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혈룡전 6권 (138화)
3장 도중문 (6)/
혈신은 혈신대법 최종 단계에 다다르는 경지다.
혈신이 되면 혈신대법의 부작용인 광기와 석화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자체로 완전체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벗어난 불멸, 반신의 존재가 바로 혈신인 것이다.
도중문은 현재 스스로 혈신에 가까워져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최상의 제물을 쓰고, 수많은 피와 정혈을 흡수해도 혈신의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황제를 이용해 제물을 끊임없이 수급했던 나조차도 불가능했거늘!’
진운룡이 혈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는 결코 믿을 수 없었다.
“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만나는 녀석들마다 모두 똑같은 질문을 하는군.”
진운룡이 조금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정체가 뭐 그리 중요한가? 지금은 네 녀석이 나를 쓰러뜨리느냐, 아니면 내가 네놈을 쓰러뜨리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말을 끝내자마자 진운룡이 몸을 날렸다.
도중문의 명치를 향해 혈검을 쭉 내민 상태였다.
“흥, 쉽게 당하진 않는다!”
도중문도 지지 않고 공력을 잔뜩 끌어올렸다.
도중문이 두 손을 위아래로 뻗으며 둥근 원을 그리자, 주변의 기운들이 손 사이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두 손 사이 공간에 핏빛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다.
후우우웅!
도중문이 순식간에 커진 소용돌이를 찔러오는 검을 향해 뻗어냈다.
치지지직!
두 기운이 마찰하면서 전진하던 검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졌다. 하지만 느려졌을망정 멈춘 것은 아니었다.
검은 여전히 천천히 도중문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파파팍!
기운과 기운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도중문의 얼굴에 불거진 핏줄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를 악문 그의 모습이 지금 그가 얼마나 힘을 짜내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검을 쥐지 않은 진운룡의 왼손에 주먹만 한 광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빌어먹을!’
도중문이 속으로 욕을 토해냈다.
그 와중에도 진운룡은 광구를 만들어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도중문의 열세가 확연해졌다.
만일 진운룡이 저 광구를 쏘아 낸다면 도중문은 막아낼 방법이 없다.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최대한 몸을 뒤로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쏘아지는 진운룡의 검이 도중문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전무했다.
전신 공력을 쥐어짠 도중문이 소용돌이를 폭발시켰다.
퍼어엉!
동시에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쉬아악!
“크윽!”
어느새 진운룡이 쏘아낸 광구가 도중문의 왼쪽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다.
광구에 살이 녹아내려 핏물조차 나지 않았다.
도중문의 신형이 힘없이 뒤로 날아갔다.
그 뒤를 진운룡의 혈검이 곧바로 쫓아왔다.
도중문이 허공에서 몸을 가누려 했으나, 검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도중문의 두 눈에 절망이 일었다.
‘이렇게 끝난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혈신을 코앞에 두고 이대로 끝난다는 것이 분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진운룡의 검이 그의 명치를 꿰뚫었다.
푸욱!
단전을 노렸으나 그나마 마지막에 도중문이 간신히 천근추를 시전한 덕에 단전이 아닌 명치에 검이 꽂힌 것이다.
“크악!”
도중문이 비명을 토해내며 피를 뿜었다.
검을 뽑지 않은 채로 진운룡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질문할 것이 있다. 지금 대답한다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마. 하지만 버티려 한다면 다른 방법을 쓸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확실하게 내가 원하는 답을 얻어낼 수 있지. 단지 네놈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나는 번거롭게 될 테지.”
진운룡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씨익 웃었다.
도중문 정도의 경지면 제령안이 쉽게 통하지 않는다.
제령안을 쓰려면 도중문을 죽이지 않고 최대한 빈사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조심해서 손을 써야만 했다.
그것은 무척 번거로운 일이었다.
진운룡의 눈빛을 본 도중문은 상대가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입을 열 것을 너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 섭혼술이라도 쓰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진운룡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능력이 되면 네놈이 스스로 알아내 보거라!”
진운룡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도중문의 복부에 박힌 검을 빼내었다.
“우선 단전부터…….”
단전을 파괴하면 당연히 도중문의 기운은 흩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도중문 정도의 경지에 달한 자가 단전만을 사용해 진기를 운용하지는 않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단전을 파괴한 후에 몇 가지 상처를 더 주고 피를 뽑아내면 도중문이 빈사 상태에 이를 것이고, 그때 제령안을 사용하면 무리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진운룡의 검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중문의 단전을 향했다.
그때였다.
진운룡이 갑자기 검의 경로를 바꿔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채애앵!
쇳소리와 함께 암기와 비슷한 무언가가 검에 맞고 튕겨 나갔다.
쉬쉬쉬쉭!
그와 동시에 연달아 똑같은 암기 수십 개가 진운룡을 노리고 날아왔다.
암기가 날아온 곳을 바라보는 진운룡의 두 눈이 깊게 침잠했다.
암기에 실린 경력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다다당!
고작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암기를 쳐내는데 진운룡이 손목에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누구냐!”
싸움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서 있던 적산이 소리쳤다.
하지만 암기가 날아온 허공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갑작스럽게 서늘한 기운이 진운룡의 온몸을 덮쳐왔다.
그것은 절대적인 위압감을 가지고 있어 결코 막아내거나 튕겨낼 수 없다고 진운룡의 육감이 강력하게 경고했다.
즉시 진운룡이 뒤로 몸을 훌쩍 날리자 그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체 누가!’
진운룡이 놀란 눈으로 기운이 쏘아진 곳을 찾았다.
순간 진운룡의 눈에 쓰러진 도중문 옆에 한 복면인이 서 있는 것이 잡혔다.
‘어느새?’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암기에 실린 경력은 혈마나 도중문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진운룡조차도 감히 경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진운룡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
‘최소한 나와 동급의 고수!’
강호에 진운룡과 비슷한 경지에 오른 고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백삼십여 년 전, 제갈여령이 찾아왔을 당시 진운룡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자신의 스승처럼 등선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진운룡은 제갈세가에 대한 스승의 유지를 지켜 속세를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조각을 완성하리라 마음먹고 혈마를 처단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혈마가 펼쳤던 혈신대법의 저주가 그를 덮쳤다.
광기가 진운룡의 부동심을 흔들고, 속세와의 끈은 엉켜버렸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진운룡은 이미 등선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진운룡은 신선이 되지 못했을 뿐, 이미 신선의 경지에 올라 있다 해도 틀릴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다른 인간이 진운룡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미 등선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진운룡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지금 진운룡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등장 시기 또한 묘했다.
도중문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것은 상대도 혈신대법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의 실력을 볼 때 도중문의 배후에 있는 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저자도 나처럼, 아니, 일부러 등선을 하지 않고 혈신대법을 받은 것인가?’
진운룡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진운룡이 복면인을 바라봤다.
어쨌든 상대는 이제껏 혈신대법과 관계된 자들 중 가장 강하고 높은 경지에 오른 자다.
어쩌면 복면인이 혈신대법의 원흉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것은 기회였다.
복면인을 제압할 수 있다면 오랫동안 진운룡을 갉아먹던 광기와 피의 저주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웬 놈이냐!”
적산이 날카로운 눈으로 복면인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막 달려 나가려는 적산을 진운룡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네 상대가 아니다.”
조금은 불만 어린 얼굴로 적산이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강함은 적산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으나, 특유의 성질머리 때문에 강한 상대에 대한 호승심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갑자기 끼어들어 미안하구나.”
그때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육합전성이나 혜광심어처럼 온 사방에서 들려왔고,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는, 목소리라기보다는 울림의 느낌이 강한 소리였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그 말투만은 마치 손자를 대하는 조부(祖父)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 그대는 누구인가?”
쓰러져 있던 도중문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진운룡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도중문이 복면인을 알지 못한다? 놈이 배후일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
갈수록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복면인은 자기가 지금 싸움터 한가운데 난입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인지, 진운룡과 적산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도중문의 혼혈을 집었다.
“허…….”
적산이 어이없는 듯 헛바람을 켰다.
그러한 적산의 반응을 무시한 채 복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진운룡을 바라보던 복면인의 시선이 도중문에게로 향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마. 네가 원하는 답은 두 달 뒤면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어느새 도중문을 어깨에 걸친 복면인이 갑작스럽게 진운룡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따다다당!
진운룡이 암기를 막아내는 순간, 복면인이 그대로 신법을 펼쳐 몸을 날렸다.
“어딜!”
진운룡이 대각으로 검을 쳐내자 빛줄기가 복면인이 날아오른 공간을 사선으로 갈랐다.
복면인의 신형이 양단되었다 싶은 순간 흐릿하게 사라졌다.
“분신술?”
진운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흩어진 복면인의 신형으로부터 복면인과 같은 모습의 형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한데 그 모두가 환영이 아닌 실체였다.
밀교나 도가에서 전설로 전해지는 술법인 분신술이었다.
고래로부터 수천 년을 이어온 밀종과 노자 이전부터 속세와 연을 끊고 오로지 신선의 도를 추구해온 선문(仙門)이라는 곳에 그와 같은 술법들이 존재한다고 스승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복면인이 그 술법을 사용한 것이다.
동시에 여덟 명의 복면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운룡이 여덟 복면인을 모두 잡을 수는 없었다.
‘도중문!’
복면인은 여덟 분신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모르나, 도중문까지 모두 실체일 수는 없었다.
진운룡은 즉시 도중문의 기운을 찾았다.
북서쪽으로 몸을 날리는 복면인에게서 도중문의 기운이 느껴졌다.
진운룡의 신형이 북서쪽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하지만 복면인의 신법은 진운룡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잠깐 멈칫했던 그 순간, 이미 복면인은 진운룡의 감각 범위 바깥으로 멀어져 있었다.
신형을 멈춘 진운룡이 허탈한 얼굴로 복면인이 사라진 허공을 응시했다.
결국 복면인에게는 손도 대보지 못하고 도중문까지 놓쳤다.
강호에 나선 이후로 처음 겪는 완벽한 실패였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자가 존재하다니…….”
멍한 얼굴로 진운룡이 되뇌었다.
결코 진운룡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상 못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복면인에게서 받은 충격이 컸고, 오늘 일에 대한 혼란이 그의 머릿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도 존재했다.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라면, 이 모든 일의 진정한 원흉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피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복면인만이 이 지긋지긋하고 진창 같은 저주를 풀어낼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잠시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진운룡이 몸을 날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