심을 한 듯 몸을 날렸다.
표홀히 몸을 띄운 그가 허공을 가로질러 동창 무사들 뒤쪽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도중문을 향해 쏘아져 갔다.
반전을 위해서는 우두머리를 꺾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퍼퍼퍼퍽!
그가 지나간 자리로 길이라도 나듯 동창의 무사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그에게서 십여 장이 넘게 떨어진 곳까지 동창의 무사들 백여 명이 순식간에 쓰러진 것이다.
마치 바람에 갈대가 눕듯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름값을 하는구나!”
도중문이 기다리지 않고 마주 몸을 날렸다.
그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우우우웅!
순간, 망우가 양손을 활짝 펴서 앞으로 쭉 내밀자, 폭이 반 장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황금빛 장영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도중문의 두 눈이 빛났다.
“호오! 대력금강장이로구나!”
소림 최고 절기 중 하나인 대력금강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디 소림의 최고 절기가 얼마나 위력이 강한지 보자!”
도중문이 조금은 흥에 겨운 목소리로 마주 장을 쳐냈다.
순간 주위의 대기가 도중문의 손바닥을 향해 급격히 빨려 들어갔다.
쉬이이익!
동시에 핏빛으로 달아오른 도중문의 손에서 십여 개의 혈장(血掌)이 쏘아져 나왔다.
투투투투퉁!
십여 개의 혈장과 황금빛 장영이 부딪히며 마치 속이 빈 나무 상자를 때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곧이어 황금빛 장영이 구겨지듯 일그러지더니, 섬광과 함께 터져 나갔다.
쩌어어엉!
공기가 찢어지는 파공음이 전투 중이던 무림맹과 동창 무사들의 움직임을 멈췄다.
모두의 눈길이 두 사람의 싸움으로 향했다.
두 거인들의 싸움이 결국 전장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폭발의 여파로 생겨난 흙먼지가 가라앉고, 첫 격돌의 결과가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망우와 도중문은 장을 뻗은 채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표정은 둘 모두 좋지 않았다.
망우는 어두운 얼굴로 도중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마음먹고 펼친 대력금강장이 너무 쉽게 막혔다.
이 싸움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도중문 역시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력금강장의 위력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망우의 능력이 강호에 알려진 것을 능가한다는 반증이었다.
‘쉽지 않겠군!’
도중문이 진진한 표정으로 공력을 끌어올렸다.
망우가 결코 여유를 두고 싸울 수 없는 상대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구우우우우웅!
두 사람 사이에 기류가 거칠게 회오리쳤다.
땅이 울리고 대기가 울렸다.
건물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날렸다.
싸움의 여파에 휘말릴까 무사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저절로 싸움 공간이 만들어졌다.
쿠우우웅!
하지만 두 초인들의 능력은 그 정도의 공간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곧이어 속개된 두 사람의 대결은 경천동지할 위력을 보여줬다.
겨우 세 번의 초식 교환이 이루어지자, 무림맹의 성벽처럼 두터운 담벼락과 주변의 건물들이 지진이라도 난 듯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다.
가히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들의 대결을 보는 듯했다.
망우의 거대한 장력이 연속해서 도중문을 때렸고, 도중문의 핏빛 장영이 그것을 파괴하고 찢어냈다.
그 모습은 마치 두 마리 용이 얽히고 물어뜯어 천둥과 번개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망우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장을 쳐내고 있고, 여유롭던 도중문도 입을 꾹 다문 채 망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파 무림인들의 가슴에는 조금씩 희망이 솟기 시작했다.
“역시 망우 대사님일세!”
남궁진천과 혈교주의 싸움을 직접 목격했던 이들은 망우의 무위가 남궁진천보다 몇 단계 위의 수준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대력금강장이 저 정도의 위력일 줄이야……!”
소림의 제자들 역시 망우의 신위에 고양된 모습이었다.
반면 불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망우의 막강한 무위에도 불구하고 도중문이 쉽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당장에는 망우가 계속 공격을 하고 도중문이 방어를 하는 형세였으나, 그것이 결코 도중문의 약세로 보이지는 않았다.
도중문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망우의 위력적인 공격을 방어해 내고 있었다.
정도 무인들은 망우가 도중문을 꺾어 주길 간절히 빌었다.
만일 망우가 패한다면 무림맹은 그대로 끝이었고, 정도 무림 역시 동창의 칼날 아래 짓밟히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반선수!”
그때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망우 앞쪽 허공이 백여 개가 넘는 수인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소림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절기, 반선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수인 하나하나가 황금빛 강기를 머금고 있는데, 백여 개의 수인 앞에 선 도중문의 모습이 마치 태풍 앞에 홀로 놓인 어린 묘목(苗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순간, 도중문의 눈동자가 깊이 침잠했다.
붉은색 기류가 도중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르르르르!
마치 야수의 울음 같은 소리와 함께 도중문의 등 뒤로 거대한 혈룡(血龍)의 형상이 드리워졌다.
우르르릉!
도중문이 검결지를 휘두르자 혈룡이 허공을 가득 메운 수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동시에 수백 발의 뇌전이 허공을 때렸다.
쩌저저정!
파지지직!
뇌전에 직격당한 수인들이 터져 나갔다.
그도 모자라 수인들을 뚫은 뇌전 다발이 망우를 향해 쏘아졌다.
“아…….”
정파 무인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계속 우위에 서 있던 망우가 순식간에 위기에 처한 것이다.
순간 망우의 전신이 눈부시게 발광(發光)했다.
한순간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오며 뇌전 다발들을 흩어버렸다.
“무상대능력!”
소림 최고의 방어 절기이자, 동시에 강기공이기도 한 무상대능력이 펼쳐졌다.
그간 강호에서 실전되었다 여겨진 소림의 절기 중 하나였는데, 오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망우는 하나의 빛 덩이로 화해 있었다.
황금빛 광채로 뒤덮인 망우가 직접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