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룡전-139화 (139/150)

# 139

/혈룡전 6권 (139화)

4장 새로운 적 (1)/

망우의 죽음, 무림맹의 해체, 황제의 칙령.

연속적인 충격으로 강호는 혼돈에 빠졌다.

동창에 의해 마제 하우광이 죽고 마교가 멸망했을 당시에도 무림인들의 충격은 컸으나, 망우의 죽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망우는 무림에서 전설적인 존재였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고 세수만 해도 백이십이 넘은, 고금을 통틀어 손가락에 꼽힐 고수였다.

무공뿐만 아니라 승려로서도 이미 고승의 반열에 든 강호 무인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그런 망우가 황사 도중문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듣고, 무림인들은 처음에는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 후에는 모든 무림인들이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이제는 황제가 무림을 지우려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림맹마저 해체되었으니 이제 그 칼끝이 중원 곳곳에 퍼져 있는 무림 문파와 세가로 향할 것이 자명했다.

이제 그들은 칙령에 따라 봉문을 하고 모든 제자들을 해산시킬 것인지, 아니면 동창의 칼날을 피해 숨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역도로 몰릴 것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항전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때, 하나의 소식이 강호에 퍼졌다.

도중문이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도중문이 종적을 감춘 이유는 진운룡이 도중문과 동창 무사들이 머물던 향화루를 덮쳤고, 진운룡에게 동창 무사들이 도륙을 당했으며, 도중문 또한 중상을 입고 도망쳤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무림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들이 그동안 진운룡을 어떻게 생각했고, 진운룡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동창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던 무림이 최초로 반격을 한 사건이었고, 그것도 적의 수장이 꼬리를 말고 달아나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단체나 세력이 아닌 한 사람의 무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랍고, 무인들의 긍지를 북돋고 있었다.

강호인들 사이에서 진운룡은 순식간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가 개방을 풍비박산내고 남궁진천과 무림맹마저 한차례 뒤흔들었던 사실도 이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혈교와 관련이 있어 징치를 한 것이다.’ 라며, 진운룡이야말로 그간 사마의 무리들과 앞장서서 싸웠던 영웅이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천 당문이나 개방 등, 진운룡에게 피해를 입은 몇몇 문파 사람들이 진운룡은 또 다른 악마라는 둥, 진운룡 역시 피를 빨아먹는 괴물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는 둥, 흠집을 내기위해 애썼으나, 누구도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바닥까지 내려간 무림에 있어 지금 유일한 희망이 바로 진운룡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진운룡과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던 몇몇 문파들은 오히려 그의 미화에 더욱 앞장섰다.

그들은 진운룡의 이름을 앞세워 무림인들을 끌어들이고 조정에 맞서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들에겐 벼랑 끝에 선 무림과 문파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진운룡은 현재 정파나 사파, 모든 무림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   *   *

북경 자금성 황제의 침소.

금의위 도독 황립을 앞에 둔 가정제가 안절부절못하며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황립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화, 황사가 실종되었다고?”

불안한 표정으로 가정제가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가정제가 손톱을 깨물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 그 무림 놈들의 짓이냐?”

황립의 미간에 주름이 어렸다. 황제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는 황사 도중문을 현세에 내려온 신선이라 믿고 있었다.

그간 도중문은 황제에게 신비로운 도술과 현묘한 신단(神丹)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본래 도술과 양생에 관심이 많던 가정제였기에, 황사 도중문의 등장 이후로 정사는 팽개치고 선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도중문은 그런 황제에게 혈신대법을 이용한 단약들과 양생술을 제공해 확실한 환심을 얻었다.

그가 제공한 단약과 양생술은 제법 효과가 있어, 혈신대법의 실체를 모르는 황제는 그것이 도중문의 도력이 높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나 도중문이 제공한 단약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고, 계속 복용하지 않으면 효과가 사라지고 오히려 기력이 빠져나가는 악독한 독약이었다.

중독이 된 황제는 끊임없이 단약을 찾았고, 당연히 황제의 도중문에 대한 의존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종국에는 조정의 대소사까지 도중문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되고, 단약이 효과를 봤다 믿은 황제는 도중문이 살아 있는 신선이라 추앙하게 되었다.

이번 무림 토벌 계획 역시 도중문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한데 살아 있는 신선 도중문이 무림의 무인에게 중상을 당하고 종적이 묘연해진 것이다.

도중문만 믿고 있던 가정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사실 그간 황실이 무림과 무인들을 존중해서 그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무인들과 그들이 이룬 문파는 항상 황실과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황제와 조정을 우습게 알고 황명과 나라의 법을 개의치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렇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임에도 손을 대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무인들과 그 세력이 가진 강력한 무력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고수들.

하늘을 날고, 장풍을 뿌려 대는 천외천의 존재들을 상대로 군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세력 대 세력의 대결이라면 황군이나 관군을 동원해서 제압할 수 있었으나, 인간의 틀을 벗어난 초인들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아무리 수만의 관군을 동원해 그들을 잡으려 한다 해도, 그들이 마음먹고 숨거나 달아나면 잡을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혹여 그런 자들이 악심(惡心)을 품고 황제나 조정의 대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검을 들고 몰래 잠입해 황제나 조정 신료들의 목숨을 노린다면 어찌 그들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인가.

반면 가만 놔두면 이권과 명예를 걸고 저희들끼리 수시로 죽고 죽이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그냥 놔두고 놈들 스스로 자멸하도록 놔두는 편이 나은 것이다.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무림과 관은 불가침의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가정제는 도중문을 믿고 그 관례를 깼다.

가정제는 도중문이 황실 뒷산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한 번의 주먹질로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도중문이라면 무림의 고수라 해도 결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도중문은 그 무시무시한 마교의 교주를 죽이고 마교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며칠 전에는 무림 신승이라 불리는 망우를 죽이고 무림맹마저 해체시키며 파죽지세로 무림을 토벌했다.

물론 망우와의 대결 중 도중문이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에 잠깐 걱정을 하기는 했으나, 비교적 가벼운 부상이며 무한에서 하루 정도 정양을 하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고 즉시 나머지 무림도당들을 토벌할 것이라는 보고를 바로 하루 전에 들었던 터였다.

한데 갑작스럽게 도중문이 실종되었고, 무한에 머물던 동창의 무사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것도 단 두 사람의 무인에 의해.

이렇게 되니 그간 황실에서 느꼈던 무림인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노, 놈의 정체가 무엇이라 하더냐?”

“진운룡이라는 자입니다. 그리 많이 알려진 자는 아니옵고, 최근 떠오르는 신진 고수로 강호에 떠도는 소문들에 의하면 이제 갓 약관을 넘은 젊은 자라 하옵니다.”

황립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뭐라? 겨, 겨우 약관을 넘었다고?”

놀란 눈으로 가정제가 되물었다.

겨우 약관의 무인이 황사를 제압했다니, 게다가 이름이 크게 알려진 자도 아니었다.

‘무림에는 기인이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더니…….’

무림에 그런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을까 생각하니 가정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도중문도 없는 상태에서 마인들이나 정파의 고수들이 황제에게 복수하겠다 찾아온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를 어쩐단 말이냐! 황사도 없는데, 그 불학무식한 무림인 놈들이 황궁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지?”

가정제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시옵소서. 황사께서 비록 악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셨으나, 곧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황사께서 계시진 않으나, 저희 금의위와 동창에는 아직 황사께서 직접 키우신 수많은 고수들이 남아 있사옵니다. 소신들이 목숨을 걸고 황제 폐하를 지킬 것입니다.”

황립의 호언장담에도 가정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상대는 동창 무사들을 너무도 쉽게 도륙하고 도중문마저 패주시킨 존재였다.

그런 자를 과연 황궁에 남은 금의위와 동창 무사들이 막아낼 수 있을까.

다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고민에 빠져있던 가정제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동작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무림인들과 대화를 해야겠다! 전서를 날리든 파발을 띄우든 육환에게 연락해 직접 나서라 일러라!”

“폐, 폐하!”

황립이 놀라 소리쳤다.

“무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자들을 만나서 황제가 마음을 바꿨다 해라! 짐이 본심이 아니었고, 그저 무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무력시위를 한 것뿐이라고, 다, 다시 불가침의 관계로 돌아가자 일러라! 아, 아니! 내가 잘못했다 해라! 다시는 무림을 건들지 않겠다 하란 말이다!”

신단의 중독이 깊어졌기 때문인지 이미 이지가 많이 흐트러진 가정제였다.

그런 상태에서 두려움이 몰려오자 그는 스스로 무슨 말을 토해내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폐하 고정하소서! 고작 한 사람이 벌인 일이옵니다. 그자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감히 황상께 위해를 가할 마음을 먹겠사옵니까? 혹여 그자가 그런 마음을 품는다 해도 황사께서 키워내신 천혈단 이백 무사가 막아낼 것이옵니다!”

“흥! 그 대단하던 황사가 놈에게 당하지 않았더냐! 한데 고작 기껏 동창의 무사 나부랭이들이 그자를 막아낼 수 있다고? 네놈은 감히 그런 허황된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폐, 페하!”

가정제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황립은 머리를 땅에 박고 별다른 대꾸를 못하고 폐하만 연발했다.

“네놈이 정녕 내 명을 어기려는 것이냐?

황립이 착잡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찌 됐든 황제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도중문의 생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신, 폐하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그래, 그래! 거기,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움직여라! 짐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렸음이니라!”

황제가 희색을 하며 말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립은 답답한 가슴을 안고 황상의 침소를 빠져나갔다.

진운룡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무림과 황실의 관계는 진운룡으로 인하여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   *   *

“크크크크! 진운룡이라!”

호북 형문산 깊은 곳, 어두운 동굴 한가운데 산발을 한 채 가부좌를 틀고 있던 괴인이 쇠가 갈리는 듯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의 주변에는 혈향이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장으로 보이는 물체 수백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두 눈에서 번뜩이는 혈광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바로 무당산에서 실종된 남궁진천이었다.

“크크크큭! 역시 이 몸을 얻길 잘했구나! 그 거지새끼와는 천양지차야!”

남궁진천―혈마가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개방 방주 구천엽의 육신은 혈마의 혼을 담기에는 틀 자체가 너무 약했다.

반면 남궁진천은 현 강호에서도 수위를 다툴만한 경지에 오른 인물답게 육체의 그릇이 무척 컸다.

혈마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당산을 찾아간 보람이 있는 것이다.

“큭큭큭! 드디어…….”

남궁진천의 모습을 한 혈마가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며 눈을 빛냈다.

백삼십여 년 전 자신이 죽기 전 가졌던 힘을 모두 회복했을 뿐 아니라, 이번 대법을 통해 혈신에 거의 다가갔기 때문이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백삼십 년 전 그 당시처럼 혈신이 될 수 있는 최후의 대법을 펼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혈마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가 무슨 일을 하던 막을 자가 없었기에 충분한 제물과 시간을 투자해 대법을 시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무분별하게 제물을 모으다 보면 당장에 진운룡에게 꼬리가 잡힐 것이 분명했고, 시간 역시 혈마의 편은 아니었다.

언제 진운룡이 그의 종적을 잡아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제물을 모으다 보니 대법의 크기도 본래 원했던 것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법을 완성할 수 있었고, 힘을 손에 넣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던 진운룡 그놈을 먼저 없애고, 이 세상을 지우겠노라!”

혈마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신의 실패작이었다.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너무 약하고,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불완전한 존재를 지우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

그것이 혈마가 목표하는 것이었다.

불로불사의, 불멸의 존재들이 세우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남궁세가로 움직여야겠군!”

한차례 광소를 터뜨린 후, 혈마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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